친구 사이 우정과 신뢰

친구 사이 우정과 신뢰

수평적 인간관계와 신뢰

오륜은 우리 전근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이지만 대부분 수직적 관계를 규정하는 윤리였다. 곧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의 관계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 가운데 오직 붕우유신(朋友有信)만큼은 수평적 윤리에 속한다.
붕우유신은 믿음 곧 신뢰를 강조한다. 신뢰로 해석되는 신(信)의 유학적 의미는 내면의 성실을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 또는 자세이다. 여기서 내면의 성실성은 다름 아닌 충(忠)이다. 그래서 둘을 합쳐 충신(忠信)이라 불렀고, 『논어』에서 강조하였다. 내면이 성실하고 충실한 사람은 자연히 남이 신뢰하게 되어 있다. 신뢰는 성실한 내면의 결과라 하겠다.
오늘날 민주 사회에 적용되는 윤리의 성격은 수평적이다. 적어도 공적 사회생활에서 수직적 윤리를 강조하면 자칫 고리타분한 ‘꼰대’라는 소리를 듣거나 따돌림을 당한다. 겨우 가족 내에서 적용되지만, 그마저도 가족 간의 유대나 화목이 깨어질 수 있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나이와 성별과 출신과 상관없이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이때 신뢰가 없으면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그 옛날 공자도 ‘신뢰가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라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을 말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변함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관계는 물론, 조직의 유지와 관리, 경제활동, 설득과 협상 등에서 신뢰가 깨어지면 일이 성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의 가치도 신뢰가 있다면 더 올라갈 것이다. 신뢰는 비단 친구 사이만이 아니라 부자(父子), 남녀, 사제(師弟), 상급자와 하급자, 선배와 후배, 동료, 생산자와 소비자 등의 모든 관계에서 적용된다.

친구의 덕을 사귐

친구를 왜 사귀는가? 글쎄 이런 질문을 하면 다들 의아해하겠다. 특별한 목적의식 없이 사귀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리라. 대개 같은 학교·종교·지역·직장 등에서 자연스럽게 사귄다. 그래도 뭔가 끌려서 사귀었을 것이다. 자기에게 잘해주어서 잘생겨서 또는 생각이나 취향과 가치가 같아서 사귀었을 것이다.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맹자』를 보면 “친구를 사귀는 일은 그 덕을 사귀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이는데, 조선조 사대부들도 이랬을까? 죽마고우처럼 자연스럽게 사귀는 일도 있겠지만, 성인이 된 후의 사귐에는 이 말은 분명 일리가 있다. 친구 잘못 사귀어 낭패를 보거나 불행하게 된 사람들을 보라! 『소학』에서는 증자(曾子)의 말을 빌려 “친구를 통해 인(仁)을 돕는다.”라고 했고,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선의 길로 권면하는 일이 친구를 사귀는 길이다.”라고 하였고, 공자의 말을 빌려 “충고하여 선의 길로 인도하되 듣지 않으면 그만두어 욕되지 않게 하라.”라고 말해주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친구를 사귈 때 이런 가르침에 충실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친구에 대한 이런 관념은 이후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 사례를 통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자.

충고하여 선으로 인도하라

성인이 되어 친구를 사귈 때는 상당히 조심스럽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당장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달콤한 말이나 아첨하는 말에 속아 사기를 당하거나 낭패를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조상들도 그랬을 것이다. 일단 믿음직한 사람은 자기에게 아첨하는 사람보다 충고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 충고를 통해 우정이 더 깊어질 수 있다. 다음은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 현령으로 있을 때 김굉필(金宏弼)이 찾아갔더니, 그가 금으로 된 술잔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그것을 보고 김굉필이 책망하기를, ‘자네가 이런 소용없는 일을 할 줄 생각하지 못했네. 뒷날 반드시 이것이 사람을 그르칠 것이네.’라고 하였다. 과연 그 뒤에 사람들은 고을 원님이 이 일로써 장물죄를 지었다고 하였다. 김굉필은 정여창과 뜻과 도가 같아서 특별히 서로 사이가 좋았다. 서로 만날 적마다 도의를 연마하고 고금 일을 토론하여 때로는 밤을 새우기까지 하였다.”
친구에게 허물이 있을 때 충고하는 것이 진정한 도리였다. 또 친구의 허물을 넌지시 충고한 사례도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인다.
“이극배(李克培)와 백씨(伯氏: 저자 성현의 큰형인 成任)는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이극배는 도승지이고 백씨가 우승지였는데, 이극배가 어느 기생을 사랑하여 자취를 감추자 백씨가 간 곳을 알아내고 시를 지었다.

관아가 파하여 돌아올 때 날이 저물려는데(衙罷歸來日欲低),
명화(기생의 이름)와 국사(이극배의 自號) 둘이 서로 만났구나(名花國士兩相擕).
뉘 집의 골목 안에 수레를 숨겼는가(誰家巷裏藏車駕)?
사온서(司醞署: 술을 담당한 관서)의 동쪽이요, 예부(禮部)의 서쪽일세(司醞東邊禮部西).

이런 시를 몰래 벽에 붙여두었는데, 이극배가 이를 보고 떼어내 소매 속에 넣어버렸다. 이로부터 더욱 뜻이 서로 맞았다. 이극배의 관직이 바뀔 때 세조가 ‘공을 대신할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아뢰기를, ‘성(成) 아무개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여, 백씨가 도승지에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되었다.”
이 사례는 친구 사이의 장난으로 보이나, 그것을 통해 기생집에 출입하지 말라는 은근한 충고였다.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내용이다.

아름다운 우정과 신뢰

친구를 사귈 때 친구의 도움을 받자는 식으로 사귀면 곤란하다. 사기꾼의 전형적인 수법에 말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바르게 친구의 덕을 보는 경우는 우정과 신뢰의 결과일 뿐이다. 흔히 옛날 어른들이 하신 말씀 가운데 ‘너보다 나은 사람을 사귀라.’라는 당부도 덕이나 인품을 두고 말했다면 옳다. 다시 강조하지만, 친구의 은덕을 입는 일은 그 결과일 뿐이다. 그런 사례가 앞의 『용재총화』에 보인다.
“둔촌(遁村) 이집(李集)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그가 사귀는 사람은 모두 당시에 영웅호걸이었다. 세상일을 비판하다가 그 말이 신돈(辛旽)에게 미쳤다. 신돈이 몰래 해치려고 하자,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도망갔다. 동갑인 친구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가 영천(永川)에 산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최원도가 매우 후하게 접대하고 3년 동안 밖에 못 나가게 하였다. 마침 둔촌의 아비가 세상을 떠났는데, 최원도는 장례의 모든 일을 자기 아비와 똑같이 하여 그 어머니 무덤 옆에 장례를 지내게 하였다.”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 사실 이집의 본명은 따로 있다. 그가 이름을 ‘집(集)’ 자로 바꾼 것은 『맹자』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으로써 말한 ‘의를 모은다’라는 집의(集義)에서 따온 글자이고, 자도 호연(浩然)으로 바꾸었다.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도가 숨어 있다. 당연히 친구를 사귀는 목적을 앞의 맹자가 말한 “친구를 사귀는 일은 그 덕을 사귀는 것이다.”라는 점에 두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는 상대방 최원도의 덕이 이미 훌륭했음을 말해준다. 그 덕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화를 피해 그의 집으로 피난을 갔고, 또 그런 믿음에 어긋나지 않게 최원도는 3년 동안 숨겨주고 묘지까지 양보한 우정을 발휘하였다. 친구를 사귐에 상대 친구의 인품과 덕이 더욱 돋보이는 사례라 하겠다.
이런 우정과 신뢰는 고명한 사대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있었다.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오는 사례이다.
“성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강릉의 군사 세 사람이 선조 때에 북방의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마침 전염병이 크게 번져 세 사람이 차례로 병들었다. 최후에 한 사람이 급기야 죽었다. 남은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는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천 리 길을 같이 왔다가, 한 막사에서 같이 누워 같은 병으로 서로 간호하면서 의지하였는데, 살아서 같이 왔다가 죽어서 버리고 돌아가는 일은 인정과 도리상 참기 어렵다.’라고 하고, 막사 뒤에다 장사지냈다. 그 후 병역을 마치고 돌아갈 때 두 사람은 그 시체를 번갈아 짊어지고 먼 길을 고생스럽게 걸었다. 죽을 고비를 겪으며 한 달이 넘어서야 돌아왔다. 그의 아비가 그 은덕에 감사하여 술과 과일을 약간 갖추고 두 사람을 초청하여 사례하고자 하니, 두 사람은 끝내 마다하면서, ‘우리는 대접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한 끼 밥이라도 신세를 진다면, 당초에 서로 돌보던 뜻이 헛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평소의 우정과 신뢰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병사들의 우정을 전우애라고 부른다. 언젠가 미국이 명분 없는 전쟁을 할 때 병사들도 그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싸우는 이유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전우를 위해서라고 한다. 싸우지 않으면 전우가 죽거나 다치기 때문이다.

죽마고우와 우정에 거는 기대

죽마를 탄 벗 곧 어릴 때 같이 놀던 친구를 죽마고우(竹馬故友)라고 한다. 그런 친구가 나이 들면서 소원해지기도 한다. 각자의 삶과 처지와 지적 수준, 그리고 뜻과 가치관이 달라서 자연히 멀어지기 때문이다. 완전히 절교하지는 않았지만 대개 그런 친구가 더러 있다. 옛이야기를 보면 죽마고우 가운데 왕이 되고 신하가 된 사례도 있다. 앞의 『해동잡록』의 기록이다.
“박석명(朴錫命)은 어릴 때 태종과 한 이불에서 잤다. 석명이 꿈에 자기 옆에 누런 용이 있어 보이므로, 깨어 보니 곧 태종이었다.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서 서로 사귐이 더욱 두터웠다. 훗날 태종이 즉위하고 석명은 승지가 되었는데, 태종이 이르기를, ‘누가 그대를 대신하여 승지의 임무를 맡기면 좋겠는가?’라고 하니, 석명이 답하기를, ‘조정의 신하 가운데 적당한 자가 없으나, 오직 승추도사(丞樞都事)로 있는 황희(黃喜)가 진실로 마땅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승지로 삼았다. 황희는 훗날 이름난 재상이 되니, 세상 사람들은 박석명이 사람을 알아볼 줄 안다고 하였다.”
어릴 때 한 이불에서 잤다는 사실은 매우 친한 죽마고우임을 알 수 있다. 태종은 단지 죽마고우라는 이유로 박석명을 특별 대우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만한 능력이 있어서 썼다는 사실은 황희를 알아보는 박석명의 식견에서 증명된다. 죽마고우가 끝까지 함께 하기는 쉽지 않다.
또 우정이 매우 깊어 거의 동시에 죽은 인물도 있다. 이이(李珥,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후백은 노진(盧禛)의 절친한 친구였는데 그가 죽으니 너무 슬퍼하였다. 이때 후백은 휴가를 받아 고향에 성묘하러 갔었다. 마침 노진과 동향이었으므로 그의 무덤 앞에 전(奠: 제물을 올리고 제사 지냄)을 하고 집에 돌아와 하룻밤을 앓다가 죽으니, 사림이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노진과 이후백이 서로 이어 죽으니, 당시 여론이 정2품에 사람이 없다 하였다.”
이후백의 죽음이 우연의 일치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남다른 우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죽음을 그것과 연관시켰으리라. 아니면 친구의 죽음이 너무 슬퍼 병을 얻어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좌우간 당시의 문화에서 볼 때 정상적인 친구 사이의 우정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 신뢰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 사례로 앞의 『송와잡설』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신숙주는 세종 때에 집현전 학사였고, 그로 인해 성삼문과는 더욱 친하였다. 세조 때 성삼문 등의 거사 계획이 발각되었던 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성삼문 등과 형제보다 더 친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걸로 생각했소.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하려던 참이었는데, 당신만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라고 하였다. 신숙주는 말문이 막혀 몸 둘 바를 몰랐다. 상고하건대, 이 일은 선비들 사이에 미담으로 전해오던 것이지만, 잘못 전해 듣고서 쓴 것이다. 부인은 그해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그해 4월에 일어났으니, 이러저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기록자의 지적대로 누가 잘못 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의도는 정말로 우정이 돈독한 친구 사이라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등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부인의 행동과 말을 통해 알려 주고 있다. 기독교 성서에서도 예수도 따르는 자들에게 스스로 친구라고 하였으니, 친구 사이의 신뢰라는 것이 어떤 것이겠는가?

사귈 친구의 덕이 있는지 어떻게 알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신뢰 또는 믿음은 비단 친구 사이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심지어 나와 대립적 입장에 선 사람이더라도 인간적 신뢰가 쌓이면 선을 넘는 비열한 짓은 안 한다. 『삼국지』 같은 옛이야기를 조금만 읽어봐도 그렇다.
현대인들 가운데는 조그만 이익을 앞두고 남을 속이는 것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사귀었던 친구를 배신하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고 보면 친구라고 해서 다 참된 친구는 아닌 모양이다. 이럴 때 우리 조상들이 지켰던 원칙으로서 그 덕을 살펴보고 친구를 사귀어야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사귈 대상인 친구가 덕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을 수 있겠다. 바로 자기에게 덕이 있어야 상대에게 덕이 있는지 없는지 금방 간파할 수 있다. 그 덕이 인간의 성품을 간파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어린 사람이라면 그 질문에 타당성이 있겠으나, 나이 든 사람이 그렇게 묻는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인생 공부를 더 하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