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담 서경덕과 황진이


화담 서경덕과 황진이

 

도삼절

민간에 널리 전해진 ‘송도삼절(松都三絶)’에는 서화담·박연폭포·황진이가 있는데, 사실 이것은 황진이 자신이 꼽았다고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30년 동안 수도했다는 개성의 유명한 고승 지족선사(知足禪師)는 그녀의 유혹에 넘어 왔지만,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 1489~1546)은 온갖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았다나? 사실 황진이는 그렇게 얄궂은 인물은 아닌 것 같다. 나름의 고결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이 외에도 전래동화나 설화에 보면 화담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도술(道術)을 부려 시집가려는 신부를 호랑이로부터 살려 준 이야기, 지리산에 올라 신선과 서로 대화하는 기록 등이 있다. 모두 선생의 행적과 관계있다.
과연 선생은 어떤 사람일까? 『대동야승(大東野乘)』 속의 기록을 더듬으면, 그에 대한 면모를 어느 정도 자세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벼슬도 마다한 궁핍한 삶
조선 중기 이덕형(李德馨 : 1561~1613)이 기록한 『송도기이(松都記異)』를 보면 서경덕은 송도(松都 : 개성) 사람으로 여러 대에 걸쳐 가문이 변변치 못하여 집이 본래 가난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덕을 숨기고 곤궁함을 편안히 여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이 다 그를 공경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일찍이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으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영리해서 보통 아이와는 크게 달랐고, 자라면서 스스로 글 읽는 것을 알아 눈 가는대로 금방 외었으며, 넓게 책을 보고 많이 기억했다고 전한다. 차천로(車天輅 : 1556 ~ 1615. 그의 부친 車軾이 선생의 문인)가 쓴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에는 양식이 자주 떨어졌고, 항상 담식(淡食 : 채소 위주의 소박한 상차림)을 하였고, 누가 어쩌다 고기나 생선을 보내와도 먹지 않았으나, 다만 말린 밴댕이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그의 자질에 대해 신흠(申欽 : 1566~1628)이 쓴 『상촌잡록象村雜錄』에는 선생의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났으며 시골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고, 중국에 태어나서 큰 학자나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 높고 명철함이 지금의 조예에 그칠 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조선 중기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면 선생의 삶에 대한 기록이 상세히 보인다. 허봉은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형이고, 그의 아버지 허엽(許曄)은 선생의 문인이다. 그러니까 허봉의 이 기록도 앞의 차천로의 그것과 함께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앞의 이덕형의 기록처럼 집이 가난하여 때로는 며칠 동안 밥을 짓지 못하여서, 안자(顔子)의 가난에 비교할 정도로 항상 태연하였다고 한다. 안자는 공자의 수제자로서 가난하여도 학문의 즐거움을 잊지 않았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율곡 이이(李珥)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는 그가 전혀 생업에 몰두 하지 않아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굶주림을 참았고, 남들은 이것을 견딜 수 없었으나 그는 태연히 지나곤 하였으며, 그 문하생 강문우(姜文佑)가 쌀을 지고 부엌으로 가 그 집 사람에게 물으니, 어제부터 양식이 없어 불을 못 피웠다고 전한다.
현대 문화와 생활 속에서 생업에 힘쓰지 않아 가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가장은 학문은 고사하고 대의를 위해 싸우더라도 가정적으로나 사회적 평판으로부터 결코 환영받을 일이 못되고, 혹 그런 사람이 있으면 차라리 가정을 갖지 않도록 권하는데, 그래도 당시는 사회나 문화적 풍토가 학문이나 그 밖의 무엇을 위해 뜻을 이루려는 선비의 이런 행태를 용인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어려워도 그는 호구지책만을 위해서라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앞의 이이의 말에 따르면 젊어서 과거의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곧 뜻을 버리고 화담에 집을 짓고, 오로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을 일삼아 어떤 때는 여러 날을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이덕형의 기록에서도 선생은 처음에 사마시에 합격했고, 태학(太學)에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가난하지만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한 까닭이 무엇일까? 퇴계나 율곡처럼 벼슬하면서 학문을 이룬 사람들도 있지만,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매진한 특별한 이유나 시대적 배경이 있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경우도 그렇지만, 그의 시대에는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사화(士禍)가 있어서 뜻있는 선비들이 벼슬길에 나아가면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고, 또 그런 식으로 정치 투쟁에서 승리한 인물들이 정권을 잡은 조정에 머리를 조아리며 발을 들여 놓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 참여하는 것이 치욕이 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처럼 나름의 출처관(出處觀 : 벼슬길에 나가고 물러나는 대 대한 어떤 원칙)이 뚜렷했다고 하겠다.

사물 탐구를 학문의 출발로 삼다
선생이 학문을 시작한 일에 대해 허봉의 기록에는 그가 총명하고 강하며 굳세어, 남보다 뛰어난 자질이 있었고, 18세에 처음으로 『대학』을 배웠는데, 문을 닫고 꿇어앉아 오로지 사물의 이치 탐구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대학’이란 학교 이름이면서 동시에 책 이름이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경우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이나 성균관(成均館)이니 하는 것이 대학으로 해당 국가의 최고 교육 기관이다. 물론 그 연원은 고대 중국의 제도에서 비롯한다. 그 대학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 유교 경전의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인 『대학』이다.
『대학』에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라는 8가지 실천해야 할 일이 등장하는데, 그 맨 앞에 등장하는 것이 격물이다. 격물이란 쉽게 말해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행위이다. 그것을 통해 앎을 이루는 것이 치지(致知)이다. 보통 ‘격치’ 곧 ‘격물치지’라 함은 바로 사물을 연구하여 앎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훗날 개화기 때 서양의 자연 과학을 수입하면서 ‘격치학(格致學)’이라고도 불렀는데,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아무튼 『대학』 공부는 ‘격치’부터 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다. 허봉의 말에 따르면 그는 사물의 이치를 연구할 때에, 그 이름을 일일이 적어 벽에 붙이고, 차례로 연구한 뒤에 그 사물을 해설하였다고 한다. 한 물건을 생각하다가 끝내지 못한 채 화장실이라도 가면 거기서도 마음을 다하여 생각하고 멈추지 아니하고 한참 뒤에 그대로 일어났다고 전한다. 게다가 3년 동안 힘들게 공부하여, 여러 날 동안이나 낮에는 식사를 잊고 밤에는 자는 것을 잊으며, 문을 닫고 판자 위에 꿇어앉아서 깔고 덮지도 아니하다가, 몸의 기혈(氣血)이 막혀 통하지 않아서 소리를 들을 적마다 놀라게 되었다고 한다.
또 『석담일기』에는 선생이 연구할 때 하늘의 이치를 알려면 ‘天’ 자를 벽에다 써놓고 궁리한 뒤에는 다시 다른 글자를 써두고 궁리하였으며, 그 세밀한 생각과 힘찬 연구는 남이 따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여러 해가 지나니 도리가 환하게 밝아졌고, 그의 학문은 독서에만 전념하지 않고 오로지 생각으로만 탐색하다가 이치를 안 뒤에 다시 독서하여 이것을 증명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내가 스승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힘과 노력을 깊이 쏟아야 하였다. 뒷사람들이 내 말에 의지한다면 힘과 노력을 나같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을 보면 선생은 특별한 스승 없이 스스로 연구하며 독서하여 자신의 학문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18세에 『대학』을 읽기 시작했으니 보통의 선비들보다 상당히 늦은 때였다. 그러나 늦다고 학문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늦게 시작해도 탐구하는 열의가 있고 사고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당시 큰 스승으로 알려진 이황·조식·이이 등이 대체로 이름 있는 스승 없이 공부했다는 점이다. 특별한 스승의 학문을 답습하거나 모방하는 것보다 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학문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창의성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오래 뒤에 유교 경전을 취하여 읽는데, 마음속으로 깨달음이 있고 이에 더욱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자신의 공부를 성리학으로 자임하였고 더욱 『주역(周易)』에 연구가 깊었으므로, 제자가 되어 배우기를 구하는 자가 문에 끊어지지 않았다고 허봉은 전한다.

문하생이 된 황진이
세인들이 선생을 말할 때 실과 바늘처럼 등장하는 인물이 황진이(黃眞伊)이다. 이참에 그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의 오해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겠다. 이 기록은 『송도기이』에 보이는데, 기록자는 황진이의 친척이 되는 80세 노인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그는 생전에 그녀를 볼 수 있었으므로 세간에 떠도는 소문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는 기록일 수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황진이는 송도의 기생으로 그의 어머니 현금(玄琴)이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뛰어나고 노래도 아주 잘 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라고 불렀다. 진이가 비록 기생으로 있기는 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비록 관청의 술자리가 있더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잡배들에게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문자를 꽤 많이 알아서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화담 선생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 뵈니, 선생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했다. 어찌 절세의 명기(名妓)가 아니랴?”

이상은 이덕형이 황진이에 대해서 들은 기록의 요약이다. 내용을 보면 황진이는 비록 직업상 기생이기는 해도 몸가짐이 단아했음을 알 수 있다. 화장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을 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화려하게 치장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테고 그렇게 하려면 돈 많은 사내의 요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게다가 수령이나 관리들이 막무가내로 수청을 들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던 것을 보면, 그녀는 관기(官妓)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를 보면 황진이는 잔치나 모임에 흥을 돋우는 품격 있는 연예인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세간의 풍문처럼 황진이가 정말로 선생을 유혹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흠모하여 문하생으로서 배움을 청했고 선생도 그것을 허락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하찮은 기생이라면 이런 재미없고 꼿꼿한 도학자를 흠모할 까닭이 없다.
선생은 관작이나 녹봉을 탐하여 마음에도 없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고, 황진이의 예를 보아도 여색을 탐하지 않은 성품을 알 수 있다. 만약 황진이가 값싼 기생이었다면 제자로 받아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선생의 인품은 남달랐다고 전한다. 또 『송도기이』에 보면 황해도 관찰사 가운데 화담 선생과 서로 아는 자가 있었는데, 선생에게 한 번 들르기를 청하므로 선생이 손님이 되어 갔다고 한다. 관찰사는 사우(師友 :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의 예법으로 대접하였다.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즐겼는데 선생이 취한 뒤에 일어나 춤을 추니, 사람들이 신선으로 여겼다. 하루를 지내고 즉시 돌아오는데, 관찰사가 많은 노자와 종이와 붓을 드렸으나, 선생은 모두 받지 않고 단지 쌀 다섯 되만 받았을 뿐이라고 전한다. 선생은 비록 친한 사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분에 넘치는 선물을 받는 것을 사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기록에
“퇴계 선생의 문집에 ‘서화담이 만월대(滿月臺)에 올라갔는데 어떤 손님이 율무로 쑨 죽을 올렸더니, 화담은 이것을 마시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일찍이 의아하게 여겼다.”
라는 말이 보인다. 이덕형은 선생이 율무죽을 먹고 춤을 춘 것이 생뚱맞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비교적 신빙성이 있는 허봉의 기록에는
“화담은 산수가 좋은 곳을 만나면 문득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라고 하여, 바로 여기서 춤을 춘 까닭을 알 수 있다. 죽 때문이 아니라 만월대의 경치에 취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좋은 산수를 보고 춤을 춘다는 것은 천성의 적극적 발로이다. 좋은 산수를 보면 누구나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던가?

조선 기론의 선구자
앞의 『대학』의 격물을 놓고 사물을 탐구했다는 점은 경전에 천착하기보다 실제 사물에서 이치를 찾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점은 그의 학문의 출발이 무엇이며 앞으로 그의 학문의 방향을 암시하는 사례가 된다.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초고』에 나무를 깎아 선기옥형(璿璣玉衡 : 천문 관측기구)을 만들었다는 일이나, 『석담일기』에서 임금이 서경덕의 저서를 보고
“기수(氣數 : 사물이 변화하는 주기 또는 절기)를 논의한 것이 많고 수신(修身)에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수리학(數理學 : 수로서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그리고 그 공부가 의심나는 데가 많다.”
라고 평가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학문의 출발은 유교 경전을 통해 윤리적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생이 순수한 성리학자인지 의심하는 기록들이 있다. 가령 『석담일기』에 중종 말년에 서경덕이 도학(道學)으로 당시에 유명하였는데, 그의 이론에 기를 리라고 여긴 것이 많아서 이황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겨 글로써 옳고 그름을 가려 반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홍명(鄭弘溟 : 1582~1650, 鄭澈의 아들)의 『기옹만필(畸翁漫筆)』에 율곡 선생이 화담 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말할 때에는 기를 리로 아는 병폐가 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선생의 학문이 정통 성리학에서 약간 벗어나는 기 중심의 학문이라 하겠다. 어찌 보면 퇴계 이황의 학문도 정통 성리학에서 보면 지나치게 리 중심의 학문이라 평가되는데, 이는 각자의 학문과 상대방의 그것 사이의 차이점을 두고 그렇게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입장에서 보면 어떤 학문을 두고 정통 따위의 시비를 가리는 것이 해당 학자의 독창성을 말살하는 우스운 일이겠으나, 성리학을 이념의 도구로 삼았던 조선 시대나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유럽에서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해 두자.
그런 분위기 때문인지 유학자로서 그의 명성에 흠이 될지 몰라 선생의 문인 또는 그 후인이 기록한 자료, 가령 『오산설림초고』에는 선생이 저자의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학문에 유(儒)가 가장 어렵고, 불(佛)이 다음이고, 선(仙)이 가장 아래이다.”
라는 글이 보이고, 또 이덕형의 글에도 선생이 지리산에 갔을 때 어떤 신선을 만나
“신선 황백(黃白)의 술법은 비록 혹 전하지만, 유자(儒者)는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나는 공자를 배우는 자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쨌든 선생은 유학자이고 성리학에서 말하는 윤리적 가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조선철학사에서 기론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전개한 인물임은 확실하다.

서경덕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인가?
선생이 오늘날 우리에게 학문적 관심 이외에 던지는 메시지가 또 있을까? 더구나 전통 학문으로서 성리학이나 기론은 이제 더 이상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그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빛을 던지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선생의 삶을 단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시가 하나 있다. 『상촌잡록』에 보인다.

글 읽던 당일에 나라 경륜에 뜻을 두었지만(讀書當日志經綸)
늘그막에 되레 안씨(顔氏 : 공자의 제자)의 가난을 달게 여기네(歲暮還甘顔氏貧)
부귀에는 다툼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富貴有爭難下手)
산림에 숨어 사는 일이야 금하지 않으니 편안할 수 있네(林泉無禁可安身)
나물 캐고 낚시하여 배 채울 만 하고(採山釣水堪充腹)
달과 바람을 노래하면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데 족하다(詠月吟風足暢神)
학문이란 변절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야 참으로 쾌활하니(學到不移眞快活)
백년을 헛되게 사는 인생을 면하리라(免敎虛作百年人)

백 년을 살까말까 한 우리 인생이 어디에 힘써야 할까? 아무리 삶이 선택의 연속이라고는 하지만, 후회 없이 살려면 나름의 가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부귀영화와 권세는 배우지 않아도 경쟁하며 찾지만, 선생처럼 인생을 걸고 즐기고 편안할 수 있는 길은 탐구해야만 찾을 수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