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륜(趙守倫: 1555 ~ 1612)


조수륜(趙守倫: 1555 ~ 1612)                                 PDF Download

 

조수륜은 본관이 풍양(豊壤)이고 자는 경지(景至)이며 호는 풍옥헌(風玉軒), 만귀(晩歸)이다. 할아버지는 홍문관 전한 조종경(趙宗敬)이고, 아버지는 홍문관 응교 조정기(趙廷機)이다. 우계집을 동문들과 함께 편간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천성이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식견이 특출하였고, 가학의 연원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알았다. 자란 뒤에는 성혼에게 배웠는데, 겸손하고 독실하여 몸가짐을 경건하게 하고 남을 성의로써 대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복상(服喪)하는 일을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슬퍼하는 바람에 마침내 중병에 걸렸다.

1579년(25세) 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됐다.

1584년(30세)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다.

1590년(36세)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중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곧 해직되었다.

1601년(47세)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다. 교관이 되었을 때에는 권면하며 가르치기를 엄정히 규정을 세워 한결같이 소학(小學)으로 법도를 삼았다. 각기 그 뛰어난 바에 따라 가르쳐 주면서 지성으로 지도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비록 몹시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날에도 강마(講磨)하는 일을 중지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도(門徒)들이 가장 성하였다. 혹은 식량을 싸가지고 와서 거주하면서 공에게 배우기도 했다.

1604년(50세) 대흥현감에 제수되었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오로지 백성을 친애하고 봉공(奉公)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았다. 사사로운 은혜를 베풂으로써 명예를 노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봄과 가을에 향교와 사직에 제사지내는 일을 반드시 정결하고 정성스럽게 마련하여 몸소 거행했다.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이 있는 쪽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예절도 몸에 질병이 있지 않으면 폐지하지 않았다.

1609년(55세) 광해군 1년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

1611년(57세) 평택현감이 되었다. 다스린 두 현에서 모두 선정을 폈다고 조정에 계문(啓聞)하였다. 체포되자 평택의 온 고을 백성들이 모두 달려와서 호곡(號哭)하기를, “어찌 우리 태수처럼 어진 분에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인가.” 하고 슬퍼했다.

1612년 신율(申慄)이 황혁(黃赫)과의 오랜 원한으로 역옥(逆獄)을 일으켰는데 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역옥의 대강은 이렇다. 광해군 즉위에 대북은 결정적 공을 세운다. 대북은 권력을 독차지하려 했지만 광해군은 조정을 택한다. 이조판서와 이조전랑, 승지와 대간 등 실직(實職)은 대북에게 주었으나 최고위직인 정승은 서인(이항복)과 남인(이원익·이덕형)에게 주어 연립정권을 구성했다.

대북은 광해군의 통합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가졌으나 전란 극복에 전 당파의 합심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립정권은 문묘종사(文廟從祀) 문제로 공존의 기반이 크게 흔들린다. 집권당이면서도 남명 조식을 종사하지 못한 상황에 큰 불만을 가진 대북은 연립정권 내 다른 당파들의 축출을 구상하게 된다.

광해군 4년(1612)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대북의 이런 정국 구상에 이용되었다. 봉산 군수 신율(申慄)에게 ‘김경립(金景立: 일명 김제세)의 군역(軍役)을 면제하라’는 관문(關文: 상급 관청의 공문서)이 내려왔는데 예조에는 없는 예조참지(禮曹參知)란 직명이 쓰여 있었다.

조사 결과 관문에 사용된 어보(御寶)와 병조인(兵曹印) 등이 모두 위조된 것이었다. 승려였던 김경립은 환속 후 군역의 과중함을 견디다 못해 관문서를 위조한 것이었다.

이 단순한 사건이 순화군(順和君: 선조의 6남)의 장인 황혁(黃赫)이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晋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건의 추관(推官)이던 판의금 박동량(朴東亮)은 무리한 옥사라고 주장했고 김시양(金時讓)도 ‘도적이 죽음을 늦추고자 모반했다고 고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이첨 등의 대북은 이 사건을 이용해 서인, 남인, 소북 계열의 반대파들을 쫓아냈다.

윤증이 지은 비명에 조수륜의 평소 몸가짐을 말하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전재하면 이렇다.

“오호라, 공은 점잖고 겸손한 인품으로써 말을 신중하게 하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였다. 친척들이 그 돈목함을 기뻐하였고 붕우들은 그 신의에 감복했다. 줄곧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늙어서까지 해태하지 않았다. 성인의 이른바 ‘나라에 도가 있으면 폐기당하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을지라도 형륙을 모면할 사람이다.”는 것을 공이야말로 갖춘 사람이었는데도 도리어 음화(淫禍)를 모면하지 못하였다. 이는 일세(一世) 사람들이 몹시 서글프게 여기고 오래 지나도록 잊지 못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중앙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