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들의 전성시대

소인들의 전성시대

사화와 권간

우리 역사에서 선비들이 집단으로 화를 당한 일을 사화(士禍)라 부른다. 이는 무고한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의미의 도덕적 규정으로 선조 때부터 나온 용어이다. 중등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 흔히 4대 사화로 불리는 것에는 연산군 때의 무오(1495)·갑자사화(1504)와 중종 때의 기묘사화(1519) 그리고 명종 때의 을사사화(1545)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대표적인 몇 가지만 언급하면 사실을 제대로 못 볼 위험성이 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사화가 무수하게 있어서 많은 선비가 희생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사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설명하기 좀 복잡하다. 시기에 따라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조선 전기에는 주로 성리학의 이념과 『소학』적 실천 방식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사림(士林)과 보수적 기득권을 지닌 훈구파와 외척들의 정치·경제적 갈등, 때로는 왕권 강화와 권력을 지닌 간신들의 전횡과 관련이 있다. 교과서에서 그것을 싸잡아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라 설명하고 있다.
4대 사화에 한정해 본다면 이를 주도하는 인물이 있다. 연산군 때의 유자광(柳子光, ?~1512)과 임사홍(任士洪, ?~1506), 중종 때의 남곤(南袞, 1471~1527)과 심정(沈貞, 1471~1531), 그리고 명종 때의 윤원형(尹元衡, ?~1565)과 이기(李芑, 1476~1552) 등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이들을 권력을 지닌 간신이라는 의미로 권간(權奸) 또는 소인(小人)이라 불렀다. 소인이라는 말은 군자(君子)와 더불어 예부터 고전에 등장하고, 특히 『논어』에서 이 둘을 비교하여 다양한 정의를 내리지만, 그 가운데 핵심적 표현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는 말이 있다.
『대동야승』의 여러 기록에는 사화를 주도한 사람들을 소인이나 권간 또는 간신 등으로 표현하여 자주 등장한다. 이른바 ‘간신전(奸臣傳)’이라는 별도의 책을 엮어도 될 정도로 그 사례가 풍부하다. 이 글은 지면 관계상 간단히 다루고자 하며, 이들이 왜 그런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으며, 그것을 일으킨 동기의 단면을 고찰하고, 어떤 이념이나 관념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실천 또는 저항 당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유자광과 임사홍

연산군 조정에서 간신으로 불리는 두 사람을 고르라면 단연코 유자광과 임상홍을 의심할 사람은 별로 없겠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문헌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자광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보이지만, 『해동잡록』·『동각잡기』·『해동야언』에 자세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일단 그는 서자였다. 그것은 그가 신분상 차별을 받았으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때로는 출세를 위해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그의 행적을 종합하면 그런 부분이 분명히 감지된다. 『해동야언』에는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같이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고, 어려서부터 무뢰배가 되어서 도박을 하여 재물을 다투고, 새벽이나 밤에도 노상에 다니며 놀다가 여자를 만나면 붙들어서 강간하곤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처음에 군졸(軍卒)로 출발하였는데,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벌을 상소하여 발탁되었다. 그 후 난이 끝나자 출세 가도에 오른다. 그리고 예종 때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이 역모를 일으킨다고 고변하여 그 공으로 무녕군(武寧君)에 책봉되었다.
성종 때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함양 군수로 있을 때 건물의 현판에 쓴 유자광의 시를 유치하게 여겨 떼어낸 적이 있는데, 유자광은 이른 매우 분하여 여겼으나 당시는 김종직의 영향이 컸으므로 도리어 아부하여 사귀었다고 전한다.
그 후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사초로 촉발된 그 사건에서 유자광은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의 숨은 뜻을 해석해 사화가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초가 문제 된 까닭은 사관인 김일손이 당상관이었던 이극돈의 행위를 비난하는 글이 거기에 들어 있었고, 그것을 본 이극돈이 김일손의 흠을 찾은 빌미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다.
그러니까 사화가 촉발된 동기는 사초의 문제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신구(新舊) 신하들의 정치적 알력, 개인적 보복심리와 출세욕 등이 어우러진 일이라 하겠다. 곧 유자광이 민감한 정치적 국면을 주도한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서자라는 신분의 낙인을 극복하고 출세하려는 욕망, 그리고 김종직을 비롯한 그 제자들에 대한 묵은 원한이다.
한편 임사홍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일을 거론하여 갑자사화를 주도한 장본인이다. 그는 효령대군의 손녀와 혼인하였고, 두 아들 또한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당시 그의 권력이 너무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대간(臺諫)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그가 왕실과 지나친 혼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이런 대간의 비판으로 유자광과 함께 크게 활약하지 못했고, 둘 다 귀양을 갔다 온 경험이 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그가 총애한 성종의 사위였던 아들 임숭재(任崇載, ?~1505)와 며느리 휘숙옹주의 연줄로 막강한 권력자가 되었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이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겨눴던 일이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로 일으킨 갑자사화였다. 바로 그 동기는 자신의 권력욕을 좌절시키고 유배까지 가게 한 선비들에 대한 보복이었다.

남곤과 심정

남곤과 심정은 기묘사화를 주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남곤은 「유자광전(柳子光傳)」을 쓸 정도로 나름의 간신에 대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화를 일으킨 장본인이 되었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해동야언』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자광전」은 남곤이 자광의 죄악을 기록하는 데 정성을 다하더니, 기묘년에 이르러서는 자광이 한 일을 모방하여 밤에 북문을 열게 하여, 당시 깨끗한 선비들을 한 그물로 다 없앴으니, 그가 한 짓을 찾아보면 무오년 일(무오사화)보다 심하다. 이것은 남곤이 이 전(傳)을 지으면서 스스로 자기의 죄악을 적은 것이다.”
남곤이 유자광과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다. 남곤은 원래 김종직의 문인이었고, 개혁적인 성향으로 대신들을 탄핵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는 훗날 예조 판서가 되었고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대립하였다. 예조 판서는 주로 문장에 능한 사람이 맡는데, 문장은 의리와 수신(修身)을 중시하는 도학자들이 의리와 거리가 먼 사장(詞章)의 학문이라 여겨 배척하였다. 이런 학문 경향으로 자연히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내부는 개혁적 젊은 관원과 보수적 대신들 간의 갈등이었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기묘사화였다.
이이의 『석담일기』에는 남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였다.
“죽은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남곤은 젊을 때 문명(文名)이 세상에 울렸으나, 출세에 급급하여 박경(朴耕)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그를 죽게 했다. 이로 인해서 깨끗한 언론에 용납되지 않았으며, 마침내 심정과 함께 조광조를 모함하여 바른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었다.”
반면 이런 평가도 있다. 『월정만필』에 기록된 김안국의 말이다.
“남곤이 기묘년 선비들을 죄에 빠뜨릴 때 그의 본의는 그 기세를 죽이기 위해 파직시켜 내쫓으려 했을 뿐, 애당초 살해할 의사는 없었다. 그러나 혹시 왕께서 말을 들어 주지 않을지 염려하여, 일부러 장황하게 죄를 만들어 임금의 귀가 솔깃해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중종이 그 말을 지나치게 믿고 극히 무겁게 처분하였으므로 조광조 등이 마침내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였다. 남곤이 비록 이것을 후회는 하면서도 자기가 설치한 함정을 자기가 도로 구해낼 수 없었으므로, 그들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한평생 한스럽게 여겼다.”
이 글의 마지막 내용은 남곤이 죽기 전에 자기가 쓴 글을 모두 불태우면서 “누가 이 글을 읽을 것인가?”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자신이 한 일을 후회했다는 뜻에서 그랬다는 해석이다.
한편 심정도 남곤과 함께 안로(安璐: ?~?)가 편찬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전(傳)으로 기록될 만큼 기묘사화의 주도적 인물이다. 그 기록에 따르면,
“말과 용모가 교활하고 아첨이 넘쳤다. 자칭 꾀를 잘 내고 임기응변에 능하다 하니, 사람들이 지혜 주머니라 하였다.”
라고 하니 술수에 능한 인물로 보인다. 그는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신이 되었고, 자연히 개혁파의 개혁 대상이기도 하였다. 곧 조광조 등이 공신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요구하여, 반정공신들로부터 심한 반발을 받았다. 이에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통하여 ‘조씨가 나라를 마음대로 한다.’라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고, 남곤·홍경주(洪景舟) 등과 모의하여 왕을 움직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일망타진하였다.
하지만 훗날 경빈 박씨의 동궁 저주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관련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강서(江西)로 귀양 갔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기묘록보유」의 ‘심정전(沈貞傳)’에서는 그가 경빈박씨와 정을 통했다고 전하며, 경빈박씨는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의 수양딸이다.

윤원형과 이기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 쓴 『죽창한화(竹窓閑話)』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백 년 이전의 일은 비록 감히 알 수가 없지만, 중고(中古) 이래 권간이 권력을 휘둘러 선비들을 죽인 것이 적지 않다. 그런데도 그 세력이 꺾이거나 그들이 죽은 지 오래되어야 비로소 그 일을 의논한다. 기묘년의 남곤·심정과 을사년의 이기·윤원형의 일이 바로 그렇다.”
기묘·을사사화의 원흉을 가리키는 지적이다. 율곡 이이는 을사사화가 일어난 한 세대 아래 살았기에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한다. 『석담일기』 속의 기록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원형은 문정왕후의 동생이며 사람됨이 음흉·독살스럽고 재물을 탐했다. 인종이 돌아가자 명종이 즉위하였다. 윤원형 등이 그 기회에 이기·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 등과 음모하고 말을 만들어 퍼뜨려 큰 옥사를 일으키니, 당시 선비들 가운데 그 화를 면한 사람이 드물었다. 윤원형은 서울에 큰 집 10여 채가 있었고, 그 안에는 재물이 넘쳐날 지경이었으며, 분수 넘치게 의복과 수레를 마치 대궐 안의 그것처럼 하였다. 또 본처를 내쫓고 첩 난정(蘭貞)을 매우 사랑하여 아내로 삼아, 그녀의 말이면 다 들어주었다. 뇌물을 받아들이고 수탈하는 것도 그녀의 충동질 때문이다. 그가 권력을 잡은 지 20년 동안 사림은 분함을 품고서도 감히 처단하지 못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첩 난정과 함께 귀양 가서 죽었다. 여기에서는 말하는 ‘큰 옥사’란 이른바 소윤인 윤원형이 대윤인 윤임(尹任, 1477~1545) 등을 몰아낸 정권투쟁에서 선비들이 화를 입은 을사사화를 말한다. 그것이 끝난 뒤에도 여파는 계속되었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많은 선비가 희생되고, 수년간 윤원형 일파의 음모로 화를 입은 반대파 선비들은 100여 명에 달한다. 겉으로는 왕실 외척 간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이전처럼 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이자 일종의 복수극이었다.
한편 이기는 장인인 군수 김진(金震)이 부정한 관리여서 그 영향으로 젊을 때 좋은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고 외직으로만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그동안의 고생한 공으로 병조 판서에 임명하려고 하자 반대가 있었으나 승승장구하여 우의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윤 일파가 득세하자 윤임 등이 부적합하다고 탄핵하여 병조 판서로 강등되었다. 이에 원한을 품고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명종 4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를 반대한 사림은 거의 모두 숙청되었다. 그가 받은 훈록(勳祿)은 선조 초년에 모두 삭탈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후손 가운데 바른길로 간 이들이 있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任熙載, 1472~1504)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연산군을 풍자하다가 죽임을 당했는데, 임사홍도 그의 죽음에 동조했다고 한다.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은 심정의 손자로 훗날 명성이 자자해 할아버지의 허물이 그로 인해 덮어졌다고 전한다. 또 당시 이기 등을 비판하고 이황(李滉)·정황(丁煌) 등의 많은 선비를 구하여 준 이원록(李元祿, 1514~1574)은 권신 이기의 조카였다.

군자와 소인

간신이 처음부터 간신은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이들도 시대의 희생물이다. 서얼 출신으로 인한 따돌림과 차별에 대한 빗나간 출세욕이 그렇게 만들고, 이념에 따른 현실 인식에서 젊은 선비들의 이들에 대한 비난과 냉대가 분노를 키웠다고 보겠다. 신진 선비들은 관념이나 이념에 철저하였지만, 현실의 벽은 그만큼 더 두꺼워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경험이다.
하지만 간신으로 지목당한 사람들은 거의 말로가 좋지 않다. 비록 약아빠진 처세로 천수를 누렸다 해도, 훗날 뜻있는 선비들과 희생당한 후손들이 억울하게 죽은 일을 밝히고 바로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만든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온갖 권모술수와 줄타기와 요령으로 살아도 후세 역사가의 날카로운 필봉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걸 알고 매사를 엄중하게 처신하는 자가 군자이고, 눈앞의 부귀영화에 눈멀어 무리수를 두는 자가 소인이리라.
소인이 득세한 데에 대한 반성도 없지 않다. 『해동야언』에 보인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시행할 때는 항상 지나치게 너그러운 데서 일이 잘못되고, 소인의 보복하는 데는 반드시 상대를 전멸시키고 나서야 그만둔다.”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문제이다. 국민 화합이니 뭐니 하면서 역사 청산을 철저하게 하지 않은 데서 생기는 현상이다. 상대가 진정성 있게 뉘우치고 반성해야 사면과 복권을 시킬 수 있는데, 항상 섣부른 결정에서 폐단이 생긴다.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