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와 홍의장군


임진왜란의 숨은 이야기와 홍의장군

 

본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나라는 드물다. 국외 여행을 다녀보면 각 나라마다 이웃 나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닌 국민들은 많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역사적으로 이웃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한 경험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다행이 과거의 역사를 진솔하게 사과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 영토 분쟁과 그에 따른 무력 충돌 또는 무역 갈등 등이 있다면 잘 지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이다. 그 갈등의 원인은 일본이 역사적으로 수차례 우리를 침략하였지만 전혀 사과하지 않고, 우리의 영토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며, 역사·인도적 차원의 문제를 두고 되레 무역 보복을 감행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이렇게 침략한 데는 일본인들 자신의 호전성과 정략적 필요에 근거하지만, 당한 우리에게는 외적을 제대로 막지 못한 책임도 따른다. 이와 관련해 임진왜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조경남(趙慶男 : 1570~1641)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귤광련을 아시나요?
귤광련(橘光連 : ?~1592)은 일명 강광(康光)이라 하는데, 일본식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대마도의 작은 추장으로 임진왜란 이전에 여러 차례 일본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었는데,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1590년 겐소(玄蘇) 등과 함께 조선을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조선 조정에
“일본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일본은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명나라를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라고 하였는데도, 우리 조정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귤광련이 조선을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에게 요시토시(義智) 등과 함께 전쟁의 선봉을 나누어 맡아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다.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는 뜻을 타인을 통해 알렸다.
“이번 출병에는 무슨 명분이 있는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이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라고 하자, 요시토시가 이 말을 히데요시에게 전하니, 그가 대노하여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듣고 행장을 버리고 이름을 바꾸고 도망가 숨어 살았다. 그 후 1606년 일본 왕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 박희근(朴希根)을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일본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사신들이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은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에 건립했다.

동래부사 송상현
우리는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한 송상현(宋象賢 : 1551~1592)의 이름은 잘 알지만, 전투 전후의 상세한 내막은 잘 모른다. 그 숨은 이야기는 이렇다.
동래성이 왜군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는구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
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노비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였다.
전투가 있던 날 새벽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두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놓았다. 그러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었다.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고, 이 때 많은 군사들이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관복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라고 하니, 왜적이 몹시 화를 내면서 그의 목 베려 할 때에도 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 죽이고 죽었다.”
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쪽 지방의 기생이었는데 그녀 또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송상현이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왜적들도 조선인 포로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일 장군과 신립 장군
남명 조식과 율곡 이이의 상소문에서는 당시 조선은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외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경고하고 있다. 특히 율곡의 상소와 대책을 보면 국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세히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개혁하지 못했고, 왜란이 생기자 수군과 일부 장수들을 제외한 관군과 그 지휘관들은 성을 비우고 무기를 버린 채 허둥대다가 도망갔고, 백성들은 우왕좌왕 놀라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는 율곡이 예측한 바이기도 하다.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고, 자기 몸을 청렴하게 하여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심지어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희 나라를 방어해서 어쩔 거냐? 20일이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정말로 그 말대로 되었다. 왜적이 한강을 건널 때의 일화도 있다.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광나루·마포·사평·동작 등에서 일시에 뗏목을 타고 마구 건너오자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어떤 아전이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 작은 가마)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라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올려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라고 하였고, 군사를 전진시켜 동·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혀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5일의 거리가 되었다.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조선이 건국한지 200년이 지나 폐단이 노출되어 개혁을 못한 정치가들의 책임도 크지만, 장수들의 자질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일(李鎰 : 1538~1601)과 신립(申砬 :1546~1592) 등이었다. 이들은 말을 타고 활로 북방의 여진족과 용맹스럽게 싸우면서 잔뼈가 굵은 장수였지만, 왜적들과 싸우는 데 있어서 정보와 방책에 어두웠다.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전한다.
순변사(巡邊使) 이일이 상주에 이르러도 척후(斥候)에 밝지 못했다. 그러자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보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 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이일이 대패하여 달아났다.
한편 신립은 곧장 달려 충주를 지나 조령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 타고 활쏘기가 불편할 것 같아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옛날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라고 하니, 신립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너는 싸움에 져 후퇴한 데다 또 군중이 놀라 떨게 만드니 군법으로는 목 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라고 하고, 마침내 충주의 달천(㺚川)에 주둔하였다.
신립의 종사관 김여물(金汝岉)이 이일의 말을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라고 말하고,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과 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라고 보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사들을 놀라게 했다고 화를 내어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관군의 정예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홍의장군 곽재우와 김수 그리고 선조
대한민국 중년 이상의 사람치고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 1552~1617)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의 전기가 예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이다. 당시 의병장은 대체로 벼슬 없는 선비로서, 자기 집안의 노비들을 거느리고 사재를 털고 주변의 선비들과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모았다. 특히 의병장 가운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들이 많았는데, 정인홍(鄭仁弘:1536~1623)을 비롯하여 김면(金沔: 1541~1593), 조종도(趙宗道 : 1537~1597) 등이 있으며,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였다.
곽재우는 32살 때 별시라는 과거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지만, 선조가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해 합격을 취소시켜버려서, 그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런 오해는 줄곧 임진왜란 동안 곽재우가 당시 경상도 감사 김수(金晬 : 1537~1615)와 갈등을 일으켰던 일, 그의 활약에 대한 선조의 반응과도 관련이 있을 듯싶다. 현장의 실전 상황과 원칙을 중시하여 불의와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미 때문이다. 이는 이순신도 그랬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 사람으로서 왜란 초기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도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만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어려운 형편을 돌보지 않는다.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고을을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라고 하고, 자기 재산을 전부 털어서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병사들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내주어 병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그의 전술은 대체로 잽싸게 출몰하는 게릴라전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뒤에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게 하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도보로 대략 40~60분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하여,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할 수 있어서,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재주가 뛰어나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병을 골라 요새에 잠복시키고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민가를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항상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왜적을 죽이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와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 하겠느냐? 만약 공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이런 곽재우도 모함을 당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감사 김수가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일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리는 바람에 그는 앞날을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었다. 곽재우가 모함을 당한 것은 그가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인 일이다. 그 때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미쳐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그 와중에 김수 등을 성토하자 그가 역심을 품었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일은 다행히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의 중재로 마무리되었지만, 그에 대한 선조의 눈길은 곱지 않았고, 훗날 선조는 곽재우의 공로뿐만 아니라 의병들의 활약을 전체적으로 각박하게 평가했다. 결국 곽재우는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되지 못했다. 전란이 끝난 뒤 그는 여러 벼슬을 주자 잠시 나갔지만 그만 두는 등 거기에 큰 뜻을 두지 않았고, 영산 창암(滄巖)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거하며 죽을 때가지 가난하게 살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임진왜란의 교훈은 나라가 누구를 위해 있어야 하는지 되묻게 해준다. 그나마 사대부들은 나은 대우를 받았기에 그 일부라도 의병을 일으켰지만, 평소에 하층민으로서 병역과 요역·납세 등의 의무만 졌던 가난한 백성들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들에도 여전히 전쟁이 나면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 묻게 만드는 좋은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