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로맨스

선비와 로맨스

인간의 욕망과 ‘내로남불’

오늘날 정치 현장에서 여야 정당이 서로 비판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내로남불’이라는 것이 있다. 곧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라는 말을 가리킨다. 로맨스는 대체로 청춘 남녀가 꿈꾸는 일이지만, 때로는 기혼자들 사이에서도 벌어진다. 해서 오래전부터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의 소재였다. 그것은 인간 삶의 동력이자 에너지로서 욕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에 딱 맞는 적당한 일화가 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어떤 기생이 어버이를 여의고 절에서 여러 기생과 함께 재(齋)를 올렸다. 한 젊은 스님이 채소를 썰다가 문득 벽에 기대어 섰기에, 주지 스님이 그 까닭을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아름답게 단장한 기생들을 보니 마음이 산란하고, 정이 발동하여 참을 수 없어 그럽니다.’라고 하자, 주지 스님이 말하기를, ‘쓸데없는 소리 마라. 오늘 기생의 재에 누군들 정이 움직이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욕망이 일어남은 당연한 일이다. 『필원잡기』에 정몽주도 일찍이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수양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라.’라고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남녀의 연애 사건으로서 로맨스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 또한 사회 질서를 위한 적절한 규범이 있으니 함부로 할 수 없는 문제였다. 더구나 성리학에 종사하는 선비로서는 하나의 경계의 대상으로서 금기였을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도덕적 관념과 본능 사이에서 다양한 변주가 생길 수밖에 없다. 조선 선비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표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가장 손쉬운 로맨스 대상

조선의 사대부라면 집안에 노비라고 부르는 하인 또는 종이 적게는 한두 명 많게는 수십 명씩 거느리고 산다. 노비도 재산처럼 물려받고 물려주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예쁘고 젊은 여자 하인은 간혹 주인의 첩이 되기도 했다.
아무리 거느리던 여자 종을 사랑한다고 해서 첩으로 삼는 문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부인이 묵인하거나 허락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마저도 적당한 명분, 가령 본부인에게 아들이 없다거나 병이 있거나 늙어 부부생활이 곤란할 때 가능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첩을 들였다간 갈등을 피할 수 없고, 그 피해는 젊은 첩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젊은 하인을 첩으로 맞이하기 위해 모종의 꼼수를 부리기도 하였다. 권별의 『해동잡록』에 보이는 권람(權擥, 1416~1465)의 일화가 그것이다.
“권람에게 젊은 여자 하인이 있었는데, 태도와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워 그는 늘 마음속에 그녀를 품고 있었으나, 부인이 무서워 감히 어찌하지 못하였다. 한명회에게 그 일을 상의하니, 그가 말하기를, ‘상사병을 앓는 것처럼 하자.’라고 하였다. 권람이 그의 말처럼 하고 있는데, 한명회는 밤중에 몰래 와서 회화나무꽃 삶은 물을 전해주며, 온몸에 이것을 발라 황달 증상같이 만들게 하였다. 며칠 후에 또 한명회가 와서 울며 말하기를, ‘내 친구가 죽겠구나. 맥박은 느리고 기운이 이렇게 약해서야 금방 곧 쓰러지겠구나. 부인은 어찌 한 젊은 여종을 아껴 주인의 목숨을 살리지 않는고?’라고 하였다. 부인이 곧 알아차리고 드디어 날을 택하여 여자 하인을 첩으로 삼았다. 다음날 한명회가 다시 가니, 권람이 말하기를, ‘대사는 이미 이루어졌다.’라고 하고, 둘이 서로 낄낄대고 웃었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을 모의하여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책략가이다. 친구가 사랑하는 젊은 여종을 첩으로 만든 술책이었다. 아마도 부인이 모르는 척 속아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귀여운 일이고, 무리하게 젊은 여종을 첩으로 만든 경우는 허다하다. 가장 손쉬운 로맨스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쉬운 대상은 기생이었다. 남녀유별 사회에서 기생만은 드러내 놓고 남성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기생이라고 해서 모두가 아무 남성과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황진이였고, 그녀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로맨스를 이루려는 기생도 있었다. 그 사례가 『용재총화』에 보인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짓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고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다른가?’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이 기생은 춘향처럼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할 수 없다는 의지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모든 기생이 이렇지는 않았다. 대다수는 권력과 재력이 있는 사대부의 첩이 되어 안정적 삶을 누리는 것이 꿈이었다.
한편 기생을 첩으로 맞아들일 형편이 안 되었던 선비들 가운데는 그 헤어짐을 못내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하기도 하였다. 『해동잡록』의 사례이다.
“박신(朴信)이 일찍이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가 되어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했었는데, 강릉 부윤 조운흘(趙云仡)이 거짓으로 홍장이 벌써 죽었다고 전하니, 박신은 슬픈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였다. 조운흘이 박신을 초청하여 경포대에 나가 놀았는데, 몰래 홍장을 단장시키고 그림을 그린 배를 준비시켰다. 그리고는 처용(處容)을 닮은 아전과 홍장이 거기에 탔다. 그 배가 천천히 포구로 들어와 물가에 돌아다니니, 조운흘이 박신에게 말하기를, ‘이 땅은 옛날 신선의 유적이 있어, 지금도 신선이 오가는 일이 있습니다. 혹 꽃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사람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하지는 못합니다.’라고 하니, 박신이 말하기를, ‘산천은 이와 같고 풍경이 특이하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세히 배 안을 보니 곧 홍장이었다. 온 좌석이 크게 웃으며 즐겁게 놀다가 파했다.”
상대를 그리워하는 남성을 놀려주기 위한 계책이었다. 관리로서 외지에 나가 기생과 사귀는 일이 흔했다. 능력이 있으면 첩으로 데리고 왔었지만, 대부분 아쉬움만 남기고 헤어졌다.

순간의 로맨스 그리고 약속과 배신

한순간 욕정에 못 이겨 상대 여성을 범하고 팽개치는 일은 진정한 로맨스가 아니다. 사실 ‘춘향전’도 그것을 경계한다. 또는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사례도 있다. 『용채총화』의 일화이다.
“홍재상(洪宰相)이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못한 때였다. 길을 가다 비를 만나 조그만 굴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그 안에 집이 있고 17~18세 정도의 어여쁜 여승이 홀로 앉아 있었다. 공이 ‘어째서 홀로 앉아 있느냐?’라고 물으니, 여승은 ‘세 여승과 같이 있사온데 두 여승은 양식을 탁발하러 마을로 내려갔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그 여승과 정을 통하고 약속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그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리라.’라고 하였다. 여승은 이 말만 믿고 매양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그날이 지나가도 나타나지 않자 마음에 병이 들어 죽었다. 공이 나중에 남쪽 지방의 절도사가 되어 진영(鎭營)에 있을 때, 하루는 도마뱀 같은 조그만 동물이 공의 이불을 지나가니, 곁에서 모시던 아전이 그것을 죽여버렸다. 다음날에도 조그만 뱀이 들어오므로 아전은 또 죽여버렸다. 또 다음날에도 뱀이 방에 들어오니 공은 비로소 전에 약속했던 여승의 화신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위세를 믿고 아예 없애버리려고 명하여 죽여버렸더니, 이 뒤로는 매일 올 뿐만 아니라, 나올 때마다 몸뚱이가 점점 커져서 마침내 큰 구렁이가 되었다. 공은 군영에 있는 모든 군졸을 모아 칼을 들고 사방을 둘러싸게 하였으나 구렁이는 여전히 포위를 뚫고 들어왔다. 군졸도 들어오는 대로 다투어 찍어버리거나 장작불 가운데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래도 없어지지 않았다. 이에 공은 구렁이를 함 속에 넣어 방 안에 두고, 낮에 변방을 순행할 때도 함을 짊어지고 앞서가게 하였다. 그러다가 공의 정신이 점점 쇠약해지고 얼굴빛도 파리해지더니 마침내 병들어 죽었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어떤 사실과 경계하는 일이 잘 배합된 이야기로 보인다. 조선 시대 여승은 억불정책의 여파로 하찮은 존재였다.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도 로맨스는 신중해야 하고, 한번 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교훈이 들어 있다. 사대부들의 비뚤어진 하룻밤 풋사랑을 경계하였다.

삼각관계

흔히 로맨스를 거론할 때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한 사람을 두고 두 사람이 경쟁할 때 벌어지는 일이다. 조선 시대에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고 심지어 송사까지 이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인간사가 어딘들 없겠는가? 먼저 『해동잡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옛날에 한 중신(重臣)이 변방에 장군으로 나가서 무뢰배 한 사람을 데려다가 막하(幕下: 주장이 거느리는 사람)로 삼자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히 여겼다. 얼마 안 되어서 무뢰배가 가벼운 군율을 범하니 담당 장수가 심문하고 장군에게 품의(稟議)하였더니, 장군이 판결하기를 ‘극형에 처하라.’라고 하였다. 그가 물러나 방문 밖에 서서 혹시 다른 분부라도 있을까 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장군이 장막 안에서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하는 말이, ‘에이! 고약한 놈이로고. 저 젊은 놈이 나의 사랑하는 여자를 훔쳤지.’라고 하였다.”
사실 그 무뢰배는 장군의 연적이었다. 아마도 곁에 두고 감시할 의도로 그 무뢰배를 막하에 두었던 모양이다. 가벼운 군율로 극형에 처하는 것도 연적임을 반증한다.
한편 삼각관계의 압권은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싸움이 한창일 때 윤원형의 당이었던 임백령(林百齡)과 윤임 사이의 일이다. 저자 미상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의 사례이다.
“임백령이 윤임과 한마을에 있으면서 일찍이 기생 옥매향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임백령이 질투하고 미워하여 윤임을 역모로 몰았으니, 을사년의 화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또 윤임을 죽인 뒤에 그의 처첩을 종으로 만들어 공신들에게 나누어 줄 적에, 임백령이 옥매향을 자기의 종으로 삼기를 원했으니, 마침내 그의 계책을 이룬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 일로 더욱 그의 간사하고 악독함을 분하게 여겼다.”
삼각관계의 연적이 정치적 투쟁과 복수의 동기 가운데 하나로 이어진 사건이다.

여색을 멀리하는 사람

그런데 로맨스고 뭐고 아예 병적으로 여성을 멀리한 사람도 있었다. 무슨 곡절이나 사연이 있을 것이지만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엄숙한 도덕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하는 사람의 성격 또는 취향이다. 이는 여러 선비의 말에 보이는데,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남녀의 정욕은 타오르기 쉽고 막기 어려운 것이니, 마땅히 근신해야 할 일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고,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남녀가 한 방에 자주 있으려고 하면 음란의 해가 심하다.”라고 하였다.
또 『용재총화』에도 여러 사례를 섞어 소개한다.
“음식과 남녀는 사람들의 큰 욕망인데도 지금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셋 있다. 제안(齊安)대군은 참으로 아름다운 아내를 두었으나 항상 말하기를, ‘부녀자는 더러워서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부인과 마주 앉지 않았다. 생원 한경기(韓景琦)는 한명회의 손자인데, 마음을 닦고 성품을 다스린다는 구실로, 문을 닫고 홀로 앉아 그 아내와 서로 말한 일이 없었다. 간혹 여자 하인의 소리라도 들리면 막대기를 들고 내쫓았다. 김자고(金子固)에게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어리석어서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고, 남녀의 일도 알지 못하므로 자고는 그 후손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였다. 그 일을 아는 여자를 단장시켜 함께 자게 하고 남녀의 정을 가르치려 하니, 그 아들은 놀라 상 밑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뒤에는 족두리 쓴 여자만 보면 울면서 달아났다.”

삶의 에너지로서 욕망의 분출과 그 처리

조선 선비들의 로맨스의 특징은 혼인 전의 젊은 청춘의 그것이 아니라 대체로 기혼자 남성 중심으로 벌어진 일이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개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혼인해야 했으니 각자의 취향과 무관한 일이어서, 부부생활에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어서이다. 그래서 그 대상이 주로 기생이었고, 다음으로 거느리던 여자 하인이다. 기생은 오늘날 연예인과 매춘부를 포함한 그 범위가 넓었는데, 분 바르고 눈썹 짙게 그리며 시와 음악과 춤에 능했으니, 적어도 재주와 외모상 자기 부인과 비교가 안 되었을 것이다. 젊은 여자 하인은 나이 든 부인보다 젊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로맨스로 곤경에 천한 일도 잦아 파란만장한 인생의 무늬를 더했다.
아무튼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남성 중심의 일방적 로맨스이다. 외견상 부창부수(夫唱婦隨)라는 도리 또는 ‘음을 누르고 양을 돕는’ 억음부양(抑陰扶陽)의 문화 속에서 여성이 적극적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대상인 여성이 지체 높은 양반의 첩이라도 되면, 약간의 신분 상승과 아울러 안정적 삶을 누릴 수 있어서, 완전히 일방적인 강요만이라고 할 수 없다. 선비들의 로맨스는 남성의 적극적 ‘대시’와 여성의 수동적 ‘기대’ 속에 양자의 욕망이 적절히 섞이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물론 음란과 색욕을 경계한 선비들도 있어서, 수양하여 불미스러운 일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였다. 욕망을 억제하든 거기에 빠지든 결국 인간의 본능을 어떤 방식으로 처리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은 해당 제도와 문화가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또는 무엇을 귀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남녀의 문제는 강력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한다. 어떤 이념이나 제도로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어서, 욕망의 적절한 배출구가 필요하다. 과거의 풍습을 전근대적 악습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왜 그것을 묵인했는지 통찰이 필요하다. 현대의 우리는 또 다른 이념에 사로잡혀 그걸 억압하고 있지 않은지, 아니면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그때보다 더 문란하지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