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여성의 삶

조선 시대 여성의 삶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근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거나 여성단체에서 유교를 비판할 때 그 대표적 대상이 되었던 내용 가운데는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다. 모두 『소학』에 등장한다. 삼종지도란 여자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도리를 말한다. 칠거지악이란 부인을 버릴 수 있는 일곱 가지 이유인데, 부모에게 순종치 않고 아들이 없으며 행동이 음란하고 질투하며 나쁜 병이 있고 말이 많으며 남의 물건을 훔치면 내보내도 된다고 한다. 다면 여기에도 조건이 있는데, 부인에게 돌아갈 곳이 없거나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르거나 처음엔 부부가 가난했으나 나중에 부귀하게 되었을 때는 버릴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을 삼불거(三不去)라고 부른다.
삼종지도는 여성에게 주체적 삶을 허락하지 않는 도리로 남성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칠거지악 가운데 특히 아들이 없어 내보낸다는 것은 어이가 없다. 아들이 없는 원인이 부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참으로 고약하다. 질투 또한 그러하다. 남편이 외도하거나 첩을 맞이했을 때 질투하지 말라는 법과 같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런 규범을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인간의 삶은 사사건건 규정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소학』의 이 가르침이 실제 삶에서는 악용·변형·무시되기도 한다. 관념의 실천은 글자 그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 전기 여성의 삶, 곧 딸과 부인과 어머니의 역할로서 삶이 어땠는지 제한된 자료에서나마 간단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조상들의 삶의 에너지가 어떻게 분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여성 교육과 여성의 재능

『대동야승』에는 여성의 교육을 어떻게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안에 따른 훈계 정도가 고작이다. 일반 교육은 아마도 『소학』의 내용을 따랐을 것이다. 거기에 보면 열 살 이전에는 남녀 모두 기본생활에 필요한 예절과 기능을 배운다. 열 살부터 남녀가 크게 달라지는데, 일단 여자는 규문 밖에 나가지 않으며 어른을 따라 길쌈과 제사 음식 장만 등을 배우고, 열다섯 살에 비녀를 꽂고 스무 살에, 큰 사정이 있으면 스무 세 살에 시집간다고 한다.
여성의 교육 내용은 대부분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이다. 주로 길쌈과 음식 만들기가 그것이다. 만약 부잣집 사대부의 딸이 아니라면 농사도 병행했을 것이다. 그 외 어머니나 집안 어른으로부터 여인이 갖추어야 할 규범도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로부터 교육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신숙주는 가훈을 지어 딸들에게 교훈하기를, ‘규문(閨門: 부녀자가 거처하는 곳) 안에서는 사사로운 은혜가 의리를 가려 지나치게 친해지기 쉽다. 버릇없이 지나치게 친해지면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이완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교만하고 질투하고 방자하게 되어 못 하는 일이 없어지니, 부부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일도 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통해 바깥 구경을 삼가도록 한 어떤 원님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효과적인 교육 방식도 있는데 앞의 『해동잡록』에 전한다.
“정여창(鄭汝昌)은 몸가짐을 매우 엄하게 하여 종일토록 단정히 앉고, 비록 무더위 가운데서도 처자가 그의 속살을 보지 못하였다.”
이는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이다. 올곧은 선비라면 대체로 이랬을 것이다. 윤리나 도덕 교육은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실천해 보여주는 것이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어떻든 규범 위주의 이런 교육은 여성의 재능을 썩히는 일이다. 드물지만 글을 가르친 사례도 있다. 사실 조선 시대 여인이 글을 아는 경우는 흔치 않다. 훈민정음의 등장으로 언문을 익히기도 했지만, 한문을 배워 글이나 시를 짓고 그림과 음악을 배우는 일은 기생을 제외하고는 매우 이례적이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부인이 문장에 능한 일은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물어 기이하다. 김성립(金誠立)의 처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의 여동생 허균(許筠)의 누나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누이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고 일찍 죽었으니 아깝다. 조원(趙瑗)의 첩 이씨와 정철(鄭澈)의 첩 유씨 또한 이름이 났다. 논평하는 자들은 늘 ‘부인은 마땅히 술과 음식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과 길쌈을 집어치우고 오로지 시 읊기를 일삼는 것은 아름다운 행실이 아니다.’라고 하나, 내 생각은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또 어숙권(魚叔權, ?~?)의 『패관잡기(稗官雜記)』의 기록은 이례적으로 당시 여성의 재능을 키워주지 않음을 크게 한탄한다.
“우리 동방의 담론은 옛날부터 부녀자의 직책은 음식을 만들고 길쌈을 하는 것뿐이다. 글과 글씨의 재주는 그들에게 마땅한 것이 아니라 하여, 비록 타고난 재주가 남보다 출중한 사람이 있어도 꺼리고 숨겨 힘쓰지 않았으니 한탄할 일이다. 삼국시대에는 알려진 사람이 없고, 고려 5백 년 동안에는 다만 용성(龍城) 기생 우돌(于咄)과 팽원(彭原) 기생 동인홍(動人紅)만이 시 지을 줄을 알았고, 조선에는 정씨(鄭氏)·성씨(成氏)·김씨(金氏)가 있는데, 김씨는 시 편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지금 강릉에 신씨(申氏: 신사임당)가 있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 포도와 산수화는 절묘하여 평가하는 사람들이, ‘안견(安堅: 조선 초기 화가) 다음이다.’라고 하였다. 아! 어찌 부인의 필치라 해서 소홀히 해서야 되겠으며, 또 어찌 부인이 마땅히 할 일이 아니라 하여 책망할 것인가?”
여기 소개한 ‘부녀자의 직책’이란 “암탉이 울어서 재앙을 가져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는 말과 함께 『소학』에 등장한다. 이 기록은 여성의 재능을 계발시키지 못한 풍토를 한탄한 말이다. 그러니까 『소학』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남편의 외도와 아내의 질투

『소학』에 보면 “예법을 갖추어 혼인하면 처(妻)가 되고 예법을 따르지 않고 맞이하거나 시집가면 첩(妾)이 된다.”라고 하였다. 첩을 언제부터 두었는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고대로부터 왕이 여러 부인과 첩을 둔 일부다처에서 유래한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첩을 핑계로 외도하는 남성들이 참 많았다. 기생이나 거느리던 하인을 첩으로 삼는 경우는 다반사요, 가난한 평민의 딸을 첩으로 맞이하기도 했다.
『대동야승』에는 기생과 첩 얘기가 약방의 감초로 등장한다. 이럴 때마다 부인들의 속은 새까맣게 탔을지 아니면 풍속이 그러니까 태연하게 넘어갔을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남성이 그랬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도학자들은 남녀의 구별을 엄격히 지켰고, 드물지만 여성을 혐오하여 멀리한 사람도 있었다. 이 문제는 또 다른 주제여서 다른 곳에서 다루겠다.
그런데 첩과 기생 제도를 두고, 또 집안의 잡다한 일을 여성이 도맡아 하는 근거를 전통 철학에 빗대 말하는 것도 있다. 『패관잡기』의 기록이다.
“동쪽의 수(數)에서 천(天)의 수는 3이고, 지(地)의 수는 8이기 때문에 여자는 많고 남자는 적다. 한 남자가 첩 두서너 명 거느리기까지 하고, 비록 천한 여자라도 과부로 있는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모든 관청이나 사가에서 밥을 짓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자가 모두 여인인 것은 한갓 습속이 그러할 뿐 아니라, 실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이론적 설명은 『한서예문지』에 보이기 시작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박유(朴褕)의 상소에 보이는데, 훗날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에서 군색한 말이라고 비판한다. 이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통의 수리(數理)를 알아야 하는데, 이는 짝수를 양수, 홀수를 음수로 보고 하도(河圖)에서 동쪽의 수가 양수 3과 음수 8이라는 데서 기원하며, 그 동쪽을 우리나라로 보니까 이런 해석이 가능했다. 물론 음과 양은 각각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기도 하여 말도 안 되는 견강부회한 설명이다. 당시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까닭은 전쟁이나 노역, 정치적 역모 사건 등에서 남성이 많이 희생당한 것도 그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전근대 사회는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유럽과 일본도 그랬다.
어쨌든 당시 관습은 남편의 외도와 첩을 들이는 문제에 관대하였지만, 사대부 집안의 처녀는 당연히 첩보다는 처가 되기를 원했다. 이와 관련해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의 『기재잡기(寄齋雜記)』에 첩이 아닌 정식 부인이 두 명인 사람도 있었다. 그 사연은 이렇다.
“세조 때 홍윤성(洪允成)이 고을을 순행하다가 양주(楊州)에 당도했을 때 행차를 구경하는 한 처녀를 마음에 두고, 그날 저녁 그 아비를 불러 첩으로 달라고 협박하였다.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모여 울면서 ‘따르자니 사족으로서 남의 첩이 되어 가문을 보전할 수 없고, 안 따르자니 위력과 권세 아래 생명이 가엾게 될 것이다.’라고 통곡하였다. 그 처녀는 일단 가족을 안심시키고, 홍윤성에게 당당하게 정식 혼례를 치르면 아내가 되겠다고 말하여, 드디어 간단한 예를 갖추어 부인이 되었다. 이때 홍윤성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는데도, 세조가 그녀를 ‘제수’라고 불렀다.”
세조가 그런 것은 그가 홍윤성을 동생처럼 아꼈기 때문이다. 훗날 유산 문제로 두 부인이 송사로 다툴 때, 세조의 이 말이 증거가 되어 둘째 부인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부인들의 질투는 대체로 크게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예외도 있었다. 이륙(李陸, 1438~1498)의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광주목사 최운해(崔雲海)에게 후처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질투심이 강하고 매우 사나워 하인들이 그녀의 눈과 귀가 되어 주인의 동정을 살폈다. 하루는 누런 옷을 입은 아전이 목사의 책상 앞에 엎드리고 있는 모습을 하인이 멀리서 바라보고, 그 아전을 기생으로 잘못 알고 후처한테 달려가 알려 주었다. 후처는 매우 노하여 문틈에 숨어 칼을 쥐고 살피고 있는데, 목사가 어두워질 무렵 문에 들어서자 칼을 빼 목사의 옷자락을 베었다. 목사는 매우 놀라서 객사로 돌아가자 그의 처가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늙은 놈의 머리를 베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고, 마구간에 들어가 남편이 아끼는 큰 말을 베어 죽였다.”
참으로 대단한 질투라 하겠다. 이례적인 일이어서 기록에 남은 것으로 보인다.

지혜로운 어머니의 가르침

앞서 소개한 삼종지도는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버지가 일찍 죽으면 어머니가 교육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 잘 알다시피 퇴계 이황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 어머니가 아들들이 과부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엄격하게 교육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소학』의 “과부의 자식 가운데 재능이 뛰어나지 않으면 친구로 사귀지 않는다.”라는 말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과부의 자식에게 걸핏하면 배운 게 없다고 빈정대기 때문이리라.
또 어머니가 다 자란 아들을 훈계하거나 지혜로운 가르침을 펼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해동잡록』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김일손(金馹孫)의 형이 함양 군수로 나갔을 때 어머니의 병을 간호한 일이 있었다. 관청의 약재로 약을 지어 보냈더니 이씨 부인이 불쾌히 여기면서, ‘어찌 관청 물건을 사가에 두겠느냐?’라고 꾸짖기에, 꾸려서 도로 보냈다고 한다.”
공사를 분명히 가려서 처신하라는 가르침이다. 또 같은 책에 정여창(鄭汝昌)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어머니는 의(義)가 아닌 걸로 정여창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어머니는 잘못하는 법이 없었다. 아들도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사람들이 이를 일러 온 집안이 의를 행한다고 하였다.”
아들이 반듯한 뒤에는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어머니로부터 받은 교육의 사례는 앞의 『견한잡록』에도 보인다.
“나는 13살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알려지자, 어머니를 잘 모시고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어머니는 평생 교훈이 엄격하였다. 내가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어서,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않게 해서이다.”
자신에 대한 기록이니 비록 과장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 말은 진실인듯하다. 저자 심수경(沈守慶)은 중종 때 기묘사화를 일으킨 사람 가운데 하나인 심정(沈貞, 1471~1531)의 손자이다. 당시 이런 심수경을 두고 “손자의 덕행으로 할아버지의 허물을 가리고 말았다.”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였다. 굳이 이런 사례만이 아니더라도 훌륭한 자식 뒤에는 반드시 이름 없는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내 삶을 찾아서

옛날 여인들은 누구의 아내와 누구의 어머니 역할만 해 왔고, 공식적 이름은 성(姓)밖에 없어 자신의 삶을 갖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기야 최근까지도 여성들은 집안일을 돌보며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를 해 왔다. 직장이 있어도 그랬으니, 남편의 성공 뒤에는 항상 아내의 내조가 있었다. 반면 여성이 성공하려면 가정을 포기하거나 남편의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가능했다.
이제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이전과 달라져서, 남편이든 아내든 각자의 삶을 주체적이고 성공적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서로의 협조가 필요하다. 성공이라는 게 꼭 외형적인 그것만이 아닐지라도 그렇다. 그게 힘들고 거추장스럽다면 혼인하지 않는 게 낫다. 하지만 인생은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고 때로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데서 더 큰 보람과 가치가 있고, 배움도 더 많은 법이다. 각자가 선택할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