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와 남녀의 도리

 

부부와 남녀의 도리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

앞의 글에서 충절을 소개할 때 주로 남성의 그것에 대해 말하였다. 전통사회에서는 남자들이 사회활동을 담당하였으므로 국가나 주군에 대한 충성이 요구되었고, 그것이 여성에게는 자연히 남편에 대해 지조 또는 정절(貞節)을 지켜야 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소학』에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말이 “열녀는 두 지아비를 고쳐 맞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그 사례와 함께 실려 있다.
해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윤리에는 오륜 가운데 부부유별(夫婦有別)이 있고, 삼강(三剛) 가운데 부위부강(夫爲婦綱)이 있다. 전자는 남녀의 분별을 강조한 윤리이고, 후자는 일에 있어서 남편이 아내의 기준이 된다는 말이다. 후자와 유사한 말에는 부창부수(夫唱婦隨)가 있는데, 남편의 주장에 아내가 따르는 것이 부부의 화합을 위해 좋다는 말이다. 후자는 남편이 몸을 닦아 항상 올바르게 처신해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조선 전기의 학자 어숙권(魚叔權, ?~?)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보면, 정문(旌門)을 세워 효자와 열녀를 표창하여 권장하는 일은 옛날부터 있어 온 제도라 소개하고, 정절이라는 것은 남편이 죽은 뒤에 죽을 때까지 절개를 지킨 여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당시 조선의 부인들은 “모두 수절을 했으므로, 반드시 특이한 행실이 있고 난 뒤에야 정문을 세웠으니, 절부(節婦)·열부(烈婦)·정절(貞節)·정렬(貞烈)의 구분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해 『대동야승』에 소개되는 사례는 대개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사대부 여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정절을 지켰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근대화 이후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장유유서와 함께 이 부부유별과 부위부강을 아주 고약한 윤리로 여겨 유교의 악습으로 평가한다.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그렇게 평가하는 일은 무리가 아니나, 과거의 어떤 문화도 현대의 잣대로 보면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한때 우리가 선진국으로 부러워했던 서양문명도, 아니 현대의 우리도 부정적 모습이 분명히 있다. 여기서 정절과 남녀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고자 하는 의도는 어떤 관념 또는 사상이 삶을 지배하는 현장에서 그것이 어떻게 변주되고 있는지 살핌으로써, 조상들의 삶을 읽어 보자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거기서 표출되는 에너지와 역동성이 현대의 우리에게 무얼 던져주는지 찾는다면 큰 행운일 것이다.

신의로서 지킨 절개와 첩의 절개

죽은 남편에 대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어 끝내 절개를 지킨 사례 가운데 하나가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등장한다.
“조지서(趙之瑞)는 연산군이 일으킨 사화 때 그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아내 정씨(鄭氏)와 술을 마시고 결별하면서, ‘내가 지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으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주(神主)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니, 정씨는 울면서 말하기를, ‘죽더라도 보존하겠소.’라고 하였다. 드디어 조지서는 죽임을 당했고 그 집은 몰수되었다. 정씨는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그 아버지가 말하기를, ‘시댁이 이미 망했으니 우리 집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치지 않겠느냐?’라고 하니, 정씨는 이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죽은 남편이 저에게 조상의 신주를 부탁하기에 저는 그것을 승낙하였으니, 어찌 도중에 그것을 저버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중종반정 후에 드디어 옛집을 회복하고 떳떳이 제사를 받드니, 온 고을 사람들이 칭송했다. 당시 진주목사 이우(李堣)가 그 내막을 잘 알았으므로 임금에게 아뢰어 그 집에 정문을 세웠다.”
후세 사람들은 정몽주의 증손으로서 피는 못 속인다고 칭찬하였는데, 정씨 부인의 정절은 남편과의 약속을 굳게 지킨 일과 관련된다. 공교롭게도 이 사례는 『소학』의 한나라 진(陳) 땅의 효부(孝婦) 이야기와 거의 같다. 또 같은 책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안규(安圭)는 황해도 연백 사람인데, 집에 불이 났을 때 그의 어머니 원씨는 남편의 신주를 안고 엎드렸다. 그때 안규도 타오르는 불 속에 뛰어들어 어머니를 업고 신주를 안고 나올 때 머리카락이 모두 타버렸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열녀의 정문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이런 열녀 이야기는 정식 부인이나 조선 여인만의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고려 말의 이야기이다.
“조반(趙胖)은 누이동생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살았다. 그런데 그 집 여종이 예쁘고 글도 알아서 첩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명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원나라 황제가 북쪽으로 피난 가니, 조반은 누이를 따라갈 수 없어 고려로 오고자 하였다. 그는 주위의 말을 듣고 피난이 힘들까 봐 그 여자를 버렸다. 여자가 울면서 3일 밤낮으로 뒤따라오니 발이 부르터졌다. 그때 강 위에 높은 누각이 있었는데, 여자가 갑자기 거기에 올라가 물속으로 투신하여 죽었다. 조반이 그 절개에 탄복하여 언제나 비통하게 여겼다.”
아무리 첩이지만 한때 사랑했던 여인을 버린 것도 그렇고, 그 여인이 강물에 투신한 까닭이 적에게 욕을 당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억울해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해석이 절개라고 여겨 애통하게 지낸 일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 일을 기록한 사람도 절개라고 믿고 있는 점은 그런 문화 속에 살고 있으니,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처럼 목숨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가장 많은 경우가 전란 때 적으로부터 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열녀가 등장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과부의 수절

남편에 대한 절개의 윤리는 자연히 과부가 수절해야 한다는 풍습으로 이어진다. 앞의 『패관잡기』에서 당시 “조선의 부인들은 모두 수절했다.”라는 말의 행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점은 과부의 재가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 책에 나오는 주장이다.
“죄를 짓고 온 가족을 이끌고 변방으로 이주한 자가 죽으면 장사를 치르자마자, 아내 없는 백정이나 관노가 관청에 고하여, 그 죽은 자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면 수령이 위협하여 그들에게 시집가게 한다. 과부더러 절개를 지키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그 뜻을 빼앗고 시집을 가게 한단 말인가? 퇴폐한 풍속이 이보다 큼이 없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과부의 수절을 당연시한 주장이다. 또 같은 책에 이런 이야기도 보인다.
“하정(河挺)의 첩 강씨(姜氏)는 수절하여 개가하지 않기로 손가락을 잘라 스스로 맹세하였다. 뒤에 그 어머니가 몰래 사람을 시켜 강제로 데려가더니, 신혼의 사랑이 이전보다도 더 깊었다. 늘 규방 안에 함께 거처하면서, 마치 목을 서로 기대고 있는 원앙새보다도 더 사이가 좋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사람들이 비웃은 까닭은 재가한 것도 좋은 일이 아닌데, 그녀가 스스로 맹세한 약속을 깨트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로 보면 과부의 재가를 원칙적으로 금했으나 엄격하게 적용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재가한 과부의 자식은 벼슬길에 나올 수 없다고 법으로 정했다.
그렇다고 모두 과부의 수절을 찬성하지는 않았다. 이기(李墍, 1522~1600)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 나오는 비판이다.
“제왕의 법이란 모두 인정에 근본을 둔다. 우리나라의 법에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여자의 정절은 극히 권장할 만한 것이나, 나이 젊은 과부는 모두 재가하지 못하고, 재가하여 낳은 자식은 벼슬길도 막고 간음하여 낳은 것으로 단정해 버리니, 이것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일까? 인정에 어긋나고 천리(天理)를 어긴 일이 이보다 큰 것이 없으니, 성인의 법이 아닌 듯하다.”
말인즉 인정상 젊은 과부의 재가를 금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실학자를 중심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고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남편의 절개?

한편 과부만 수절한 것은 아니다. 매우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선비들 가운데도 그런 분이 있었다. 앞의 『송와잡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은 학문이 깊고 몸가짐이 곧았다. 37살의 젊은 나이에 아내를 잃었다. 아이들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까 봐 재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첩도 두지 않고, 21년을 쓸쓸히 홀로 살면서 아이들이 장성하여 혼인할 때까지 기다렸다. 공은

어미 잃은 아이들이 눈앞에 밟혀(失母兒童在眼前)
곤궁하게 20여 년 분수를 지켰네(困窮知分卄餘年).
시렁 위에 쌓아 둔 천 권 책을 의지했고(但憑架上堆千卷)
주머니가 한 푼도 모자란 채로(也任囊中欠一錢).
늙기까지 새살림 장만하지 못했는데(到老不成新活計)
죽게 되어 옛 인연 공연히 생각하네(殘生空憶舊寅緣).
혼인을 다 시키니 남은 한은 없어라(已終婚嫁無遺恨).
이제야 편안하게 구천을 향할 수 있으리(方得安然向九泉)!

라는 시를 지었다.”
내용을 보면 열녀 못지않다. 원천석을 자식을 위해 수절을 했다고 보는데, 현대에도 이런 남성들이 주변에 더러 있다. 또 아내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여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구(鄭矩)와 정부(鄭符)는 모두 정양생(鄭良生)의 아들이다. 모두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 부인이 혹 시골에 내려가면 정부는 홀로 집에서 구름과 먼 산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부르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았을 뿐, 분 바르고 눈썹 그린 기생들 사이에서 술 취한 일이 없었다.”
이런 일도 일종의 남편의 아내에 대한 신의를 배신하지 않는 일이라 하겠다.

보통의 남편과 아내

흔히 우리는 조선 시대 사대부의 부부관계가 근엄하고 엄격하게 ‘부부유별’을 잘 지켰을 것이라고 상상하는데, 꼭 그러지만은 않은 것 같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가 관념과 이념대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평범한 삶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반복되는 일도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남편의 바람기와 아내의 투쟁(?)이 삶의 무늬를 더한다. 남자들은 아내가 있는데도 첩을 맞이하곤 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일부일처제와 다른 문화이다. 굳이 문화라고 하는 이유는 당시 그 일을 크게 비난하거나 역겹게 생각하지 않았고, 왕으로부터 미관말직의 사대부도 능력만 있으면 첩을 둘 수 있었다. 일부다처제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첩의 자식에게 벼슬을 주지 않는 제한 사항이 있어 크게 장려한 일은 아니지만, 첩 자체는 흉이 되지 않았다. 이런 첩의 문제로 아내들은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고, 질투 또한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좀 우스운 사례이지만 이제신(李濟臣, 1536~1584)의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효성(金孝誠)은 사랑하는 여인이 많았고, 부인도 질투가 대단히 심했다. 어느 날 그가 밖에서 들어오다가 부인 자리 곁에 검정 물을 들인 모시 한 필이 있는 것을 보고, ‘이 검은 베는 어디다 쓸 것인데 부인 자리 곁에 놓았소?’라고 물었다. 부인이 정색을 하고, ‘당신이 여러 첩한테 빠져서 본 마누라를 원수같이 대하므로, 저는 스님이 될 마음을 굳게 먹고 이것을 물들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웃으며, ‘내가 여색을 밝혀서 기생·의녀(醫女)로부터 유부녀, 천한 사람, 관기의 우두머리, 바느질하는 종을 막론하고 얼굴만 예쁘면 반드시 사통하여 왔으나, 여승은 아직 한 번도 가까이해본 적이 없소. 그대가 여승이 된다면 내가 원하던 바이오.’라고 하니, 부인은 마침내 한마디도 못 하고 옷감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이 정도면 어느 부인인들 질투하지 않겠는가? 한편 부인만 아니라 남편도 질투했다. 『용재총화』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신재추(辛宰樞)는 성품이 매우 급하였다. 파리가 밥그릇에 어지럽게 몰려들어 좇아도 다시 모여들자, 재추는 성질이 나서 그릇을 땅에 던져버렸다. 부인이 ‘하찮은 벌레를 놓고 어찌 이다지도 화를 내시오?’라고 하니, 재추는 눈을 똑바로 뜨고 꾸짖기를, ‘파리가 네 서방이냐? 어째서 두둔하느냐?’라고 하였다.”
이걸 굳이 따지면 질투가 아닐 수 있지만, 그의 말투에 질투가 섞여 있다. 무의식의 발로이리라.

관념은 신념을 통해 실천으로

유교적 관념에 교화되거나 그것이 신념으로 굳어진 사람은 남녀 관계의 구분을 엄격히 지켰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해동잡록』에서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부부가 혼인하여 백 년을 같이 살 때 남편은 아내를 위해 생각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이며, 남편은 더욱 노여움을 참고 아내는 더욱 순종해야 가정의 법도가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있어서 부창부수의 참된 의미이다. 때로는 분별이 지나쳐 너무 엄격한 사람도 있었다. 윤기헌(尹耆獻, 1548~?)의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서는 “효도로 이름난 송인수(宋麟壽)가 장가드는 날 저녁에도 등불을 밝히고 글을 읽으니, 사람들이 글 미치광이라고 지목하였다.”라는 말이 보일 정도이다.
요즘 부인만의 정절과 부부유별을 강조하는 일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의 절개를 높이고, 남녀를 구별하는 일이 당시 사회·경제적 배경에서는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있겠으나, 이런 문제는 역사적 조건과 함께 인간의 주체적 자각과 실천 속에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남녀 구별은 오늘날 전혀 쓸모없는 일일까? 차별이 아니라 모종의 역할 구분으로서 말이다. 찾아보기 바란다. 아니면 옛날처럼 음란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까? 그렇다면 삶의 파탄을 예방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 그 가운데 하나로서 성폭력과 성추행의 의혹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누구나 스스로 경계하는 가르침으로 여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