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로 읽는 율곡철학과 율곡학


율곡 철학 스토리텔링
– 이야기로 읽는 율곡철학과 율곡학

 

강민우: 안녕하십니까. 먼저 저의 소개를 간단히 하겠습니다. 저는 현재 인덕대학교 자동차과 1학년에 재학 중인 강민우입니다. 이번 학기에 교양수업으로 인문학 강의를 수강 신청했습니다. 학교 교수님께서는 한국철학의 여러 인물을 소개해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관심을 가진 분이 바로 율곡선생이십니다.

‘율곡은 어째서 5천원권의 지폐에 실릴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율곡의 어머니인 심사임당은 어째서 5만원권의 지폐에 실릴 수 있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무슨 큰 일을 하셨기에 5천원권과 5만원권의 지폐에 모자(母子)가 동시에 실릴 수 있을까’ 등. 이런 의문을 가지고 여러 책을 봐나가던 중에, 마침 율곡선생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가지에 대해 질문을 드리고, 많은 배움을 얻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율곡: 저도 강민우 학생과 같은 젊은 대학생을 만나 사회․경제․문화․인생 전반에 대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서 무척 기쁩니다. 무엇이 궁금한지 부담 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민우: 먼저 율곡 선생님의 출생과 가족에 대해 여쭤보겠습니다.

 

(1) 율곡의 출생과 가족

강민우: 무엇보다 저의 이름은 강민우 하나인데, 율곡선생님의 호칭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으로 눈에 띕니다.

율곡: 저의 이름은 이(珥)이고, 자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입니다. 율곡 외에도 석담(石潭)․우재(愚齋)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평산 신씨(平山申氏) 사임당(師任堂) 사이에 네 아들과 세 딸 가운데 셋째 아들입니다. 오늘날 강릉 북평촌(北坪村) 외가에서 1536년(중종 31) 12월 26일(음력)에 태어났습니다.

강민우: 호칭이 너무 다양합니다. 이름은 알겠는데, 자(字)와 호(號)는 무엇을 말합니까.

율곡: 예기(禮記)라는 책에는 “남자는 20세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자(字)를 짓고, 여자는 혼인을 약속하면 계례(筓禮)를 행하고 자(字)를 짓는다”라고 합니다. 오늘날 성인식에 해당하는 관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입니다. 당시에는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관념이 있어서 어른(성인)이 된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면서 갖는 이름 외에, 누구나 널리 부를 수 있는 별도의 호칭이 필요하게 되어 자(字)를 지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자(字)는 성년의식을 통해 성인으로서의 막중한 의무와 책임을 부여한 호칭이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율곡: 그렇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이름(名)은 임금․부모․스승이 아니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호칭이며, 자(字)는 선배나 친구가 상대를 존중하여 부르는 호칭이며, 호(號)는 본인이나 친구, 마을 사람 등이 가볍게 이름 대신 또는 ‘자’ 대신 부를 수 있는 호칭입니다. 특히 ‘호’는 선후배간 뿐만 아니라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별명(닉네임) 정도의 가벼운 호칭이라 하겠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18세에 어머니 상을 마치고 성년의식인 관례(冠禮)를 행하여 자(字)를 숙헌(叔獻)이라 받았던 것이죠. 저도 올해 20세로 성년에 해당하는 나이입니다. 성년의식인 관례를 행하는 의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율곡: 남자가 15세에서 20세 사이인 성년에 이르면 상투를 틀고 갓을 쓰게 하던 의식입니다. 관례를 행하고, 그 때부터 한 사람의 성인으로 대우합니다.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아주는 의식으로서 계례(筓禮)를 행합니다. 15세 이상이 되어야 예(禮)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조건은 부모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중이 아니어야 됩니다. 저는 16세 때 어머니의 상이 있었기 때문에 상이 끝나고 관례를 행한 것입니다.

강민우: 숙헌(叔獻)이라는 ‘자’에 얽힌 일화가 전해집니다. 율곡선생의 친구인 이제신(李濟臣)의 「소설(小說)」에는 “군수 이경(李敬)이 젊어서 자를 숙헌이라 했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는 네가 존중할 사람의 자이니 너는 속히 고쳐라’라고 하여, 이경이 자를 숙온(叔溫)으로 고쳤다. 뒷날 같은 해 과거급제자의 명단이 나온 다음에야 숙헌이 율곡의 자임을 알았다고 합니다.”(「연보초고」)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여부를 떠나서 율곡선생이 뒷날 한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인물로 추앙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율곡: 과찬이십니다.

강민우: 어머니 사임당께서 율곡선생을 임신하셨을 때에 태몽을 꾸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이십니까.

율곡: 어머니가 꿈에 동해바다에 나갔는데, 한 선녀가 옥동자를 안고 있다가 어머니 품에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태어나기 전날 밤에도 큰 바다에서 흑룡(黑龍)이 날아와 침실의 처마 밑에 서리고 있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저를 낳았다고 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어머니 사임당은 율곡선생을 낳은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어린아이 시절의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불렀나 봅니다. 흑룡이라는 동해바다의 정기를 타고나신 것이니,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인물 탄생에 얽힌 태몽으로도 잘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율곡: 저는 일곱 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습니다. 차례대로 말하면, 위로 큰형 이선(李璿), 큰 누님 매창(梅窓: 趙大男의 처), 둘째 형 이번(李璠), 둘째 누님(尹涉의 처)이 있고, 아래로 여동생(洪天祐의 처)과 남동생 이우(李瑀)가 있습니다. 큰형 이선은 저보다 12세 많습니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다가 41세에 비로소 소과(小科)에 합격합니다. 47세(1570) 때 처음으로 남부 참봉(南部參奉)의 벼슬을 받았으나, 그 해에 병으로 죽고 맙니다.

강민우: 많이 슬퍼하셨겠습니다. 그래서 큰 형님이 돌아가시자, 제문을 짓고(「祭伯氏文」) 형님의 후덕한 성품을 칭송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평생 바깥으로 꾸밈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도록 미워하거나 시샘하는 사람이 없었다.”(「伯氏參奉公墓誌銘」). 특히 큰 형수에 대한 보살핌이 지극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율곡: 큰 형수 선산 곽씨(善山郭氏)는 회덕(懷德: 현 대전시 회덕동)에 계셨는데, 해주로 이사 오게 하여 함께 모시고 살았으며, 또 서울에 올라와서도 모셨습니다. 큰 형수께서는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오직 저의 말이라면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큰 형수께서 홀로된 이후에 자식들과 함께 저에게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큰 형수 역시 46세의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는데, 그때 애통하는 제문(「祭伯嫂郭氏文」)을 짓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둘째 형님 이번(李璠)은 물정에 어두워 제대로 벼슬길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둘째 형님은 저의 문장을 너무 좋아하여 제가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면 언제나 그날 무슨 글을 지었는지를 묻고서, 그 글을 베껴둡니다. 아마 저의 시와 같은 글이 유실되지 않고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둘째 형님의 덕분입니다.(尹宣擧, 「魯西記聞」)

강민우: 특히 남동생을 무척 사랑하고 동생도 형님(율곡)을 잘 따라 ‘자기를 알아주는 벗(知己之友)’으로 삼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율곡: 남동생 이우(李瑀)는 호가 옥산(玉山)이며 저보다 6세 아래입니다. 26세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뒤에 여러 고을 현감(縣監)을 지냈습니다. 제가 해주 석담(石潭)에 살 때에 틈이 날 때면 술상을 차려놓고 남동생을 불러와 거문고를 타게 하고 시를 화답하며 즐겼습니다. 이우는 어머니 사임당의 예능을 이어받아 거문고․글씨․시․그림(琴書詩畫)에 뛰어났습니다. 또한 큰 누님 매창(梅窓)은 저보다 7세가 위였는데, 어머니 사임당을 이어받아 시․글씨․그림․자수에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불행히도 임진왜란 때 자식들을 데리고 원주로 피난을 갔다가, 모자가 함께 왜적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강민우: 큰 누님 매창은 매우 현명하여 율곡선생께서도 많은 자문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율곡: 그렇습니다. 제가 병조판서로 재임할 때, 함경도 변경에 여진족의 노략질이 많았습니다. 군사를 동원해서 막아야 하는데, 군사와 군량미도 부족하여 어려움이 컸습니다. 이때 큰 누님은 “서자(庶子: 첩의 자식)들이 곡식을 바치는 댓가로 벼슬길에 나올 수 있게 해주면, 차별받던 서자들의 처지도 개선되고 나라의 군량미도 해결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습니다. 후에 저는 이 조언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각별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갈 때마다 형제들과 함께 지내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시를 남기기도 하셨습니다.

율곡: 지금 생각해도 그때가 많이 그립습니다. 제가 고향 율곡촌을 찾아갔다가 형님과 동생들을 그리워하며 읊었던 시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우리 형제 일찍이 여기서 놀 적에 弟兄曾駐馬,
친구들도 떼지어 따라 다녔지. 朋友亦隨羣.
(…) (…)
이제 오니 옛 자취 되고 말았구나. 至今成舊跡,
다래덩굴 오솔길 황혼에 홀로 섰네. 蘿逕獨黃昏. (「過上山洞, 忽憶舊事, 因感有作」)

외로운 마을 고목에 의지해 있고, 孤村依老樹,
작은 냇물 거친 물굽이로 흘러드네. 細澗下荒灣.
(…) (…)
이별의 시름 이제 더욱 짙어지니, 別愁今轉極,
내 얼굴 주름살 펼 길 없구나. 無境解吾顔. (「過越溪棧, 宿村舍, 有懷兄弟」)

강민우: 가족 소개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율곡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어머니 신사임당입니다. 어머니와의 사랑이 각별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