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동자 김굉필


소학동자 김굉필

 

끄러움을 모르는 사회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어 선진국의 대열에 명함을 내밀 위치에 왔다고 자찬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명암이 분명히 있다. 배고팠던 시절을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그 경이로움에 대한 자부심으로 그 때의 가치와 문화를 고수하며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겠지만, 일터를 잃거나 취업을 못해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하는 젊은이들은 세상이 바뀌기를 바랄 것이다.
이제 사적인 이익을 열심히 추구하는 일은 잘 사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모두의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전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후자는 생존을 위해서 그러하다. 그러다보니 법에 저촉 되는 일만 아니라면 이익 추구 앞에 도덕이나 윤리 따위는 무시 된지 오래이다. 이런 풍조는 우리 현대사가 알게 모르게 만들었고, 거기서 자란 후속 세대들은 사회로부터 배우고 본받을 게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점점 뻔뻔해지고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니,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자본주의의 고약한 최면에 걸려 남과 세상에 아첨해 돈을 벌려는 것이 일상이다. 사회생활이나 어떤 조직에서 도덕적인 사람이 바보 취급을 당한다는 일은 이제 초등학생들도 안다. 예의와 염치와 고상한 품위를 앞세웠던 교과서의 전통문화는 그저 시험 준비에 필요한 지식일 뿐이다.
이런 세상을 도덕적이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문화가 넘치는 사회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대의 문제를 고민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면 그것을 준비하는 선각자나 그를 따르는 세력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일은 조선 전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는 고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불교를 버리고 유교 이념으로 조선을 새롭게 이끌고자 하였으나, 그것에 실효성이 있는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시기였다. 바로 이 시점에서 그 이념의 구체적 규범과 사례를 몸소 실천하고 가르쳐,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 1454~1504)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이다.

조선의 성리학 정착과 『소학』
성리학(性理學)은 유학의 한 갈래이다. 중국 북송을 거쳐 남송 때 완성한 학문으로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유학의 정신을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학문으로, 달리 송학(宋學)·정주학(程朱學)이라 부른다. 특히 남송 때 그것을 완성한 주희(朱熹)의 학문을 따로 분리해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성리학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도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주자학이 고려 말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바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전히 불교문화와 도교의 그것이 사회의 저변을 이루고 있었다. 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왕실에서 불교를 믿기도 하고, 「훈민정음」을 실험해 본 것 가운데 하나도 불경의 번역이었으며, 중종 때까지도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사원인 소격서(昭格署)가 존재했다. 선생이 살았을 때만 해도 여전히 그 영향 아래 있었고, 백성들은 물론 선비들과 고위 관리들마저도 성리학적 가치관과 습속에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유학자들도 한나라 당나라 시대의 시문(詩文)을 익히는 문학에 치중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 김종직(金宗直) 또한 겉으로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을 표방하였으나 여전히 시문을 짓는 학문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 선생이 『소학』을 중시한 것은 성리학적 맥락이 있다. 허봉(許篈 : 1551~1588)의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보면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사(文詞 : 문학)를 업으로 하였으나, 성리학에 몰입하여 몸가짐을 예로써 하였고, 염락관민(濂洛關閩 : 성리학을 상징하는 말)의 계통을 찾은 이는 김굉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조선유학사를 강의할 때 흔히 조선 유학의 도통(道統)을 정몽주(鄭夢周)에서 길재(吉再)-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고 가르치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성리학적 이념이 조선에 정착하는 과정과도 일정한 맥락이 통한다. 길재 이하의 공통점은 모두 『소학』을 중시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사실 『소학』은 『대학』처럼 전해 오는 책이 없었다. 남송 때 주희가 자신의 감독 하에 제자를 시켜 편찬한 책으로, 유교 경전에 흩어져 있는 기초 교육으로서 필요한 내용들을 모았다. 이는 유학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하·은·주 삼대(三代) 교육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신서(修身書)이다. 『대학』이 이론적이고 이념적이라면 『소학』은 그것을 현실 생활에서 실천하는 규범과 그 사례로 이루어져 있어서,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경서를 읽을 때 『소학』을 어린 아이들이 읽는 것이라 치부하고 『대학』부터 읽었다고 한다. 주희는 『대학장구』를 지어 『대학』을 성리학으로 해설하였지만, 그런 성리학 이념이 생활에서 실행되도록 반영한 책이 바로 이 『소학』이다. 요즘말로 말하면 성리학 이념의 토대 위에 바른 습관 형성을 위한 도덕 교과서인 셈이다.
그런데 조선 초에 『소학』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선생이 강조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과 관련이 있다. 훗날 연산군 때 사화의 계기가 된 것도 『소학』의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마음속으로 인정하지 않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의 행적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초에 넣음으로써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이른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을 두고 조정에서 갈등을 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물론 『소학』에도 등장하는 이 가르침은 부귀영화라는 현실적 욕망과 충절(忠節)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두고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진정한 선비라면 당연히 선택해야만 했던 화두를 던진 사건이었다.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선생은 이런 부귀영화를 바라는 욕심, 곧 탐욕을 막으려면 작은 욕심부터 막아야 하는데, 그 실천적 규범과 사례가 바로 『소학』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줄곧 강조하였다.
선생은 교육을 통해 『소학』의 실천을 보급하려 하였고, 중종 때 제자 조광조(趙光祖)의 활약으로 『소학』이 정책적으로 중시되기는 했으나 그의 실각으로 위기가 있었고, 훗날 그가 복권되고 그의 제자인 김안국(金安國) 등의 활약으로 『소학』을 널리 유포하여 성리학적 이념이 생활에 침투되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명실 공히 주희의 성리학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그 폐단도 함께 노출하였다.

자칭 소학동자
선생은 21살 때 함양 군수로 있던 김종직을 스승으로 찾았다. 그 때 그에게서 『소학』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권별(權鼈 : ?~?)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선생은 김종직에게 『소학』을 배웠고, 이때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글을 읽어도 아직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였더니(業文猶未識天機)
『소학』책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小學書中悟昨非)
이것을 좇아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 다하리니(從此盡心供子職)
구차하게 좋은 옷 살찐 말을 부러워해 무엇 하리(區區何用羨輕肥)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김종직이 이를 평하기를,
“이 말은 곧 성인(聖人)이 되는 기초이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선생은 21살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고, 27살 때 생원시에 합격한 뒤로 출사를 위해 과거에 응한 기록은 없고, 40세가 되어서야 이극균(李克均)의 천거로 관직에 오른다. 그러니까 적어도 23년의 동안은 재야에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서당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해동잡록』에서는 일찍이 김종직을 따라 『소학』을 배웠는데 평생을 『소학』으로써 몸을 단속하였고, 성리학에 정통하여 이 학문을 일으키고 후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전하여, 선생이 스스로 수양하며 학생들을 가르쳤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 이 기록에는 선생은 후배를 가르쳐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고 한다.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소문을 듣고 모여 온 학생들이 집안에 차고, 날마다 경서를 가지고 당(堂)에 오르므로 자리가 좁아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또 그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서 『소학』으로 자신의 몸을 닦고 옛 성현을 법도로 삼아 후학을 불러다가 성심껏 쇄소(洒掃)의 예를 가르쳤으므로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은 이가 앞뒤로 가득하여 비방하는 의론이 일어나려 하였으나 그래도 그만두지 아니하였다고 전하여, 그것이 『소학』의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쇄소(물 뿌리고 비질하는 것)의 예’와 ‘육예(예절·음악·활쏘기·글쓰기·수레몰기·셈하기)의 학문’이란 고대 소학에서 가르쳤다는 내용으로 『소학』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생이 교육에만 전념했을까? 어떤 교육이든 교육자 자신이 주장하는 것을 몸소 체현해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가르침이 먹히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선생의 평소 몸가짐과 태도가 중요하게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선생은 평상시에도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띠고 있었으며, 닭이 울 때 일어나 종일 똑바로 앉아 학문을 닦고 익히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들도 일찍이 그의 게으른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또 김정(金淨 : 1486~1521)의 『기묘록별집(己卯錄別集)』에 기록된 상소에서는 선생의 행동에는 포용성이 있었고, 일처리에도 도량이 있었으며,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에 공경함이 없는 데가 없었고, 순순하게 지성으로 제자를 가르쳤고,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 여러 차례 환난을 겪었으나 고요하게 처신하였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독실하게 하여 죽을 때까지 해이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몸가짐은 선생이 귀양 가서 참형을 당한 순간에도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추고 낯빛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벗겨진 한 쪽 신을 도로 신고 손으로 그 수염을 손질하여 입에 물면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것까지 해를 받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동잡록』은 전한다. 죽을 때까지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소학』의 가르침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의 이런 삶을 살았기에,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평소에 누가 당시의 시사(時事)를 물었을 때 선생은 대뜸
“소학동자가 무엇을 알겠는가?”
라고 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로 칭했다고 한다. 사실 선생은 평생 『소학』만 공부하고 가르친 것은 아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30살이 넘어서 다른 책도 섭렵했다고 한다. 여기서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한 말의 배경은 두 가지로 상상할 수 있다. 하나는 정말로 『소학』에 몰두 하여 그렇게 칭했을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남들이 여태 『소학』만 공부하고 가르치는 ‘소학동자’의 노릇을 한다고 빈정대는 말을 받아서 할 수도 있다. 사실이 어떻든 선생이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소학』의 내용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친 것만은 분명했다.
사실 선생이 이 같은 도학군자가 된 것은 교육과 『소학』의 영향도 컸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선생은 어렸을 때 호탕하고 놀기 좋아하고 거리끼는 바가 없어, 거리나 시장에 돌아다니면서 도리에 어긋나는 모습을 모면 사람이나 시장의 물건 할 것 없이 막대기로 후려쳤다고 한다. 이렇게 과격했지만 교육과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사람이 좋게 변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 장본인이기도 하다. 아마 자신의 경험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선생은 교육을 통해 조용한 혁명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성리학의 가르침을 통해 부귀영화보다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도덕적 사회를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것도 지도자인 왕과 그 왕을 보좌하는 사대부들이 앞장서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함을 말한다. 선생이 가르친 내용은 사소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것이 체득되지 않으면 한없는 탐욕에 빠져들어 자신의 몸과 나라를 망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선생의 교육은 바로 이런 우려에서 출발하였다.

꿈의 좌절과 그 영향
교육과 실천을 통해 성리학의 실효성을 입증해 보이려는 선생의 학문 특징은 몸을 닦는 수기(修己)에 치중해 있다. 그럼으로써 조선 사회를 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이상 사회가 될 것이라 믿었다. 이것이 선생이 꿈꾸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꿈은 선생이 억울하게 죽음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실패는 이미 당시의 훈구파와 사림의 갈등 속에서 예고되어 있었다. 갈등은 언제나 그렇듯이 칼자루와 힘을 가지고 있는 보수파가 이기게 되어 있다. 무오·갑자사화는 겉보기에는 폭군 연산군의 일탈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신진사류와 훈구대신들의 오래된 갈등과 반목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이런 상황은 선조 중반까지 크고 작은 옥사(獄事)로 반복된다. 아니 지금도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선생은 사화에 직접 관련된 당자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연루된 것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사림의 정신적 지주였다는 점을 사화를 주동한 자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이념을 최전선에서 실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던 남효온(南孝溫)의 기록에 의하면 선생은 “『소학』으로 몸을 다스리고 성인을 표준으로 하고 후학을 불러 차근차근 잘 이끌어 가니 『소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앞뒤로 가득하였다. 그를 비방하는 논의가 앞뒤로 가득 하려고 하자, 정여창(鄭汝昌)은 그만 두도록 권하였으나 김굉필은 듣지 않았다.”라고 한다. 곧 『소학』의 내용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그 이념에 충실한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 훈구파들에게는 이미 눈에 가시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신진사류들은 틈만 나면 훈구파 대신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대신들은 신진사류가 버릇없다 한 반면, 신진사류는 대신들이 탐욕스럽고 덕이 없다는 것이 그 주요 동기였다. 그러니까 신진사류가 훈구대신들을 비판하는 무기가 바로 『소학』의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진보 진영의 인사들은 주로 도덕성을 가지고 보수 진영을 공격하지 않는가?
사실 선생도 그 스승이 출사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고 시로 비판한 적이 있다. 곧 성종 16년(1485)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되자 선생이 시를 보냈다. 남효온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전한다.

도는 겨울에 가죽옷 입고 여름에 얼음물을 마시는 것에도 있는데(道在冬裘夏飮氷)
비가 개면 가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만 온전히 능숙하겠습니까(霽行潦止豈全能)
난초 같은 이도 세속에 따라 마침내 변해야 하는 것이라면(蘭如從俗終當變)
이제 소가 밭 갈고 말이 탈만한 것임을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라고 하니 김종직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답장에서 성리학적 이념 실천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도 후배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 있고, 또한 시세에 아부하며 이해득실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우명행록』에는 두 사람이 시를 주고받고 ‘마침내 갈렸다’고 적었다. 이로 보면 선생의 학문 목표와 스승의 그것과 달랐다고 하겠다. 모르긴 해도 그의 스승은 『소학』을 수양하는 데만 활용하고, 학문은 시와 문장을 짓는 데 치중한 같다. 바로 선생의 이런 근본주의적 학문의 성격과 실천 태도 때문에 사화가 일어나기 전부터 훈구파에 의한 ‘요주의 인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생의 죽음으로써 꿈마저 좌절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제자 조광조가 수기(修己)의 차원을 넘어서서 치인(治人)의 단계에 적용하여 국가의 제도를 개혁하였고, 또 그것을 더 진행하다가 그도 좌절을 당해 그 일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이후 신지 사류가 대거 진출함으로써 명실 공히 성리학의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 사회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훗날 조선 사회가 이상 국가가 된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도덕적 이념만으로 세상을 이끌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을 추동하는 인간의 한계 때문이다. 다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이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해 그 실효성을 입증해내야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이 성리학이 지배하는 국가로 완전히 정착하는 데 선생의 공이 크다고 하겠다. 오늘날은 사회 변혁을 위해 어떤 이념과 그 실천이 필요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