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와 이상 사회


정암 조광조와 이상 사회

 

상 사회

현실의 부조리가 심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보통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미륵이나 구천상제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었던 민중 종교만이 아니라, 기성 종교 가운데서도 종말론적 교파가 등장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왕조 말기에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신라 말 궁예의 등장도 그랬고, 구한말 한국 신종교의 출현도 그와 관련이 있다.
이런 종교적 신앙과 별개로 현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실망에서 새로운 사회를 이론적으로 꿈꾸기도 했다.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론과 플라톤의 국가론을 비롯하여 유토피아를 주제로 한 각종 소설과 담론은 현실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음을 반증한다. 20세기 소련과 동구에서 실험했던 공산주의도 적어도 그 출발은 노동자로 구성된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지향했다.
동아시아에도 일찍이 이상 사회의 담론이 있었다. 『예기』 「예운」편에 등장하는 대동사회(大同社會)는 살기 좋았던 때로 묘사하고 있고, 전설적 제왕인 요순(堯舜)이 다스리던 시대를 이상 사회로 믿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가 경전에서 그렇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 유학자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동아시아 역사·철학의 담론에서 이상 사회의 모델이 되었으며, 복고적 가치관이 지배하게 되었다.
조선 중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 1482~1519)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 이상 사회의 정치 모델로 생각한 것도 바로 요순시대의 그것이었다. 이는 유학자 특히 성리학자들이 유가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도통(道統)의 시작을 요순으로부터 이어진다고 보는 생각과 일치한다.
여기서 어떤 유토피아 사상도 그렇지만 선생의 이상 정치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또 유가의 이상적 이념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을까? 곧 정치 행위란 사회의 갈등을 조정하고 자산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데 있어서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을 이끌어 내는 일이라고 소박하게 정의해볼 때, 선생의 개혁 정치의 실패 원인과 한계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훗날 문묘에 배향되고 선비의 표상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지치주의로 이상 사회 건설
안로(安璐)가 1638년에 쓴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따로 「조정암전(趙靜庵傳)」이 있는데, 우부승지 박세희(朴世熹)의 입을 빌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광조는 젊어서 김굉필에게 배웠고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깨닫고 분발하였다. 도학(道學)에 침잠하여 경전의 문구(文句)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으며, 의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는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고, 젊어서부터 큰 뜻이 있어 널리 배우고 힘껏 행하였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남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고 도에서도 이탈하지 않았으니, 사림이 다 추중(推重)하였다. 국가가 중흥할 운수를 당해서 조야에서 유신하기를 바랐다. 까닭에 공은 홀로 침착하게 건의하여 선왕의 법도를 회복하도록 청하였다. 아는 것은 임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말하면 임금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전한다.
요약하면 선생은 도학에 뜻을 두었고, 젊어서부터 선비들로부터 추앙을 받았고, 국가의 유신 곧 개혁을 추진했고 그 모델과 방법은 선왕의 법도를 회복하는 일이었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그가 실각하지 전까지의 행적과 일치한다. 실제로 그는 출사하기 전부터 산림의 영수(領袖)로 추앙을 받았다.
그의 학문의 성격에 대해서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서는 선생이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을 하지 않았고, 『소학』을 독신하고 유학을 일으키며, 임금과 백성을 요순의 임금과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과거 시험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그가 공부한 도학으로 중종을 요순임금처럼, 백성들을 그 시대의 백성들처럼 유학의 법도에 잘 맞게 만들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회복하고자 한 ‘선왕의 법도’는 곧 요순시대의 법도 또는 그런 모델에 가까운 성왕(聖王)들의 법도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도학’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이이(李珥 : 1536~1584)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는 도학과 선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학이란 이름이 예전엔 없었다. … 이치를 궁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도(道)를 기준으로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을 도학이라 지목하게 되었던 것이니, 도학이라 이름을 세운 것은 말세의 부득이한 일이다. … 세속이 더욱 저급해져서 경서나 읽고 저술이나 하는 사람이면 도학자로 부르지만, 그 심성(心性)의 공부나 세상에 드는 큰 절개에는 생각해 줄 수 없는 점이 있으니 더욱 세도가 변했음을 알 수 있다. … 그는 조정에 서서 오로지 도를 행하려 힘써서 삼대(三代)의 도가 아니면 결코 임금 앞에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러므로 그가 도학자(道學者)란 이름을 얻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도학이란 쉽게 말해 유교적 성인(聖人)이 되는 학문을 말한다. 앞의 인용에서 자신의 임금을 요순처럼 만든다는 것이니, ‘내면적으로는 성인이요 겉으로는 왕’인 내성외왕(內聖外王)이 되는 학문이다. 신하의 입장에서도 비록 왕은 아니지만 내면으로는 성인이요 외면으로는 그런 왕을 돕는 자가 되는 일이다. 이 또한 유학의 본령이 ‘자기 몸을 수양하여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정신의 발로이다. 그렇게 되려면 이치를 탐구하여 심성을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도학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의 결과를 ‘지치(至治)’라고 불렀다. 곧 중국 고대의 하(夏)·은(殷)·주(周) 삼대 정치를 이상으로 달리 말하면 요순시대처럼 잘 다스려지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석담일기』에 선생은 경연(經筵)에서 매양 도덕을 숭상하여 인심 바로잡고 성현을 본받아 지치를 일으켜야 한다는 논설을 반복하여 아뢰니, 그 말하는 뜻이 간절하였다고 전한다. 이 말을 분석해 보면, 지치를 일으키는 기본 전제로서 ‘도덕을 숭상하고 인심을 바로잡는 일’이 선행되어함을 말하고 있다. 곧 수기(修己)가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지치주의는 무엇보다 통치자의 도덕성이 그 전제로서 가장 우선되는 정치이다. 통치자의 도덕성이 정치 현장이나 민생에 직접 연결 될지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이 됨은 분명하다. 유교적 도덕과 근본이념이 잘 발휘된 이상 사회가 지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다스리는 도리에 대하여 개진하면서 성(性)과 정(情), 선과 악, 의(義)와 이(利)의 분별에서부터 천(天)과 인(人), 왕도와 패도, 옳음과 사악함의 구분에 이르기까지 잡아내어 벌려놓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해동잡록』은 전하는데, 자세히 보면 모두 선악이라는 어떤 이분법적 잣대로서 정치 행위에 임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당시 연산군의 폐정에 따른 시대적 배경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진단이라 하더라도, 정치 현장에서 이런 이분법적 구분은 통합에 매우 좋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결과적으로 선생의 이상 사회를 지향하는 개혁 정치는 그가 모함을 받아 실각함으로써 좌절되었다. 그의 개혁 정치 실패의 원인에 대해서 현대 학자들의 연구도 많이 축적되어 있지만, 그가 살았던 직후의 후학들에 의해서 지적되기도 하였다. 『석담일기』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체로 선생의 학문이 숙성되지 않았고 개혁이 급진적이었다고 한다. 곧 학문이 미처 크게 이루기 전에 벼슬길에 나왔고, 현량과 설치 이후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섞이어 조정에 진출하게 되어 논의가 대단히 날카로워지고 일을 수행하는 것이 급진적이었다는 점이다.
또 안로(安璐)가 1638년에 쓴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서도 박세희(朴世熹)의 입을 빌어 나중에 진출한 여러 선비들은 기세가 날카로워서,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점진적 개혁이 없었으므로 험한 세정(世情)에 저촉되어 인심이 크게 어그러졌다고 하여,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인심을 크게 잃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개혁의 당위성을 앞세우면서 같은 당내에서도 급진파의 입김이 세지면, 인심을 잃어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점은 현대 정치에서도 자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대동야승』의 여러 자료에서는 개혁의 진행에서 사람을 질리게 하여 인심을 잃은 경우를 소개하고 있다. 예컨대 도교 사원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일에 있어서도 『기묘록보유』에서 기록하기를 임금의 허락하지 않자 새벽닭이 울 때까지 주청을 하니 임금이 부득이 윤허하고,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승지들은 모두 책상에 기대서 졸았으니 모두 염증과 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는 것은 반드시 충성과 착한 도로써 임금의 마음과 맺고, 임금의 마음이 트인 곳으로부터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토록 핍박하고도 무사한 자가 있을 수 없다고 다소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개혁을 위해 주변의 신하는 물론 왕까지 질리게 만들어 인심을 잃게 했다는 지적이다. 아무리 당위성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이러하다면 인심을 얻기 어렵다. 또 거기서 전하기를 군자가 임금을 섬기는 데는 당연한 도리로써 인도하고 지성(至誠)으로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는 데 힘쓸 뿐이니, 어찌 딴 짓을 헤아릴 것인가 하고, 만약 임금이 듣기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헤아리고 후일을 기다린다면, 어찌 군자가 임금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기에 급한 마음으로 할 것인가 하고 비판적인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인심을 잃은 사례는 또 있다. 작자 미상인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에 선생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 선생이 이욕(利欲)이란 사람이 빠지기 쉬운 것이요, 국가의 병폐의 근원도 이 이(利)의 근원에 있다고 하여, 중종반정 때에 공이 없어 허위로 공신이 된 사람을 공적을 삭제하여 그 욕심을 징계하기를 청한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선생이 끝내 이것도 관철시켰다고 한다. 물론 선생의 이런 주장은 명분상 옳다. 그러나 명분이 옳다고 해서 모두 진정으로 수긍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실제로는 이성보다 감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명분은 또 다른 명분으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선생이 실각한 명분도 있다. 물론 이것은 선생을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민 자들의 명분이기도 하다. 『기묘록속집』에 선생에게 죄가 있다는 상소에 보인다.

“조광조가 서로 붕당을 만들어 자기에게 붙는 사람은 진급시키고 자기와 달리하는 사람은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가 등등하고, 권세와 요직을 모조리 차지하여 임금을 속이고 개인적인 행동만 하여 돌아보고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후진들을 유인하여 공정하지 못하고 과격한 것으로 습성을 만들어 젊은이로서 어른을 능멸하며 천한 자로서 귀한 사람을 무시하게 하여, 나라 형세가 뒤집어지고 조정의 정사를 날마다 해쳤습니다.”

요지는 선생이 편당을 지어 자기 사람으로 조정의 요직을 채우고, 과격하고 임금을 속이고 젊은이가 어른과 귀한 사람을 능멸하여 정치를 해쳤다는 명분이다. 물론 임금의 허락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젊은 사림을 등용과 급진적 개혁을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겠으나, 임금을 속이고 어른을 능멸한다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도덕적 이념의 잣대로 훈구대신들을 인간적으로 멀리 했음을 뜻한다. 선생을 선두로 훈구대신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한 모습은 여러 자료에도 보인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개혁의 주체가 그 대상이자 상대를 바라보는 시각이라 하겠다.
또 국방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령 『기묘록보유』에 이런 기록이 있다. 북방의 여진족이 국경을 넘어와 백성들을 약탈해 가자 조정에서는 불시에 군사를 풀어 덮치기로 논의했는데, 선생이 뒤늦게 나와서,
“이번 일은 바로 도둑과 같은 짓입니다. 기미를 엿보는 간사한 꾀는 왕다운 왕이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또한 당당한 큰 나라에서 요망한 오랑캐를 잡기 위해 도적과 같은 꾀를 행해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위엄을 손상하는 일을 신은 속으로 부끄러워합니다.”
라고 하자, 임금이 곧 다시 논의하도록 명하였다. 좌우에서 진언하기를,
“군사 전술에는 기습전과 정규전이 있고, 오랑캐를 제어하는 데에는 정상적인 전투보다 융통성 있는 전투가 있습니다. 여러 의논이 이미 같았는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전쟁마저도 선생은 선왕의 법, 곧 큰 천자의 나라가 오랑캐를 치거나 달래는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법의 현대적 적용에 대한 선생의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반대편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거나 현실에 어둡다는 명분을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래서 병조 판서 유담년(柳聃年)이 아뢰기를,
“밭가는 것은 농사짓는 노비에게 묻는 것이 당연하고, 베 짜는 일은 계집종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이 젊어서부터 북방에 출입하여서 오랑캐의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신의 말을 들을 것을 청합니다. 쓸모없는 선비의 말이 예로부터 이러한 바, 비록 이치에는 근사하나 다 따를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여러 논의를 물리치고, 그 지방으로 군사를 보내려던 것도 중지시켜 버렸다. 선생은 3품 관원인데 능히 한마디 말로써 임금의 뜻을 움직여 조정의 큰 논의를 바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는 기록에서도 선생이 인심을 잃음이 이러했다.
그러니까 지치주의의 이념으로 무장한 도덕 정치만으로는 인심을 얻는 것은 고사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한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어떤 이념이나 도덕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과거 공산주의가 철저하게 이념으로 무장하여도 결국 무너졌다. 율곡 이이가 『석담일기』에서 퇴계 이황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어 사람들이 대유(大儒)로 지목하고 어린 임금을 도와 태평을 이룩하기 바랐으나 스스로 경세제민의 재주가 없다고 했는데,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도학 이상의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더구나 도덕을 명분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또한 도덕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앞의 훈구대신들이 선생을 공격할 때도 편당을 짓고 요직을 독차지 하고 임금을 속이고 과격하고 어른을 능멸한다는 것이 그 점이다. 최근 우리나라 검찰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것을 반대하는 검찰이 법무부 장관의 도덕성 심지의 가족의 그것마저 이 잡듯이 수사하여 혐의를 들추어냄으로써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려고 하였다. 사실 도덕을 잣대로 상대를 공격하기는 매우 쉽지만, 똑같은 기준을 자기에게 들이대지는 않는다. 게다가 도덕성이 뛰어나다고 해서 반드시 유능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도덕은 정치를 성공시키기 위한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런 점을 선생의 개혁 정치가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하지만, 아무튼 선생은 끝내 중종임금마저도 설득하지 못했다. 들어주다가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상 사회를 꿈꾸는 선비의 표상
이상 사회를 지향하는 선생의 개혁은 좌절되었으나, 그렇다고 전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석담일기』에 일찍이 도학으로 군주에게 고한 사람은 없었는데, 오직 선생이 성리학으로 중종을 보필하여 세도가 거의 변화하려 하였다고 하여 도학이 선생으로부터 유래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배우는 이들이 이때에 이르러서야 성리학을 높일 만하고 왕도가 귀하며 패도가 천한 것을 알았으니, 그가 유학의 도리에 끼친 공로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그 의의를 밝혀, 유학이 지향해야 할 기준을 선생이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또 『기묘록보유』에서도

“조광조는 젊어서부터 도를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김굉필에게서 학업을 받았다. 김굉필의 학문은 김종직에게 배웠고, 김종직의 학문은 그 아비인 김숙자(金淑滋)에게서 전해 왔으며, 김숙자의 학문은 고려 신하였던 길재(吉再)한테서 전해 왔고, 길재의 학문은 정몽주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니, 실상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이다.”

라고 하여, 선생은 유학의 도통을 잇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훗날 문묘에 배향되어 조선 유학에 있어서 선생의 위상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상 사회를 꿈꾸는 선비의 표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옛 것만 파먹으면 그로써 충분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더구나 도덕으로 상대를 공격하기는 쉬워도 자신은 그렇게 되기 어려우며, 선악의 잣대를 가지고 갈등을 해소하고 자원을 잘 배분하는 정치는 쉽지 않다. 상대가 생각하는 선악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 못지않은 큰 정치력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