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과 ‘나리’


성삼문과 ‘나리’

 

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과 굴욕

역사적으로 어떤 정권이 정통성이 없고 부당한가? 왕조 시대에 있을 법한 대표적인 것을 예로 들면 모시던 왕을 시해(弑害)하고 왕위를 찬탈한 정권, 곧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을 말한다. 반면 폭군인 왕을 몰아내고 새 왕을 세우는 일은 혁명(革命)이라 부르지 찬탈이라고 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말 그대로 하늘의 명이 다른 이에게 옮겨갔기에 하는 일이다. 『맹자』에는 혁명의 정당성을 매우 제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국가에서는 부정 선거나 쿠데타 또는 내란을 일으키고 민심을 선동하여 정권을 잡는 경우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찬탈이냐 혁명이냐를 규정하는 기준 자체는 민심의 향배에 의하여 좌우될 수밖에 없지만, 그마저도 집권 후의 정권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표면적으로는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현실적 논리에 따라, 지면 역모가 되고 이기면 혁명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억지 주장은 훗날 역사의 심판에 따른 단죄를 피해갈 수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춘추대의(春秋大義 : 공자가 『춘추』를 기록한 의리와 그 정신)’를 기준으로 역사를 평가하려는 전통이 강했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史觀)은 다양하다.
우리 역사에서 부당하다고 평가되는 정권은 여러 개 있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정권에 저항한 성삼문(成三問 : 1418~1456) 등은 멸문의 화를 당하고, 그에게 협조한 한명회(韓明澮) 같은 이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그의 조정에 출사해야 했던 대다수 선비들은 내적인 갈등을 겪으며 굴욕적 삶을 살았다.
이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고두고 조선 선비들이 저항이냐 굴욕이냐를 두고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되었다. 간신이 득세한 조정에서 또 일제 강점기 일제에 저항하느냐 협조하느냐 또는 호구지책을 위해 굴욕적으로 벼슬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이 상황의 연장이고, 광복 후 군사 독재 정권 아래에서 영달을 위해 협력하든지 아니면 굴욕적으로 묵인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비록 말단 공무원이라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적극 협조하는 자도 있고, 굴욕적이지만 생계 때문에 해당 정권에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행적은 단지 전근대적 충(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일정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사람의 의리란 어떤 것이며, 권력의 정당성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고, 더 나아가 일신의 영달과 공동체 질서 사이에서 어떤 위치에 서야할지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그의 삶과 행적을 통해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집현전의 학사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과 출신의 출중한 인재들을 모아 집현전 학사로 임용하였다. 20명의 학사를 두었는데 주로 왕과 세자의 학문을 위해 강의하거나 서적 편찬, 연구 등의 임무를 주었다. 근무 규정은 매우 엄격하여 일찍 출군하고 늦게 퇴근하는 방식이며, 아침과 저녁밥은 궁에서 제공했다고 한다. 또 숙직하는 인원을 두어 왕과 세자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학문상의 자문에 응할 수 있게 하였다.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따르면 이런 일도 있었다.

“문종이 동궁(왕세자)에 오래 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학문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달이 밝고 사람이 잠든 뒤면 간혹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와서 어려운 것을 물었다. 당시 성삼문 등은 숙직할 때에 밤이라도 감히 의관을 풀지 못하였다. 하루는 한밤중이 되어 세자(문종)가 오지 않을 줄 알고 옷을 벗고 자리에 누우려고 하다가 갑자기 문밖에 신발소리가 나며 성삼문을 부르면서 오니, 놀라 당황하여 얼떨결에 절할 정도였다. 학문에 대한 근면과 선비를 좋아하던 마음은 천고에 드문 일이었다.”

문종이 학문을 좋아하고 사적으로 성삼문과 친하게 지낸 사례는 허봉(許篈 : 1551~1588)이 기록한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에도 보인다. 문종과 집현전 학사와의 관계는 이것 외에도 많은데, 가령 심광세(沈光世 : 1577년~1624)의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신숙주(申叔舟)가 젊었을 때에 성삼문·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고, 옥당(玉堂 : 홍문관)에 있으면서 함께 문종의 탁고(托孤 : 어린 자식에 대한 부탁)의 분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문종은 집현전 출신의 학사들을 이렇게 의지하고 믿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학사들 가운데서 젊고 총명한 자를 엄선해서 장기간의 휴가를 주고 절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성삼문은 박팽년·신숙주·하위지(河緯地)·이석형(李石亨) 등과 함께 삼각산(북한산) 진관사에 가서 학문을 닦았다. 또 이들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런 노력 가운데 하나를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명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이 죄를 지어 요동(遼東)에 귀양 와 있었는데, 성삼문·신숙주로 하여금 북경으로 가는 사신을 따라가 요동에 가서 황찬을 보고 음운(音韻)을 질문하게 하였고, 그리하여 요동에 왕래하는 것이 열세 번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협력한 노력이기도 하지만 세종의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 신임은 『해동잡록』에서 성삼문이 국문장에서 신숙주에게 한 말에서도 보이는데,
“처음 그대와 집현전에 같이 있었을 때 세종께서 매일 왕손(단종)을 안고 집현전에 나와 산보를 즐기시면서 여러 학사들을 보고, ‘내가 죽은 뒤에 경들은 모름지기 이 애를 생각하라.’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그대 혼자 잊어버렸느냐?”
라고 한 말에서도 세종 또한 학사들을 얼마나 믿었는지 증언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집현전 학사 출신들에게는 자기들을 아끼고 믿어주었던 임금에 대해서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도덕적이고 이념적인 유교적 가르침을 떠나, 인간적인 관계에서 볼 때도 배반하기 참으로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성삼문과 수양대군의 정당성 논쟁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은 명분 가운데 하나는 국정을 농단하는 간신들의 무리로부터 왕권을 확립하고 이들로부터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좋게 말하면 왕권 강화였다. 실제로 단종은 어리고 김종서(金宗瑞)나 황보인(皇甫仁) 같은 신하들의 정치력이 컸으므로, 이들이 딴마음을 먹으면 왕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호사가나 일부 학자들은 개국 이래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부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에 따른 왕자의 난, 조광조의 개혁의 좌절 등도 그런 것이라 규정한다. 그래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은 왕권 강화를 위해 부득이한 조처라는 해석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이런 관점에서 중종과 선조 그리고 숙종 때의 사화나 수많은 정변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그것을 악용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 논리라면 왕권 강화에 따른 희생이 너무 컸으니 조선은 진작 망했어야 했다.
아무튼 성삼문과 수양대군의 논리 싸움은 단종 복위 운동이 김질(金礩)의 밀고로 실패로 끝난 뒤, 국문하는 현장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남효온(南孝溫)의 『육신전(六臣傳)』의 내용이 반영된 『해동잡록』과 권응인(權應仁 : ?~?)의 『역대요람(歷代要覽)』, 『동각잡기』 등을 참고하여 그 때의 대화를 재구성해 보았다.

수양대군 : (김질의 밀고대로 사실 여부를 따져 묻자)
성삼문 : 모두 사실이오.
수양대군 :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하는가?
성삼문 : 상왕이 한창 젊은데도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이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 : 중국 고대의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나라를 반석 위에 올린 사람)으로 자처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수양대군 : (발을 구르며) 내가 처음 왕위를 물려받을 때는 무엇 때문에 말리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의지하다가 지금에 와서 나를 배반하는 것인가?
성삼문 : 내가 처음 그렇게 못한 것은 형세 때문에 그리하였소. 처음에 죽으려고 했으나 헛되이 죽는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기 때문에 거사를 기다려 일의 결과를 노렸던 것이오.
수양대군 : 너는 신하라 말하지도 않고 나를 ‘나리’라 하는데,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내가 너를 병방(兵房) 승지에서 예방(禮房) 승지로 바꾼 것은 그 일을 잘하라고 한 것인데, 말은 상왕을 복위시키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성삼문 : 상왕이 계시는데 나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 말할 수 있소? 나는 사실 나리의 녹을 먹지 않았소. 만약 믿지 못하겠으면 나의 가산(家産)을 몰수하여 계산해 보시오. 나리의 말씀은 모두 허망된 것으로 쓸 데가 없소.
수양대군 : (크게 노하여)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찔러라.
성삼문 : (팔이 끊어져도 굴복하지 않고, 천천히) 나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수양대군 : (쇠가 식자) 다시 달구어 오너라.

이보다 먼저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일 당시 성삼문은 관리로서 궁에서 당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난공신으로 인정하여 칭호를 내려주고 녹을 주었던 것이다. 그 때 공신들은 돌아가면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성삼문만은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담당 승지로서 나라의 옥새를 그에게 넘길 때 실성통곡하자 수양대군은 그를 째려보았다고 전한다.
바로 여기서 수양대군의 논리는 성삼문은 이미 자신의 공신이 되어 녹을 받았고, 그가 옥새까지 전달해 왕위를 정당하게 물러 받았는데, 신하로서 왜 자기를 배신했냐는 것이다. 성삼문의 논리는 당시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고, 죽으려고 해도 단종 복위를 위해서는 의미가 없어서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가 세조를 ‘나리’라고 부르고 그의 녹을 먹지 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때까지도 세조를 왕으로 그리고 자신을 그의 신하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배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역대 조정의 논평 기피
성삼문 등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는 이후 조선 역사에 큰 파장을 남겼다. 이후 오랫동안 그 일을 입에 담을 수 없는 하나의 금기가 작동하였다. 왜냐하면 수양대군이 왕이 된 이후로 역대의 왕은 그의 후손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곧 그 때의 일을 부정적으로 입에 올리는 것은 자신이 섬기는 왕과 그 조상을 욕보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연산군 때 사화의 효시가 된 무오사화는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넣은 것이 발각됨으로써 일어났다. 그 때 이미 죽은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벌을 주면서 연산군이
“너희들이 누구의 조정에서 녹을 먹었느냐?”
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신진 사림은 어릴 때 『소학』을 읽고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이라 절의를 숭상하여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살았다. 김굉필이나 조광조 등이 성리학이나 도학을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도 바로 그런 이념을 실천하고자 한 일이다. 관련된 김종직의 일화도 이이(李珥 : 1536~1584)가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보인다. 곧 전에 김종직이 성종에게 아뢰기를,
“성삼문이 충신입니다.”
라고 하자 성종이 놀라 낯빛이 변하므로 종직이 천천히 아뢰기를,
“불행히 변고가 있으면 신이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라고 하니, 성종의 안색이 펴졌다고 전한다. 김종직은 성종의 성삼문이 되겠다는 임기응변으로 겨우 화를 면했지만, 실로 왕의 심기를 건드리는 불편한 발언이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선조 때에도 그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석담일기』에 따르면 당시 박계현(朴啓賢)이 경연 자리에서 성삼문의 충성을 말하면서,
“『육신전』은 남효온이 지은 것이니, 주상께서 보시면 자세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이 『육신전』을 보고는 놀라고 분하여 분부하기를,
“많은 말이 그릇되고 망령되게 조상을 욕하였으니, 내가 장차 조사하고 찾아내어 전부 불사르고, 또 그 전(傳)을 서로 이야기하는 자의 죄를 묻겠다.”
라고 하였다. 다행히 영의정 홍섬이 입시하였다가 육신의 충성을 극력 말했는데, 말이 심히 간절하여 모시는 신하들 가운데 눈물 흘리는 사람이 많으니, 임금이 감동되어 깨달아 그만두었다는 기록을 보면, 성삼문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하나의 금기였다.
이 일에 대해 율곡 이이는 사육신이 진실로 충절이 있는 선비이나, 지금은 말할 것이 아니다 하고, 『춘추』에 “나라를 위하여 악한 것을 숨긴다.”고 했으니 이것도 역시 고금의 공통된 도리로 보고, 박계현이 때에 맞지 않게 말을 경솔히 내어 선조가 지나친 명령을 내리게 할 뻔 했으니 어리석어 일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토록 도학을 부르짖던 그마저도 그런 금기 사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형국이었다.
사육신의 일은 두고두고 조선의 선비 사회에서 서로 눈치 보며 침묵하다가, 드디어 숙종 17년(1691)에 사육신의 관작이 복구되었고, 성삼문은 영조 34년(1758)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5세기의 일이 200여년이 지닌 17세기 끝에 해서 매듭지어진 일이다. 그때까지 일종의 원죄로서 선비들의 의식을 짓누른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에 대한 회한도 없지 않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하지만, 그 사건 결말에 대한 필연성과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사람 가운데 하나인 심정(沈貞)의 손자 심수경(沈守慶 : 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세조는 왕위를 노산(단종)에게서 물려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이라고 하니, 박팽년·성삼문·유성원·이개·하위지·유응부·김질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과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를 꾀하였다.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실패할 줄 알고 그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과 대신 김종서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을 정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당직으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이 되었다.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승지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과 선위할 때 실성통곡한 상황을 의심하고 조사하였다면 어찌 그가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현실에 어둡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에‘臣’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신 자를 쓰지 않은 그의 속마음을 조사하였다면 그가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박팽년의 처사도 물정에 어둡다고 할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어둡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이 글에는 단지 성삼문과 박팽년이 실정에 어두워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고 적고 있다. 이 글은 세조 정권의 탄생이 하늘의 뜻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그 실패의 책임도 그들이 치밀하지 못했다는 데 두었다. 이런 평가는 남효온의 소신 있는 기록과 달리 자기 검열의 결과일 수 있다.
이처럼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은 조선 역사에서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 세조 자신은 물론이요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부정한 일에 가담한 자들도 심판을 받지 않음으로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나쁜 사례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이후 수많은 사화를 일으켜 젊은 인재들을 죽인 장본인이나, 친일을 해서라도 일신의 영달을 꾀하고,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아부하고 출세한 자들이 심판받지 않고 계속해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