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이 무엇이기에 목숨과 바꾸는가?


충절이 무엇이기에 목숨과 바꾸는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고려말 성리학이 들어오고 조선 시대 『소학』의 보급으로 효도 못지않게 강조된 윤리가 충성과 절의, 곧 충절(忠節 또는 忠義)이다. 이 충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조선의 정치 현장과 조상들의 삶 또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왕조 교체기에 생긴 일, 단종 복위 운동, 외침을 당했을 때의 국난극복 등 그 동력의 원천은 이와 관련이 있다. 더 나아가 근대 전환기부터 시작된 독립운동도 얼핏 보면 군주제의 전통적 가치와 무관하게 보이지만, 그 충성의 대상이 근대적 국가공동체로 바뀌었을 뿐, 충성이라는 내면적 가치는 바뀌지 않았다. 우리 독립운동가치고 유학적 소양이 없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근대 사회에서 충절이 널리 보급된 것도 『소학』의 영향이 크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
이 말은 전국시대 왕촉(王蠋)이 죽으면서 한 말이다.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제나라를 쳐서 이기고, 왕촉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부르니, 왕촉이 이와 같은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한다. 이 말이 후세에 모범이 되어 많은 충신과 열녀가 나오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 ‘왜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열녀도 그러한데 이 문제는 별도로 다룬다.
아무튼 현대의 우리로서는 도대체 충성이란 무엇인지, 꼭 필요한 가치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사람들은 윗사람이나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말하면 대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공동체의 그것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이런 충절이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가치인가? 현대적으로 인간의 삶을 인도할 아무런 가치가 없고, 단지 조상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키워드 수준에서 만족해야 할까?

여말선초와 충절

한국인이라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다. 한때 초중등 교과서에 충신의 대명사로 소개하고, 국문학사에서 의미 있는 시조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두 분 다 충신으로 평가하지만, 정몽주는 죽임을 당했고 길재는 살아남았다. 그 차이를 살펴보자.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고사이다.
“포은이 고려 말에 시중(侍中)으로서 충성을 다해 나라를 돕는 것을 자기의 일로 삼았다. 혁명할 즈음에 천명과 인심이 모두 새로운 왕을 추대하는 쪽에 있었지만, 공만 홀로 의연히 고려를 배반하지 못할 기색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서로 잘 아는 스님이 있었는데, 공에게 말하기를, ‘시사(時事)를 알만한데, 공은 어찌 고집만 피우고 고생합니까?’라고 하니, 공은 ‘사직을 맡은 사람이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미 나의 처신이 정해져 있다.’라고 하였다.”
바로 여기서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라는 표현은 앞의 ‘왕촉’의 말과 다르지 않아 『소학』의 이 말이 이미 확고한 신념이 되었다. 혹자는 정몽주가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치 상황에 동조해 놓고, 혁명의 막바지에 와서 동참에 거부하는 일은 이율배반이라고 지적하지만, 적어도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그의 명분 자체는 설득력이 있다.
정몽주를 죽였다는 보고를 받은 태조는 화를 내며 아들에게 이렇게 탄식한다. 이정형(李廷馨)이 지은 『동각잡기(洞閣雜記)』에 보인다.
“우리 가문은 본래부터 충효로 이름났는데, 네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남들은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까닭은 충신과 효자가 되기를 바란 일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처럼 하였으니, 내가 약을 먹고 죽어버리고 싶다.”
태조 역시 충효의 가치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가치가 인륜의 근간이라는 점을 익히 알 수 있다. 역대 왕들도 비록 정치적 방향이 달라도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이(李珥 : 1536~1584)의 『석담일기(石潭日記)』의 기록이다.
“전에 김종직(金宗直)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이 충신입니다.’라고 하였더니, 성종이 놀라 낯빛이 변하므로, 종직이 천천히 아뢰기를, ‘불행히 변고가 생기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성종의 안색이 펴졌다.”
성종은 수양대군의 후손이므로 당시 누구든 성삼문의 단종에 대한 충절을 입에 담는 일을 껄끄럽게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성종 자신도 성삼문처럼 자기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길재는 정몽주처럼 죽임을 당하지도 또 스스로 죽지도 않았다. 『동각잡기』의 기록이다.
“길재는 공양왕이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돌아가 홀어머니를 봉양하였으므로 고을에서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 태종이 그 소문을 듣고 길재를 불러 벼슬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길재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저하께서 옛정을 잊지 못해 저를 부르셨는데 저는 벼슬할 뜻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종이 말하기를 ‘자네가 말한 것은 불변하는 강상(綱常)의 도리이니, 의리는 빼앗기 어려운 것이다. 부른 사람은 나이지만 벼슬을 내리는 사람은 주상이니 주상께 사직함이 옳다.’라고 하자, 길재가 정종에게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여인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향리로 놓아 보내어 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하여 주시고, 늙은 어미를 봉양하다가 여생을 마치도록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정종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예우하여 보내고, 뒤에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으로 전교하기를, ‘길재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니 참으로 의로운 선비이다. 들으니 그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불러 벼슬을 주어 그 충의를 표창하라.’라고 하였다.”
길재의 말에서 『소학』을 소환하고 있다. 물론 왕도 자기 조정에 벼슬하지 않아도 그 뜻을 가상히 여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이 옳고 바른 길이라는 점을 익히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충절은 신하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바로 전통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효도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가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몽주와 길재의 차이는 무엇일까? 길재도 이미 고려가 망할 줄 알았다. 윤근수(尹根壽,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
“길재는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의 도리를 이색(李穡)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지금 시대에는 제각기 제 뜻대로 행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 대신들은 국가와 고락을 같이해야 하므로 떠나버릴 수 없지만, 너는 떠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 정몽주는 시중이라는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이색의 말대로 떠나서는 안 되고, 고려와 고락을 같이해야 했다. 만약 떠났다면 스스로 자기모순에 빠졌을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 녹을 먹고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그 조정을 위해 의리를 지키는 일은 도리상 옳다. 바로 여기서 죽을 줄 알면서 끝내 자기 태도를 버리지 않았던 일은 앞의 ‘왕촉’의 고사에 더 가깝다. 그가 옳다고 믿는 합당한 명분으로 역성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이상, 죽음은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이런 모습에서 어떤 이념이나 가치가 사람의 태도를 확고하게 결정하는 힘이 크다고 하겠다. 당시 충절이 현실에서 그렇게 작용하였다.

충절은 사대부만의 전유물인가?

충절은 흔히 사대부에게 해당하는 일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사대부가 아닌 사람이 실천하는 가치이기도 하였다. 윤기헌(尹耆獻, 1548~?)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 환관 주처신(朱處臣)에게 술 취한 연산군이 춤을 추자고 협박해도 추지 않자, 팔과 다리를 차례로 잘라도 끝내 거절하므로 그를 호랑이 밥으로 던졌다고 한다. 그가 거절한 까닭은 자기가 모시는 군주에게 허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전한다. 또 같은 책에는 하인의 충절도 등장한다.
“선비 박인수(朴仁叟)는 평양 사람으로 세종 때에 급제하였는데, 단종 복위 운동 때 죽었다. 그의 며느리가 홀로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마침 임신 중이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면 죽여라.’라고 하였다. 그의 여종 한 사람도 임신 중이었는데 며느리에게 말하기를, ‘마님께서 딸을 낳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둘 다 아들을 낳게 되어도 저의 자식으로 대신 죽음을 받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자식을 서로 바꾸어 종이 자기 자식이라 하였으니, 즉 지금 박충준(朴忠俊)은 바로 그의 후손이다. 대구에 산다.”
주인의 가문을 위해 자기 자식을 희생하려던 하인의 이야기이다. 그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지만 하인이 스스로 그렇게 한 일은 주인에 대한 충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충성의 가치가 하나의 사회적 문화로 작용한 사례이다.

충과 효의 갈등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충절과 효도라는 두 가치가 갈등을 일으킬 때 무엇이 우선인가? 앞의 길재의 경우는 둘 다 지킬 수 있었지만, 정몽주의 경우는 만약 그때까지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효도를 포기해야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치 갈등을 많이 겪는다. 부모가 반대하는 사람과 혼인하려고 할 때도 그렇고, 직장 일과 가족 일의 갈등도 그러하다. 다음은 임진왜란 때 있었던 일로서 신흠(申欽, 1566~1628)의 『상촌잡록(象村雜錄)』에 보이는 고사이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성을 지키다가 죽었는데, 죽기 전에 자기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기를,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를 당했고, 모든 고을은 빼앗겼으니, 군신(君臣)의 의리는 중요하고, 부자(父子)의 은혜와 정은 가볍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제 강점기 독립을 위해 부모와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싸우신 분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광복 후에도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잘살았지만, 독립운동가 출신들은 빈곤과 싸우며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으니, 오늘날 가치관 혼란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장차 나라가 위태로울 때 가족의 부양을 팽개치고 충성을 다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누구에 대한 충성인가?

지금까지의 사례에서 보면 충절의 대상은 왕과 같은 한 개인만이 아니다. 여기서 충(忠)이 갖는 철학적 의미를 굳이 부연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차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 곧 주희(朱熹)가 주석했듯이 ‘자기를 다하는 것’이다. 그게 뭘까? 자기를 속이지 않고 그가 옳다고 믿는 바를 최선을 다해 실천하는 일이 곧 충이다. 충을 두 임금이나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데만 한정한다면 그 참된 의미를 상실한다.
현대의 어떤 일본 학자는 “주군이 주군답지 않아도 신하는 신하답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말이 일본의 전통에서는 강조되었다고 하는데, 일본의 신하는 주군답지 않아도 결코 떠날 수 없었다. 조선의 경우는 꼭 그렇지 않다. 『소학』에 “임금은 예의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라는 말이 있듯이 군신 관계에는 의리를 무척 강조하여, 그것을 위반하면 신하는 임금을 떠날 수 있고, 벼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일종의 계약 관계이다.
이때 선비들의 충이란 임금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순신(李舜臣)의 충도 그렇고, 앞의 송상현(宋象賢)도 그렇고, 많은 의병도 그렇다. 전시가 아닌 평상시에도 공동체를 위한 충성은 발휘되었다. 허봉(許篈 : 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인다.
“허후(許詡)는 영의정 허조(許稠)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 가문의 사람이다. 경기 감사로 갔는데, 그때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백성은 굶어 죽을 지경이었으나, 수령들이 구제할 방법을 몰랐다. 허후가 글을 올려 한강의 창고 곡식을 풀어서 백성을 돕자고 청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자, 그는 대궐의 뜰에 엎드려 울부짖으며 애통해하였다. 그러자 그 좌우에 있던 사람도 따라서 흐느꼈다.”
이는 백성을 위한 충성이다. 그 충성이 바로 공동체의 안녕으로 이어진다. 허조만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충성은 매우 많다. 임금은 다만 공동체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사람이므로 형식적으로는 그 대상이 된다. 오늘날도 기관장의 명을 따르는 일은 그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하는 일이다. 그래서 기관장의 부당한 명령이나 압박을 거부하는 일도 충성이다. 언젠가 어떤 공직자가 말하기를 “나는 조직에 충성하지 어느 한 개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고 했는데, 그도 충성의 의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직이 과연 국민의 사랑을 받도록 탈바꿈하기 위해 그 자신이 얼마나 충성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 없다.

우리에게 ‘충’이란

삼국시대와 같은 고대에도 충절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로 보면 충절 또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임을 의식·무의식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은혜와 보살핌이 없다면 충성도 요구할 수 없으니,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행위였다. 다만 이것이 공동체가 아닌 한 개인의 야욕과 특정 집단을 위해 맹목적 충성으로 변질하였을 때 갈등과 분쟁이 생겼을 뿐이다. 안타깝게도 권력투쟁 현장에서 그런 사례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충성이 아니다.
현대의 우리는 국가공동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과거 의병이나 독립운동가처럼 목숨까지 내놓고 충성할 수 있을까? 어떨지 예단할 수 없으나 공동체에 대한 사랑은 이어지고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 충절의 에너지가 우리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를 지키려는 대다수 시민의 무의식 속에 면면히 이어져, 지금의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동력이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