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술꾼

조선 최고의 술꾼

한국인의 음주문화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마셨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역사적으로는 기원전 3150년경 부장한 포도주 단지가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가 깊어 그보다 오래전부터 마셨을 것이다. 세계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나라 가운데서 한국을 제외한다면 우리나라 주당들이 매우 섭섭하겠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인이 한 달에 한 번 이상 폭음한 비율만 봐도 남자는 52.7%, 여자는 25.0%로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
하기야 우리 고대 역사에서부터 제천의식 후의 음주 가무가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유교가 들어온 후 제사 뒤에 마시는 음복도 음주문화에 한층 이바지했을 것이다. 최근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 코드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성인 한국인이 즐기는 것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음주·가무’가 가장 빈도수가 높았다는 점은 우리의 문화 유전자 속에 그것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술집이나 노래방이 성행하고, 코로나19 유행에도 그곳이 전파의 매개가 되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조선 시대에 외국인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 따르면 이렇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에 와서 놀라운 일 세 가지를 보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사신을 접대하는 관원이 큰 술잔으로 셀 수 없이 대작하여 한 섬의 술을 마실 수 있었으니, 세 번째로 놀라운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술은 집에서나 관청에서나 마셨던 모양이다. 이이의 『석담일기』에 따르면 “강사상(姜士尙)이 죽었다. 그는 집에 있으나 관청에 있으나 하는 일 없이 단지 술 마시기만을 좋아하였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술은 분명 좋은 점이 있으나 과하면 좋지 않으니 양면성이 있다. 좋아하더라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 음주이다. 조선 전기 음주문화와 그 실태를 살펴보고, 오늘날의 경계로 삼아보자.

누가 최고의 술꾼일까?

『대동야승』에는 음주 관련 기록도 꽤 등장한다. 음식에 대식가가 있는 것처럼 술에도 대단한 술꾼들이 있었다. 우선 『필원잡기』의 기록을 보면 수양대군의 수하였던 홍윤성(洪允成)은 주량이 커서 종일 마셔도 취한 적이 없었고, 또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는 그가 날마다 잔치를 벌였는데, 초대받은 사람들이 그의 위력에 눌려 만취하여 말을 거꾸로 타고 집에 돌아갈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이 홍윤성에 못지않은 사람도 있었다. 같은 책에 등장하는 홍일동(洪逸童)이 그 주인공이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과 국수 세 주발과 밥 세 바리때와 두붓국 아홉 주발을 먹었다.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사람이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와 물고기국 세 주발과 생선회 한 쟁반과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단지 미숫가루와 전술[물 타지 않은 술]을 먹을 뿐이고 밥은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 뒤에 죽었는데, 사람들은 배가 터져 죽었다고 의심하였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터질 일은 만무하고, 술로 인해 죽었을 것이다. 이 홍일동 다음이라고 말하면 섭섭할 인사가 또 있다. 홍일휴(洪日休)가 그 주인공이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그는 중국어에 능통하여 여러 번 북경에 왕래하였다. 일찍이 사신이 되어 남방으로 갔다가 하룻저녁에 술을 여러 말[斗] 마시고 그만 죽었다. 김수온(金守溫)이 그를 슬퍼하여 시를 지어 추모하기를,

실컷 마실 때는 천 잔의 술을 중히 여기고 痛飮千杯重
덧없는 인생은 한 털만큼 가볍다. 浮生一羽輕

라고 하였다.”
앞의 두 분 모두 폭음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 평소의 과음으로 죽은 이도 있다. 앞의 같은 책에 보인다.
“이효식(李孝植)은 민보익(閔輔翼)과 한 동리에 살았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여 취하도록 마셨다. 두건이 벗어져 맨머리가 되면서도 매일 술 마시자고 약속하였다. 민보익은 황달에 걸려 얼굴이 먹처럼 시커멓게 되었는데도 되레 술을 끊지 않아, 내가 늘 책망하였다. 민보익은 근무 중에 몰래 술을 마시면서 판서가 알지 못하도록 당부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이효식은 몹시 슬퍼하다가 민보익이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죽었다. 두 분은 술을 삼가지 아니하여 서로 이어서 세상을 떠나니, 술이 사람에게 끼친 화가 심각하다.”
요즘 식으로 보면 음주로 인한 지방간에서 간경화로 진행하여 황달이 온 모양이다. 그래도 마셨으니 어찌 살겠는가? 같이 술을 마신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과음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다. 좀 기이한 사례이지만 술이 세면 독약에도 잘 죽지도 않은 모양이다. 그 일화는 이중열(李中悅, 1518~1547)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에 등장한다.
“임형수(林亨秀)의 주량이 한이 없었다. 사약을 내렸을 때 독약을 넣은 술을 열여섯 주발까지 먹어도 취하지 않았다. 다시 더 독한 술 두 주발을 먹어도 취하지 않으므로, 이에 목을 매어 죽였다. 그 고을 사람들이 울며 이르기를, ‘공의 억울함을 천지신명까지도 알아주어 공이 잠깐이라도 이 세상에 머물게 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모두 술이 센 분들이다. 필자는 여기서 누가 최고의 술꾼인지 판단하기 힘들다.

술을 진정으로 사랑한 분들

사대부들이 술을 마실 때는 대체로 시와 음악과 춤과 기생이 빠질 수 없었다. 그것들은 묶어 실행하는 한 세트였다. 하지만 음주 자체만 즐기는 분들도 있었다. 권별이 『해동잡록』의 기록이다.
“윤회(尹淮)는 성품이 술을 좋아하였다. 한 번은 집에서 잔뜩 취해 있는데 세종이 급히 부르기에 주변 사람들이 부축해 일으켜 말에 태웠으나 취하여 깨지 않았다. 하지만 임금의 앞에 이르자 조금도 취한 기색이 없었고, 교지(敎旨)를 기초하라고 명령하니 붓 놀림이 나는 것 같았다. 모두 임금의 뜻에 맞아 참으로 천재라고 하였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 술을 마실 적에는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로부터 공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다.”
술을 많이 마셔도 제 할 일을 잘한 경우이다. 술을 마시는 일을 그만두게 할 수 없어 석 잔만 마시라 하니, 큰 잔으로 대체한 그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이륙의 『청파극담』에도 술을 좋아하는 이가 등장하는데 정인지(鄭麟趾)가 그 주인공이다.
“정인지가 일찍이 말하기를, ‘술은 노인의 젖이다. 곡식으로 만들었으니 마땅히 사람에게 유익할 것이다. 내 평생에 밥을 먹을 수 없었으니, 술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까?’라고 하였다. 서달성(徐達城)과 이평중(李平仲)과 손칠휴(孫七休)도 또한 술로써 밥을 대신했다. 오장(五藏)의 강약이 다르고, 또 술도 술술 들어가는 곳이 따로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는 사람은 반드시 술에 지게 되어, 술을 끊으려 하여도 끊지 못하고, 술기운이 없게 되면 다시 마시어 정신이 이미 안에서 사라진다.”
술을 밥처럼 먹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알코올 중독을 경계하였다. 또 욕심을 버리고 평생 술만 마시고 간 사람도 있다. 정홍명(鄭弘溟, 1592~1650)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보인다.
“윤광계(尹光啓)는 남도의 문사이다. 한평생 시와 술로 즐기며 명예나 재물에는 담담하였다. 일찍이 벼슬을 따라 도성 안으로 들어와서 인왕산 아래에 집을 짓고, 꽃을 심고 약초를 기르면서 조금도 풍진 세상의 기운이 없었다. 날마다 그의 외사촌 정봉(鄭韸)과 이웃에 살며 서로 마주 앉아 술을 들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웃에 술집이 있었는데 날마다 가져다 마시되 값을 묻지 않았고, 술집 주인 역시 언제 갚을지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배가 남쪽에서 쌀을 싣고 강가에 와 닿으면, 쌀을 술집에 보내면서 수효를 계산하지 않았다. 정봉은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윤광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살맛을 잃고 병과 술에 잠겨 있다가 겨우 60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임종 시에 술을 가져오게 하여 멀거니 보다가 작은 술잔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한평생 이것만을 좋아했는데, 지금 떠나가면서 어찌 한 방울만 마시겠느냐?’라고 하며, 다시 큰 술잔을 가져오게 하여 두 잔을 마신 뒤 쓰러져 베개를 벤 채 가고 말았다.”
정말로 술을 좋아한 사람들이다. 특히 벼슬까지 마다하고 술과 함께 유유자적한 삶, 죽는 순간에도 두 잔을 연거푸 마셨으니 정말로 술을 사랑했다고 하겠다. 술꾼들은 흔히 술에 대한 무용담(?)을 자랑하곤 하는데, 이 정도가 돼야 그래도 진정한 술꾼이라 하지 않겠는가? 술집에서 외상도 문제 삼지 않고, 갚을 때도 값을 따지지 않았다니 알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단순히 술이 좋아서 마신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같은 책에 보인다.
“김영휘(金永暉)는 한평생 문을 닫고 양생(養生)하며 수련하는 방법을 매우 좋아하였다. 집 둘레에 구기자를 가득 심고, 그 뿌리와 가지를 좁쌀과 함께 쪄 밥을 지으며, 그 잎과 열매로 나물을 하고 술을 빚어서 항상 먹고 마셨다. 때로는 뜻이 맞는 친구가 오면 얼른 내놓고 권하였다. 나이 60이 못되어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영남 사람 곽재우(郭再祐)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연히 난리 중에 김영휘를 만나서 양생법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양생법이란 주로 선가(仙家)에서 생명과 장수·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아무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은 신선이 되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신선은 죽은 경우에도 된다고 믿었다. 아무튼 술을 절제하며 마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발주’를 아는가? 몇십 년 전에 잠깐 유행했던 일로서, 결혼식이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 신랑 친구들이 구두에 술을 부어 신랑에게 마시게 했던 짓궂은 장난인데, 그 원조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앞의 『필원잡기』에 등장한다.
“이사철(李思哲)이 젊어서 여러 친구와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가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이사철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여러 선비도 차례로 마셨다. 서로 보며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유래가 우리로부터 고사(故事)가 될 것이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뒤에 이사철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잔의 술맛이 산에서 놀 때의 가죽신 잔보다 못하구려.’라고 하였다.”

술을 경계하라

술이란 좋은 점도 있지만 자칫하면 건강도 잃고 실수하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술을 경계하여 아예 끊거나 조심하는 일도 생겼다. 앞의 『해동잡록』에 실려 있는 일화이다.
“정여창(鄭汝昌)이 중년에 소주를 마시고 광야에 쓰러져서 밤을 지내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매우 걱정되어 밥을 굶었다. 이때부터 제사 뒤의 음복 이외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성종이 술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정여창이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신의 어미가 살았을 때 술 마시는 것을 꾸짖어서, 신이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였사오니, 감히 어명을 따르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감탄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그는 한 번 한 약속을 당사자가 죽어도 지키는 도학자다운 면모를 보였다. 한편 술을 경계하는 말을 술잔에 새겨 후손들에게 훈계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수경의 『견한잡록』의 기록이다.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라고 하기에 내가 써주기를,

술의 덕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큰 화목을 기른다(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많이 들지 말기를(唯願酌無多)

라고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술잔을 구워 보냈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저자 심수경은 여든 살이 넘게 장수했으며 83세에 관직에서 은퇴했고, 75세와 81세 때에 젊은 첩을 통해 아들을 낳아 노익장을 과시했으니, 아마도 술을 절제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우리의 삶과 음주

지금까지 우리 조상들의 에너지 넘치는 파란만장한 음주 사례를 살펴봤다. 술을 매개로 삶의 에너지가 다양하게 분출하였고, 도덕적 이념을 지키기 위해 절제하는 일은 극히 일부 인사에 한정되었고, 나라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술을 금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이런 술 문화 때문인지 그동안 음주로 인한 과실은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 해서 음주운전이 줄어들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술에 취해 한 일이라고 둘러댄다. 경각심이 필요하다.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조금만 방심하면 과음하게 되고, 그래서 실수하거나 건강을 해친다. 술로 인한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나이 든 사람은 대개 술을 조심하는 경향이 있다. 젊을 때 술에 많이 얻어맞아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다. 늦었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젊은이들은 이런 점을 귀담아들었으면 좋겠다. 건강을 잃기 전이나 실수를 하기 전에 예방하는 일이 최선의 방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