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趙憲: 1544년∼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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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은 본관이 황해도 백천(白川)이다. 휘는 헌(憲)이며 자는 여식(汝式)이다. 호는 도원(陶原), 후율(後栗)이며 중봉(重峯)은 만년의 호이다. 조부 조세우(趙世佑)는 조광조의 문인으로 통진(通津)에서 김포 감정리로 세거지(世居地)를 옮겼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부친은 성수침(成守琛) 문인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아 집안 형편이 항상 곤궁했다.

조헌은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조헌은 귀가 크고 키가 컸으며 눈동자가 별처럼 또렷하였다. 천성이 효순하고 태도가 순진하고 확고하였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계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마침내 계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항상 격앙하여 스스로 “하늘이 남자를 태어나게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했다. 살림이 몹시 가난하여 헤진 옷과 신발을 신고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바람과 눈보라를 피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몸소 자기가 땔나무를 등에 져다가 부모를 위해 불을 지폈고 불빛에 비추어 글을 읽었다. 평소의 언행과 강습이 모두 위기의 학문 실천이었다. 대학의 ‘남의 자식 된 자는 효에 멈추어야 되고 남의 신하된 자는 공경에 멈추어야 된다.’ 대목에 이르면 세 번씩 반복하여 완미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요순과 탕무가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공맹과 정주가 아니면 배우지 않았다. 기상을 알 수 있다.

1565년(22세)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여러 유생들과 함께 보우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궐 밖에 엎드려 임금의 응답을 기다렸는데 조헌만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강직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1567년(24세) 명종 22년 가을 감시에 응시하여 삼장에 합격하였다.

1570년(27세) 선조 3년 파주목 교수가 되었다. 우계 성혼에게 학문을 청하였다. 특히 주역을 배우고자 했으나 성혼이 조목의 학문을 높이며 외우(畏友)라 칭하며 제자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1년(28세) 홍주목 교수가 되었다. 토정 이지함을 만나 배움을 청하였다. 가을에는 파주에서 율곡 이이를 만나 뵈었다.

1572년(29세, 선조 5년) 교서관 정자가 되었다. 선조가 전례대로 불사(佛寺)에 향(香)을 내려주자 선생이 상소하여 그 일이 불가하다고 극언했다. 선조가 노하여 장차 사형을 시키려고 했다. 관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직성(直聲)을 조정에 떨쳤다.

1577년(34세) 통진 현감으로 재직 중 잘못을 일으킨 노비를 장살하여 부평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다음해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유배지에 있어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1580년(37세) 유배지에서 석방되었다. 윤4월 보령으로 가서 이지함의 상에 곡하였다. 가을에는 해주 석담으로 율곡선생을 찾아가 수개월간 강학하였다. 조목의 후율(後栗)이라는 호는 율곡을 존경하여 율곡(栗谷) 선생의 뒤를 잇는다는 뜻을 취했다.

1581년(38세, 선조 14년) 봄 공조 좌랑을 거쳐 전라도 도사가 되었다. 송강 정철이 본도의 관찰사가 되자 조헌이 정철을 헐뜯는 말을 듣고 그의 막하로 있고 싶지 않아 병을 핑계대고 벼슬을 그만두려 했다. 성혼과 이이의 권유로 만나게 되어 마침내는 금석처럼 변치 않는 교제를 맺었다.

1584년(41세, 선조 17년) 율곡이 사망하여 곡을 했다. 이이와 성혼의 지지를 받던 정여립이 이이, 성혼, 반순 등 서인의 주요 인물을 비판하고 동인으로 돌아섰다. 이발이 정여립에 동조하자, 조헌은 그와 절교하고 정여립의 소를 논박하는 상소문을 거듭 올렸다. 서인의 앞잡이로 몰려 배척받자 옥천으로 내려가 살 것을 결심했다. 겨울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옥천으로 옮겨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강학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586년(43세) 공주목 교수가 되었다. 10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그 중에 “신이 이 세상에 스승으로 삼은 자가 세 사람으로 이이, 성혼, 이지함입니다. 세 사람은 학문의 나아간 바가 비록 각기 다르지만 그 청심과욕(淸心寡慾)하고 지극한 행실로 세상의 모범이 됨은 똑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 세 사람이 신에게 가르친 것으로써 선비들을 가르치려고 하였으나, 사설(邪說)이 성행하여 신이 이이와 성혼의 무리라는 말을 듣고서는 대부분 등을 돌려 달아났으며 꾸짖고 욕하는 말이 사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이 못난 까닭에 사우(師友)에게까지 욕이 미쳤으니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했다.

1589년(46세, 선조 22년) 4월 도끼를 지고 대궐에 나아가 만언소를 올렸으나 양사와 옥당의 차자를 올려 벌주기를 하므로 함경도 길주 영동역으로 유배되었다.

당시 조헌이 옥천에서 재를 넘으며 2천여 리 길을 가며 온갖 곤욕을 극도로 겪었으나 사기(辭氣)는 조금도 꺾인 적이 없었다. 영북 지방에 돌림병이 한창 극성하여 그곳을 지나다가 죽는 자들이 열이면 대여섯이나 되었다. 조헌의 아우와 두 하인도 모두 죽었는데, 극도로 슬프고 가슴이 아팠지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주변에 시체가 쌓인 가운데에서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간혹 몸소 병자의 집에 찾아가서 약을 주어 살려내기도 하였는데 끝까지 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선생의 정기(正氣)는 여귀(厲鬼)도 감염시키지 못했다.” 했다.

1591년(48세, 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신을 보내와 명나라를 칠 길을 내놓으라고 하여 조정에 소동이 일어났다. 이때(3월경) 조헌은 옥천에서 상경하여 도끼를 지고 대궐로 나아가 일본 사신을 참수하고 명나라에 보고할 것을 상소하였다.

상소가 대궐에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나도 아무 회보(回報)가 없자, 주춧돌에 머리를 짓찧으니 피가 얼굴을 덮을 정도로 흘렀다. 어떤 자가 그 자고(自苦)함을 비웃자 “내년에 산속으로 달아나 숨게 되면 반드시 내 말이 생각날 것이다.” 했다. 스스로 중국에 알릴 주문(奏文)과 유구(琉球)ㆍ대마(對馬)ㆍ일본(日本)의 유민들에게 유시하는 글과 현소(玄蘇)를 참수한다는 죄목 및 영남과 호남의 왜적을 방비하는 계책을 기초하였는데, 그 대개는 이전의 상소와 같았으되 말씨가 더욱 격절하였다.

1592년(49세, 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어머니를 청주 선유동으로 피신시키고 돌아왔다. 5월 격문을 지어서 병졸을 모집하였다. 제자 김절(金節), 김약(金籥), 박춘검(朴忠儉) 등과 함께 향병(鄕兵)을 소집하여 보은 차령에서 북상하는 왜적을 퇴각시켰다. 6월 제자 이우(李瑀), 김경백(金敬伯), 전승업(全承業)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약 1,600여명을 모아 8월 청주에서 영규(靈圭)의 승려군과 합류하여 왜적을 격파하고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 당했다. 불과 700여명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다.

8월 16일에 군대를 옮겨 금산으로 향하였는데, 어떤 자가 금산의 왜적들이 모두 정예군이고 수효도 수만 명이나 되므로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조헌이 비문하며 맹세하기를, “군부(君父)가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감히 형세의 이둔(利鈍)을 말하는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되니 나는 한번 죽는 것만을 알 뿐이다.” 했다. 마침내 승장 영규와 더불어 군대를 연합하여 진격했다.

앞서 호남 순찰사 권율과 더불어 18일에 일제히 군대를 움직여 왜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권율이 서신을 보내 기일을 바꾸었으나 이미 금산군의 십리(十里) 밖에까지 도달하였다. 왜적이 조헌의 군대 뒤에 후원군이 없음을 알아채고서 전열을 갖추지 못했을 때를 틈타서 맞받아 공격해왔다. 조헌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오늘은 단지 한번 죽는 일만 있을 뿐이니, 사생과 진퇴함에 있어 오직 의(義) 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 하자, 사졸들이 모두 명령한 대로 따르겠다고 했다.

한참 동안 힘껏 싸우자 왜적은 세 번이나 패배하여 거의 궤멸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 병사들도 화살이 바닥나서 어쩔 수가 없었고 해가 저물어가니 사졸들은 맥이 풀렸다. 이에 조헌이 의기(意氣)가 자약(自若)하여 더욱 다급하게 독전(督戰)하니 왜적이 정예병을 모조리 투입하여 공격해왔다. 마침내 장하(帳下)에 들어가자 편비(褊裨) 서너 명이 있다가 탈출하게 하려고 뛰쳐나가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조헌은 웃으며 말안장을 풀면서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순절할 곳이다. 장부는 한번 죽을 따름이니 난리에 임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해서는 안 된다.” 하고서 북채를 당겨 북을 두드렸다. 사졸들이 앞 다투어 죽기를 각오하고 적에게 달려들었는데 심지어 빈주먹으로 서로 치고 때리면서도 오히려 자리를 떠나지 않았으며, 7백 명이 한 사람도 달아나 살아남은 자가 없었다. 왜적들도 죽은 자가 또한 그보다 더 많았으므로 기세가 마침내 크게 꺾이어 남은 병력을 거두어 진으로 돌아갔다.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고 이에 시체를 쌓아 불에 태우니 사흘이 지나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으며, 마침내 무주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과 함께 모두 달아났으므로 호서 지방이 그에 힘입어 온전하게 되었다.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왜적의 기세를 꺾고 진로를 막아낸 공이 이보다 나은 적이 없었다.

1603년 유생들이 금산의 순절(殉節) 장소에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1609년(광해군 1년) 충청도 유생들이 사액을 청하여 표충사(表忠祠)라는 사액을 하사받았다.
1649년(인조 27년) 문열(文烈) 시호를 받았다.
1656년(효종 7년)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액(篆額)을 썼다.
1666년(현종 7년) 호남 관찰사 민유중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1734년(영조 10년)6월, 조정에서 자손 중 적손(嫡孫, 큰집 자손), 지손(支孫, 작은 집 자손)을 가리지 않고 관리로 등용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천일기(朝天日記)』의 간행을 명하였다.
1740년(영조 16년)7월, 임금이 5대손 조혁(趙㷜)을 면담하고 선정(先正, 훌륭한 조상)의 행적에 대해 물어보았으며, 운각(芸閣, 서고)에 명하여 문집을 간행하여 자손과 서원에 보급하도록 명하였다.

신도비명이 그 삶의 정절을 고스란히 적었다. “하늘이 선(善)을 베풀어 중화(中華, 중국)라고 해서 풍족하게 주지 않고 이적(夷狄, 오랑캐)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지 않네. 선생께서 그것을 받으시어 효도는 자식들의 법이 되고 충성은 신하들의 법이 되었으니, 이 마음과 똑같은 자라면 누가 공경하고 감복하지 않으리오. 일은 만 갈래로 다름이 있고 이치는 간혹 하나가 아니기도 하네. 산 위의 구름은 쉽게 개이지만 임금의 총명은 오히려 미혹되었네. 포악한 물고기도 길들일 수 있으나 간사한 마음은 고치기가 어렵네. 임진년(壬辰年)ㆍ계사년(癸巳年)에 천지(天地)가 반복(反覆)되고, 선생의 일신(一身)이 홀로 인극(人極)을 담당하였네. 사신의 목을 베라고 위언(危言)하니 상하(上下)가 모두 실색(失色)하였네. 피눈물을 흘리며 대중에게 맹세하니 의로운 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네. 청주(淸州)에서 시전(試戰)하여 왜노(倭奴)들의 넋을 빼앗았네. 글을 올려 승전(勝戰)을 알리니 온 조정 사람들이 기뻐하였네. 재차 금산 전투에 나아가니 화살이 빗발치듯하였네. 사람은 용감하게 왜적을 죽이는데 하늘은 바야흐로 날씨가 나빴네. 구름 속에 짧은 해가 매몰되고 군사들은 촌철(寸鐵)조차 모자랐네. 부자(父子)가 분전(奮戰)하며 소리치매 하늘이 울부짖고 산악이 갈라졌네. 선생의 죽음을 남들은 몸을 위해 애석히 여기지만, 선생의 죽음을 나는 나라를 위해 애석히 여기네. 옛날에 전횡(田橫)의 무리들은 따라 죽은 자들이 오백 명이었지만, 지금 이에 순의(殉義)한 자들은 7백 명이나 되었네. 훌륭하도다 선생이여 만고토록 열렬하게 빛나리니, 신도비에 이름을 드리우매 홍필(鴻筆, 달필)이 아닌 게 부끄럽네.” 했다. ‘홍필이 아닌 게 부끄럽다’는 이 말이 가슴에 다가온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조헌 행력」, 『한국문집총간 인물연표』(http://www.krp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