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한(沈之漢: 1596-1657)


심지한(沈之漢: 1596-1657)                                 PDF Download

 

심지한은 본관이 청송(靑松)이고 자는 자장(子章)이며 호는 창주(滄洲)이다. 할아버지는 감찰 심종범(沈宗範)이고, 아버지는 심탁(沈倬)이다.

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종성 판관 정협,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신흠, 박동량, 한준겸 등 7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 서인의 수십 명이 지정자(知情者)로 몰려 수금되었다.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다. 영창대군은 서인이 되어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강화부사 정항에게 살해당하였다. 당시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들은 유배 또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쫓겨났다. 이 옥사를 빌미로 1618년 인목대비마저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다. 당시 권력자들의 위세가 몰아치는 바에 부화뇌동 하는 자가 많아서 어깨를 서로 부딪힐 지경이었다. 그때 심탁은 엄숙하고 의지가 굳세어 바른 길을 지켰는데, 다른 사람들이 더러 ‘때를 놓친다고 힘쓰라.’ 하면 웃으며 사양하기를 ‘운명이 있는 것이다.’ 했다.

1618년(23세) 광해군 10년 동학 유생(東學儒生)으로 조경기(趙慶起) 등 8인과 함께 폐모론을 주도하는 이위경, 정조, 윤인 등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하였다가 아버지 심탁과 함께 문외출송(門外黜送: 성문 밖으로 쫓겨남) 되었다.

앞서 대북파인 한찬남(韓纘男)이 심지한이 재주 있다는 말을 듣고 딸을 시집보내려고 청하였으나 심탁이 사양하고 듣지 않았다. 이후 심지한이 조경기 등과 함께 상소하여 폐모(廢母) 주창한 자인 이위경 등의 참수를 요청하면서 6일 동안 복궐(伏闕)하며 물러나지 않았다. 한찬남이 이미 혼사(婚事)를 거절했던 일로써 원한을 품었던 터라, 심탁의 집을 허물어뜨리어 도성 안에 머물 수 없게 했다. 부자(父子)가 한강 가에 나가 살다가 얼마 안 되어 심탁이 세상을 떠났고 심지한은 횡성의 깊은 골짜기로 옮겨 들어갔다.

1624년(29세)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인조 2년(1624)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629년(34세)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를 지냈다. 그때 여러 사람들의 논쟁이 매우 시끄러웠으므로 심지한이 의론을 주도한 사람을 탄핵하여 파직되도록 하였다. 추천으로 주서가 되었다가 설서를 거쳐 마침내 사국(史局)에 들어가서 한림이 되었다. 그러자 공의(公議)에서 비로소 공을 인정하였다.

그 뒤 사서(司書), 정언(正言), 부수찬(副修撰), 지평(持平) 등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39세) 병자호란 전에 청나라와 절교하고 자강책(自强策)을 강구하여 대비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청나라에서 황제의 존호를 참칭하며 사신을 보내 왔고, 또 변괴가 더욱 심하였다. 심지한이 청하기를 “오랑캐와의 국교를 끊고 자강책(自强策)을 쓰며 자신에게 허물을 돌려 계획을 바꾸는 태묘(太廟)에 상고(上告)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켜 사기(士氣)를 진작(振作)시켜야 합니다.” 했다. 또 말하기를 “장수(將帥)를 잘 선발하고 군율(軍律)을 엄하게 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했다. 태인 현감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만났다.

1640(43세) 평창 군수가 되었으나, 태인 현감 때 사건으로 체직되었다. 앞서 심지한이 태인 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순찰사가 병사를 이끌고 관아에 들어와서 불러다가 종사관으로 삼고 군량의 운송을 감독하도록 했다. 호란이 진정되자 태인 현의 아전들이 행한 일을 문제 삼아 관직을 삭탈했다. 서용되어 종묘서 영(宗廟署令)이 되었다가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나갔으나 태인 현감으로 있었던 때의 일에 연루되어 파직 되었다.

1647년(48세) 부교리(副校理), 교리, 겸찬독(兼贊讀) 등의 요직을 거쳤다.

1650년(52세) 효종 1년 응교(應敎)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사간(司諫)으로 있을 때 인조가 승하했다. 염습을 할 때에 대신과 예관들이 모두 들어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심지한이 담당 장관과 더불어 옳지 못하다고 말하자 그대로 따랐다. 효종이 즉위하자 서울과 지방이 모두 바람을 맞은 것처럼 어수선했는데, 새로운 교화(敎化)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차자(箚子)를 올려 ‘뜻을 세우고 선(善)을 취하여 기강을 떨쳐 일으켜 조정을 바로잡을 것’을 청했다.

1653년(55세) 홍처후(洪處厚)와 함께 서경(書經)의 「무일편(無逸篇)」과 시경(詩經)의 「칠월편(七月篇)」을 베껴 병풍으로 만들어 왕에게 바쳐 효종의 총애를 입었다. 이어 승지가 되었다. 호조·병조·공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연안부사로 있다가 고향에 돌아가 59세에 죽었다.

심지한은 특히 『주역』 등을 즐겼다. 『시경』·『서경』·『대학』·『주례』의 골자를 따서 『사도(四圖)』를 편찬하고, 효종에게 바쳐 상으로 호피(虎皮)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 『창주집(滄洲集)』이 있다.

송시열이 지은 비명에서 일화와 위인을 소개했다. 전재하면 대략 이렇다.

“공은 온화하고 넉넉하였으며 침착하고 조용하였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아니했으나 대의(大義)에 관계되면 분발하여 바로 앞에 나아가고 덮어두지 않았다.

어버이가 병들었을 때 기도하면 번번이 하늘의 보응이 있었으며, 고유(孤幼)한 두 아우를 돌보며 기를 때에는 그 은혜와 사랑을 다했었고, 분가(分家)할 때는 특별히 그 소매(少妹)에 후히 주며 말하기를, “이는 어버이께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신 바이다.”라고 하였다.

임금을 사랑하는 한결같은 생각이 늙음에 이르러서는 더욱 돈독하여 위로 임금의 궐실(闕失)에서부터 아래로 백성들의 질고(疾苦)에까지 미쳐 지극히 말하고 힘써 논하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대학(大學)≫ㆍ≪주례(周禮)≫ 가운데 중요한 말을 뽑아 네 개의 도설(圖說)을 만들어 올리자, 효종은 매우 칭찬하고 장려하였다. 그 그림을 늘 벽에 걸어 두고 버려 두지 않은 채 살펴보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다.”라고 하며 특별히 호피(虎皮) 한 장을 상으로 내렸다. 공이 나중에 여강(驪江)가에 정자를 지으면서 ‘일호(一虎)’라는 현판을 걸었다. 아! 이것으로도 그 임금과 신하 사이의 정리를 볼 수 있다.

공이 지방의 수령으로 나가서는 명성을 얻는 데 노력하지 아니 하였어도 그곳을 떠난 다음에는 백성들이 반드시 추모하였으며, 공은 늘 터럭 하나라도 자손을 위해서 도모하지 않았으므로 자손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갈 곳이 없게 되자 사람들이 혹시 그것을 말하면 공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내 요량컨대 재주가 짧아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참고 문헌>

국역 국조인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