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신사임당의 사랑

 

(2)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랑

율곡: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어머니는 제가 있어 특별합니다.

강민우: 제가 본 책에 의하면, 율곡선생님께서는 아버지의 영향을 찾아보기가 다소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와 달리, 어머니와 외할머니(외조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흔적이 무척 깊어 보입니다. 특히 어머니 사임당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여성으로는 매우 드물게 학식이 깊고 시와 그림과 자수의 예능에도 두루 뛰어났던 인물인 듯합니다.

율곡: 어머니의 행적은 「선비행장(先妣行狀: 돌아가신 어머니 행장)」에 매우 자세히 기록해두었습니다.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1504~1551)은 외할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외할머니 용인 이씨(龍仁李氏) 사이의 다섯 딸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로부터 경전을 배웠습니다. 시도 잘 짓고, 글씨도 잘 썼으며, 바느질과 자수까지 섬세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림에 뛰어났습니다. 7세 때에 조선 초기 산수화에 뛰어난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山水圖)를 그린 것이 아주 훌륭합니다. 특히 포도를 그린 것은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강민우: 그래서 아버지 이원수께서도 찾아온 친구들에게 아내 사임당의 그림을 자랑하기도 하였다죠. 그리고 풀벌레, 화초, 대나무, 매화, 난초, 산수 등 정밀한 관찰과 섬세한 솜씨의 그림들이 지금까지 칭송을 받으며 40여 폭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율곡: 어머니는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스러우며, 말 수가 적고 거동이 조용하며, 일처리도 자상하였습니다. 외할아버지 신명화는 다섯 딸 가운데도 둘째 딸 사임당을 특히 사랑하였나 봅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사임당이 19세에 시집을 가게 되자, 사위 이원수에게 “내가 딸이 많으나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지 않지만, 그대의 아내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라고 하며, 출가 후에도 친정에 붙들어 두고 싶어했습니다.

강민우: 외할아버지께서 둘째 딸 사임당에게 큰 애착을 가지셨나 봅니다. 사임당 역시 서울에 올라온 이후 항상 부모님을 그리워하여 눈물을 흘리고, 어떤 때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율곡: 얼마나 부모님을 그리워하였는지 알 수 있는 시 구절이 있습니다.

밤마다 달을 보고 비노니, 夜夜祈向月,
살아계실 제 뵈올 수 있게 하소서. 願得見生前.

강민우: 그래서 사임당은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친정이 있는 강릉으로 가서 머물기도 했고, 경기도 파주로 내려가 살기도 했습니다. 강릉에 가 있는 동안 율곡선생을 낳으셨고, 율곡선생이 여섯 살 되던 해(1541)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율곡: 어머니 사임당이 강릉으로 친정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외할머니와 울면서 작별하고, 대관령 중턱에서 고향 길을 바라보고 외할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었던 시가 지금도 생각납니다. 지금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늙으신 어머님 고향에 두고, 慈親鶴髮在臨瀛,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身向長安獨去情,
돌아보니 북촌(北坪村)은 아득한데, 回首北村時一望,
흰 구름이 날아 내리는 저녁 산만 푸르네. 白雲飛下暮山靑.

강민우: 율곡선생은 외가에서 태어나 6살 때까지 외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장성한 이후에도 외가에 자주 출입하였던 것이죠.

율곡: 저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龍仁李氏, 1480~1569)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외할머니의 행적을 기록한 행장을 남겼습니다. 외할머니는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며 마음가짐이 순수하고 차분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자, 외할머니는 손가락을 잘라 함께 죽기를 하늘에 간청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꿈에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곧 나을 것이다’고 알려주었고, 곁에서 병간호를 하던 둘째딸인 사임당도 하늘에서 ‘신령스러운 약(靈藥)’을 내려주는 꿈을 꾸었는데, 이튿날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강민우: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께서는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마을 입구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 이듬 해 서울서 돌아가셨고, 외할머니는 강릉에 계속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딸만 다섯이고 아들이 없어서 둘째딸 사임당의 셋째아들인 율곡선생께서 외조부모의 제사를 맡았던 것이지요.

율곡: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이 딸만 다섯이어서 외손인 제가 그들의 제사를 모시는 외손봉사(外孫奉祀)를 지냈습니다.(「外祖妣李氏墓誌銘」) 원래 한 집안의 제사는 적장자(嫡長子: 맏아들)를 중심으로 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사를 담당하는 봉사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정해집니다. 딸의 자손이 지내는 ‘외손봉사’, 죽은 장자의 부인(맏며느리)이 지내는 총부봉사(冢婦奉祀), 아들과 딸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맡아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 등이 있습니다. 이렇듯 다양하게 존재했던 봉사방식은 17세기 이후 적장자에 의한 가계 계승을 강조하는 종법적(宗法的) 가족질서가 정착되어감에 따라 점차 적장자봉사로 바뀌게 됩니다.

강민우: 외할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상소를 올리고 강릉으로 달려갔다가 파직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율곡: 제가 33세(1568) 때 이조 정랑(吏曹正郎)에 제수되고 나서, 외할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때 저는 외할머니의 사랑과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곧장 사직 상소를 올리고 강릉으로 달려가 외할머니를 보살피며 간병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기관에 해당하는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외할머니를 위해 사직한다는 조항이 법전에 없는데, 마음대로 직무를 버렸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파직을 요청했습니다. 선조임금은 “아무리 외할머니라 하더라도 인정의 도리가 간절하면 어찌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효행의 일로 파직시킨다는 것은 너무 과한듯하다”라고 하여, 파직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연보」)

강민우: 이듬해(1569)에도 외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임금은 “조정에 있더라도 오가면서 돌봐드릴 수 있다”라고 하자, 오늘날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이조(吏曹)에서는 “외할머니를 찾아뵙는 일은 비록 법전에 있는 규정은 아니지만, 특별히 다녀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허락하였다죠. 이것은 모두 율곡선생님의 외할머니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공경심이 임금도 감동시켰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율곡: 제가 외할머니께 받은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강민우: 율곡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효성스러운 덕과 어진 품성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했을 때의 일화도 들려주세요.

율곡: 제가 5살 때 어머니의 병이 위독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온 집안이 경황이 없어 허둥지둥할 때, 저는 몰래 외할아버지의 사당에 들어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식구들이 저를 찾아다니느라 몹시 애를 먹었던 모양입니다. 뒤늦게 사당에서 발견하고서는 어린아이답지 않는 행동에 놀라워하면서 저를 끌어안고 돌아왔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年譜」) 그때 저는 조상의 신령에게 기도하는 옛 사람의 행적을 글에서 보았고, 그것을 그대로 실행하였던 것입니다.

강민우: 11세 때 아버지의 병환이 위중하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마시게 하는 효행을 실천하기도 했다지요. 그때 사당에 들어가서 조상님께 “저는 나이가 젊고 재주도 많으니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거니와, 아버지는 나이가 늙어서 저의 재주 많은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여, 아버지 대신에 죽기를 빌었다죠.(「연보초고」) 또한 율곡선생이 사당에서 아버지 대신 죽기를 빌었던 다음날, 아버지가 살아나서 “꿈에 백발노인이 이 아이(율곡)를 가리키며 ‘이는 우리나라의 큰 선비이니, 그 이름은 옥(玉) 가에 귀(耳)를 붙인 글자다’라고 말했다”라고 전해집니다.(「연보초고」) 원래 율곡선생의 어릴 적 이름은 현룡(見龍)이었는데, 이때부터 이름을 이(珥)로 지었다고 합니다. 지극한 효성에 신명의 응답이 있었다는 설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율곡: 16세(1551) 때 어머니 사임당이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상중에 있는 동안, 상례와 제사의 절차는 당시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의례를 규정해 놓은 책인 가례(家禮)(또는 주자가례)에 따랐습니다. 탈상할 때까지 여묘살이를 하고 이듬 해 여름에 탈상했지만, 심상(心喪)을 더하여 18세 때 가을에 삼년상을 마쳤습니다.

강민우: 이때 몸소 제수(祭需: 제사상 차림)를 장만했으며, 제기(祭器: 제사 때 쓰는 그릇)를 닦고 씻는 일도 하인에게 맡기지 않고 손수했다지요. 이것은 모두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라 여겨집니다. ‘여묘살이’와 ‘심상’은 오늘날에 잘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만.

율곡: 여묘(廬墓)는 상주가 무덤 근처에 여막(거처하는 초가)을 짓고 3년(만2년)을 거처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면서(上食) 모시는 생활을 말합니다. 이것은 ‘시묘살이’라고도 부릅니다. 제가 살던 조선시대에는 국시(國是)인 유교의 이념에 따라 효(孝)를 중시했으므로 돌아가신 부모라도 3년 동안 모셨습니다.

강민우: 3년간 여막에서 거처하면 상주의 건강이 많이 악화될 수 있겠습니다.

율곡: 물론입니다. 시묘살이 중에 심각하게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묘살이는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예법을 규정한 책인 가례 등에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 집안에서 유행하였는데, 이것은 예법의 실천이 아니라 유교적 전통관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민우: 심상(心喪)은 또 무엇을 말합니까.

율곡: ‘심상’은 상복(喪服)은 입지 않지만 상중 때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을 말합니다. 보통 스승의 상에는 상복을 입지는 않지만, 3년 동안 마음속에 애도의 뜻을 지니는 심상을 행합니다. 심지어 3년간 스승의 묘를 돌보기도 합니다.

강민우: 오늘날의 장례문화와는 너무 다릅니다. 지금은 3년이 아니라 3일이면 장례가 끝납니다. 또한 무덤 근처에서 3년간 부모를 모시는 시묘살이는 더더욱 볼 수 없습니다. 요즘은 무덤을 쓰는 것보다 화장해서 추모공원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입니다.

율곡: 그렇군요. 저의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강민우: 1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이듬해 여름에 탈상을 하고 심상을 더하여 18세 때 가을에 삼년상을 마쳤다고 하셨는데, 어째서 3년 후에 탈상을 하지 않은 것입니까.

율곡: 원래는 아버지든 어머니든 부모의 상에는 3년상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금처럼 아버지가 생존해 있을 때에는 어머니를 위하여 기년상(期年喪: 만1년상)을 합니다. 이것은 어머니를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다만 아버지를 존엄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존엄한 것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존엄함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살아계셨기 때문에 1년만에 탈상하였던 것입니다.

강민우: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하여 심상을 더하였던 것입니까?

율곡: 그렇습니다. 26세(1561) 5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했습니다. 이때도 당시의 예법인 가례(家禮)(또는 주자가례)의 절차에 따라 장사지냈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합장하였으며, 28세(1563) 가을에 탈상했습니다. 탈상(脫喪)은 ‘상복을 벗는다’는 뜻으로, 삼년상이 모두 끝나 상복을 벗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상을 마치고 나서도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였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읊었던 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땅 형세는 무수한 산들 자잘하게 벌여 있고, 地勢千山小,
샘 원류는 수많은 골짜기로 갈라져 흐르네. 泉源萬壑分.
숨어 사는 은자의 아침저녁 일이란, 高人獨昏曉,
한가한 구름 맞았다 보냈다 하는 것 뿐이네. 迎送只閒雲. (「偶興」)

강민우: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빠져 마음 붙일 곳 없이 방황하다가 19세 때에 불도를 닦기 위해 금강산으로 입산하게 되셨군요.

율곡: 18세 때 어느 날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불교서적을 뒤적이다가, 불교에서 말하는 삶과 죽음(특히 죽은 이의 혼령을 위해 복을 빈다)에 관한 이론에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율곡행장」) 저는 그동안 유학의 정통이념에서 불교와 도교를 이단(異端)으로 배척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인생의 근원적 문제(생사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19세(1554) 3월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1년 동안 불도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1년 만에 다시 하산하여 세속으로 돌아왔습니다.

강민우: 유학자로서 불교에 빠져 입산수도를 하였다는 사실은 후에 율곡선생에게 치명적인 흠이 되기도 하셨죠.

율곡: 그때의 일 때문에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금강산에 있는 동안 산수의 절경을 찾아 유람도 다니고, 불경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만상(萬象)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로 잡고 깊은 사색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상(현상)과 하나(본체)를 넘어서는 진리의 궁극적 근원을 찾고자 하였던 공부였습니다.

강민우: 불교적 사유 안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습니까.

율곡: 불교는 현실의 일상을 벗어나서 초월적 근원(깨달음)을 추구합니다. 때문에 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현상 속에서 본체(진리)를 발견하는 유교의 진리에 주목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불교에서 유교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강민우: 불교에서 율곡선생이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금강산에서 하산하셨습니다. 결국 입산하여 찾던 불교를 통한 진리의 발견에는 실패하신 것이군요.

율곡: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세 가을에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강릉의 외가로 갔습니다. 이때 외가에서 유교의 경전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던 느낌을 한 수의 시로 읊었습니다.

인간세상 어디에 넓은 집 있는가, 何處人間有廣居,
백 년 평생이야 묵어가는 주막이라. 百年身世是蘧盧.
세상바깥 산천을 노닐던 꿈 깨어나자, 初回海外遊山夢,
외로운 등불 아래 옛 책을 펼쳐보네. 一盞靑燈照古書. (「燈下看書」)

강민우: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을 실감하고 잠시 세상을 벗어나 불교의 세계에 노닐었는데, 이제 세상 바깥을 찾아 헤매던 꿈에서 벗어나서 세상 속으로 돌아와 등불 아래서 옛 경전을 펼쳐놓고 읽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때 자신을 다짐하는 11조목의 지침서로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율곡: 자경문(自警文)은 ‘스스로를 경계하여 조심하는 글’이라는 뜻으로, 제가 세운 인생의 지침서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①목표를 크게 가진다. ②말을 적게 한다. ③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④혼자 있을 때에도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 ⑤옳고 그름을 알기 위해 독서를 한다. ⑥재물과 명예에 관한 욕심을 경계한다. ⑦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다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단호히 끊는다. ⑧정의롭지 않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가진다. ⑨누군가 나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⑩밤에 잘 때나 병이든 때가 아니면 절대로 눕지 않는다. ⑪공부를 게을리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공부는 죽은 후에나 끝나는 것이니 급하게 그 효과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민우: 율곡선생이 20세 때 학문의 길에 나서며, 이와 같은 마음으로 공부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저도 지금 20세인데, 감히 이런 생각에 미치지 못합니다. 많은 결심을 하지만, 결국 작심3일로 끝납니다.

율곡: 무엇보다도 학문의 목표로는 반드시 성인이 되겠다는 포부와 이상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공부하는 방법으로는 게으르거나 조급함이 없어야 하며 죽을 때까지 지속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부모님께서 남겨준 몸을 조금이라도 욕되게 하지 않게 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