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재 김안국의 덕망과 우애


모재 김안국의 덕망과 우애

 

스로 불러들인 재앙

사람이 평생 살아가면서 겪는 재앙에는 천재지변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스스로 불러들인 경우가 많다. 그 원인에는 무지와 탐욕, 그리고 성격과 수양 부족 탓도 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라 여겨, 늘 수양하여 덕을 쌓아 혹여 만날 수 있는 재앙을 피하거나 또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재앙을 최소화하려고 하였다. 『주역』에서는 흉한 괘가 나와도 흉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계하고 수양하는 여부에 따라 흉하지 않게 하는 길이 있음도 알려준다.
오늘날의 재앙이라고 해봤자 경제적 손실과 사고 등이 다반사이지만, 조선 시대 사대부들에게는 정치적 재앙이 가장 무서운 것이어서, 잘못 엮이면 아무런 잘못도 없이 가족의 목숨까지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사대부들은 혹여 생길 줄 모르는 모함과 비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하여 수양하고 덕을 쌓으며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화를 당한 사건은 매우 빈번했고,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무오·갑자·기묘·을사사화만 큰 것이 아니라 이에 못지않은 사화도 부지기수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 1478~1543)은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기묘사화(1519) 때 조광조의 당류로 몰렸지만, 조광조·김식(金湜) 등이 죽음을 면치 못한 반면, 그는 파직을 당하는 선에서 목숨을 보전하고, 20년 뒤 다시 등용되어 재기하였다.
그의 삶이 재앙 속에서도 이렇게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덕을 쌓아 인간관계가 원만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는 이런 종류의 재앙은 없지만, 사고나 직장에서의 해고와 승진 탈락 또는 사업 실패 그리고 가족 친지와의 불화에 따라 크고 작은 고통과 스트레스를 당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의 원인이 모두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양하며 경계한다면, 인생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모재 김안국(이하 모재로 약칭)의 삶이 참고가 될 수 있겠다.

성리학 이념의 교화와 문예
『대동야승』 속의 여러 문헌에 모재만큼 많이 언급된 인물도 흔치 않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는데, 그 가운데는 그가 관리로서 이룬 업적과 시문(詩文)을 잘 지었다는 점과 원만한 인간관계와 우애, 시를 보고 사람을 잘 감별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안로(安璐 : ?~?)가 1638년에 기록한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에 따르면 모재는 정축년에 영남 지방을 살피면서 효자 및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방문하여 그 집에 가기도 하고 음식을 보내 주기도 하며, 뛰어난 자는 조정에 천거했다고 한다. 『이륜행실록언해(二倫行實錄諺解)』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고, 백성들에게 반포하면서 풍속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가르치기에 힘썼다. 기묘년에 조정에 들어와서 우참찬 겸 홍문관제학이 되었는데, 특지로써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하면서, 앞서 경상도에 있을 때의 공적이 현저하였으므로 백성을 위해 모재를 선택해 제수한다 하였다. 모재가 감격하여 교화를 성취시킬 조목을 생각하였는데, 전보다 주밀하고 상세하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파직되니 이천(利川)의 주동(注洞) 집에 물러가 살았고, 따로 작은 집을 지어서 은일재(恩逸齋)라는 현판을 붙이고 날마다 여러 학생과 강학(講學)하니 학도가 점점 많아졌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무거운 처벌을 하려고 했으나 그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성리학의 이념을 수양 차원에서 몸소 모범을 보이고 교육한 이가 김굉필이라면, 조광조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 그것을 제도적으로 실천하였고, 모재는 지방에서 직접 교화에 힘써 실질적으로 그것이 민간에 침투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니까 성리학의 이념과 전통이 뿌리 내린 것은 모재의 공이라 하겠다.
모재는 시문에도 능하였다. 글을 잘 지어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의 작성만이 아니라 사신들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가령 이기(李墍 : ?~?)의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사대는 중국에, 교린은 일본 등과 관련된 외교이다. 물론 일본과 중국 사신과의 일화도 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시문에 능하였는데, 윤근수(尹根壽 : 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그 일화가 있지만 너무 길어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모재는 벼슬하기 전부터 벌써 시를 볼 줄 안다고 당시에 이름이 났다. 판서 성현(成俔)이 한 해 동안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요양하였다. 그 사이에 두보(杜甫)의 시를 숙독해서 사운(四韻) 여덟 수를 짓고 스스로
‘마음에 만족한 작품이니 옛날 사람의 시에 견줄 수 있다.’
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아들 하산(夏山)에게 말하기를,
“내 이 시는 옛 사람의 작품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다. 들으니 네 친구 김 아무개는 시의 장단점을 가려낸다고 하니, 네가 보통 종이에다 하인을 시켜서 베끼고 이것을 부엌 위에 수십 일 동안 매달아 연기에 그을려 오래 묵은 것처럼 만든 뒤, 김 아무개에게 보여 그것이 어느 시대의 시인가를 물어보라.”
라고 하였다. 그 뒤 하산이 자기 집에 모재를 초청하여 손님 자리에 같이 앉고, 판서는 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의 말을 엿들었다. 하산이 묻기를,
“집의 어른께서 묵은 책 상자 속에서 시를 찾아내셨는데, 이것이 참으로 옛날 사람의 작품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송나라 말엽의 작품인지 아니면 원 나라 사람의 작품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어, 자네에게 이 시의 감정을 청하네.”
라고 하였다. 모재는 두 편을 읽고 말하기를,
“이 시는 격이 낮다. 송 말엽의 시는 벌써 아니고, 원 나라 시 또한 아니다. 바로 현대 작품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최치원(崔致遠)이나 이색(李穡)의 작품은 아니겠는가?”
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최치원과 이색의 시는 격이 높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은 아닐 것이고, 진짜 현대 작품이다. 그러나 현대 사람의 작품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다른 사람은 아마 이렇게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들으니 대감(성현을 가리킴)께서 요즘 두시를 읽으셨다고 하는데, 만약 정밀하게 생각하고 다듬으면 이만한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대감의 작품일 게다.”
라고 하였다. 판서가 안에서 이 얘기를 듣고 문을 열고 나와서 모재를 보고 말하기를,
“너의 시 공부가 이 정도가지 이른 것은 뜻밖이구나.”
하고, 드디어 술상을 차리고 마주 앉아서 오랫동안 조용히 얘기한 뒤에 파하였다.

이렇게 시문과 관련된 모재의 일화는 매우 많다. 그래서 온 세상의 평론이 모재는 선을 좋아하고 선비를 사랑 하며, 전고(典故 : 전례와 고사)에 널리 통하였으나 학문상의 공부에 이르러서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월정만필』에서 평하였는데, 이 학문이란 아마도 이론 중심의 성리학을 말하는 것 같다. 역으로 생각해 달리 말하면 성리학 이론보다 실천에 충실했다고 하겠다. 아무튼 이 말은 그의 학문 수준이 결코 얕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기록에는 퇴계 이황이 한 때 경상도와 서울로 오가면서 이천의 모재를 찾았는데,
“모재를 뵌 뒤부터 비로소 마음씨가 올바른 군자(正人君子)의 도를 알았다.”
라고 전하며, 권별(權鼈 : ?~?)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유자(儒者)의 사범(師範)이 되었고, 당시의 학자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선생의 힘이라고 전한다.

덕망과 인간관계
모재는 성품이 섬세하고 인정이 많았다. 『해동잡록』에 모재는 성품이 부지런하고 상세하고 치밀하여 방아를 찧을 때에는 싸라기와 쌀겨도 함께 거두어 저장하였다가 춘궁기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물건을 낼 때에 모두 쓰일 곳이 있도록 마련하였으니, 마구 없애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간혹 비방하면, 모재는 웃으며 말하기를
“범인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
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백성을 사랑하며 성격이 주도면밀하고 섬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권응인(權應仁 : ?~?)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서 모재가 성주(星州) 기생 의침향(倚沉香)에게 준 시에도 엿보인다.

아름다움과 추함 인연도 말하지 말자(不論姸醜不論緣)
오래 있다 보니 사람 마음이 저절로 끌리게 하는구나(處久令人意自牽)

이 시에서 정이 많은 그의 성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 같은 기록에서도 “호음(湖陰 : 鄭士龍의 호)은 좀처럼 남을 칭찬하는 일이 없었는데, 모재는 그렇지 않아서 남의 좋은 글귀를 보면 감탄하며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하여, 남의 장점을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과의 약속이나 의리는 꼭 지켰다.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김모재가 장원(壯元) 강태수(姜台壽) 집안과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가 후에 자녀가 모두 장성하여 혼인할 시기가 되었는데, 강태수의 아들이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언약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드디어 그와 혼례를 이루었으니,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성격에는 섬세함과 신의도 있었지만 그에 더해서 은혜도 잊지 않았다. 앞의 기록에 따르면 모재는 이천(利川)으로 물러나 살았고, 사재(思齋 : 모재의 아우 金正國의 호) 고양(高陽)으로 물러나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사재가 이천에 갔는데, 동네에서 풋콩을 삶거나 참외를 따서 모재에게 드렸다. 모재는 모두 받아서 책에 기록하니, 사재가 얼굴을 찡그리며
“형님은 이런 물건을 받아쓰면서 어찌하여 책에 기록합니까?”
라고 하니, 모재가
“남이 성심으로 주는 것인데 내가 어찌 물리치며, 만약 책에 기록하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잊어버릴 것이니, 어찌 남의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겠는가?”
라고 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 사람의 덕망과 성품은 그가 직접 만든 가훈과 자녀들의 가르침에도 드러난다. 『해동잡록』에 기록에 모재는 항상 겸(謙)과 공(恭) 두 글자를 가지고 자제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겸손과 공손은 오로지 군자의 성대한 덕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명심하여 종신토록 잊지 말라.”
라고 전한다. 이런 생각이 조밀하게 반영된 것이 그의 가훈이다. 같은 기록에 보면 ①말을 삼갈 것 ②자기의 장점을 자랑하거나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 것 ③남의 허물은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말하지 말 것 ④조정 정치의 잘되고 못됨을 말하지 말 것 ⑤수령이나 재상의 잘한 일 못한 일을 말하지 말 것 ⑥음란하고 추잡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⑦남을 헐뜯는 말을 하지 말 것 ⑧오만한 말을 하지 말 것 ⑨상도(常道)에 어긋나고 흉악하고 도리에 벗어나는 말을 하지 말 것 ⑩허풍을 떨거나 허황된 말을 하지 말 것이 그것이다. 주로 말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행장」에는 이와 약간 다른데 말조심 외에 충성·효도·우애·화목 등의 덕목이 들어 있다. 물론 이것들은 유교에서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시하는 가르침이고 교화의 주요 내용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애와 인물 감별
모재는 또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기로 소문난 당사자였다. 보통 어렸을 때 한 집에 살 때는 형제 사이의 우애가 있거나 있을 법 하다가도, 가정을 이루어 따로 살면 쉽지 않다. 유산의 분배 문제도 있고, 또 딸린 부인이나 식구나 하인들의 입장도 있어서 형제끼리 우애의 도리를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형제 가운데 누가 망하거나 환난을 당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해동잡록』에 모재가 영남 관찰사로 있을 때에 형제간에 전답을 가지고 다투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효도하고 우애하며 화목해야 하는 도리를 타일렀더니, 두 사람이 감복하여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도 형제끼리 유산으로 다투는 일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기록에서 모재는 동기 사이는 우애를 더욱 도탑게 하고, 재물에 대하여서는 사양하기를 힘써 더 얻으려는 마음을 품지 말라고 자녀를 가르친 것을 보면, 평소에 우애를 잘 실천하고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다.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 1485~1541)은 모재의 아우이다. 임보신(任輔臣 : ~1558)이 기록한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따르면 사재 김정국의 자는 국필(國弼)인데, 모재의 아우였다. 기묘년에 파직된 후에 고양(高陽)의 농막으로 돌아가서 호를 은휴(恩休)라 하였다. 고아한 선비로서 후생들의 모범이 되니, 당시 사람들이 그 형제를 가리켜 이난(二難 : 세상에 흔하지 않은 일)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 보면 두 형제 사이의 깊은 우애가 소문났음을 알 수 있다.
또 윤기헌(尹耆獻 : ?~?)이 기록한 『장빈거사호찬(長貧居士胡撰)』에 두 사람 사이의 일화가 있다. 모재와 사재 형제는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아 시골에 살고 있었다. 늘 서로 왕래하며 유숙하였는데 때로는 한 달이 되기도 하였다. 작별하면서 모재가 사재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연로하고 그대 또한 병이 많은데,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리오. 서로 만나면 기쁘고 떨어지면 슬픈데, 서로 함께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없겠는가?”
하니, 사재가 말하기를
“저의 뜻은 좀 다릅니다. 형제가 동거함은 실로 기쁜 일이오나, 양가의 하인들 사이에 딴 말이 없을 수 없고, 부인들은 성질이 편벽하여 오해하기는 쉽고 풀기는 어려우니, 만약에 반목이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서로 각각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생각나고, 서로 만나면 즐거우니 우애의 정은 날로 더욱 두터워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이 더러는 사재의 말에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소인배에게 배척을 받은 것은 기묘사화의 일을 말한다. 두 형제는 다행히 죽음과 유배를 면하여 파직만 당한 상태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모재는 경기도 이천, 사재는 경기도 고양에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왜 떨어져 살았는지 기록은 없으나, 대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남자가 혼인하면 처가 쪽에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른다. 딸도 유산을 상속 받았으므로, 그 상속받은 농토를 관리하려면 부득이 거기 가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두 사람 사이에는 우애가 깊어서 서로 간에 시를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 또 모재가 유명한 점 가운데는 인물을 잘 감별했다고 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시를 보고 지은 사람의 상황을 판단하기도 하고 때로는 운명을 점치기도 했다. 이덕형(李德馨 : 1561~1613)이 지은 『죽창한화(竹窓閑話)』에 모재는 감식이 신과 같아서 남이 지은 글을 보면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궁달(窮達)과 수명까지도 아는데, 이것은 열에서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일례로 이제신(李濟臣 : 1536~1583)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 김모재는 한 유생이 시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시를 보니
“푸른 나무 그늘 속에 다시 주저하네(綠樹陰中更躊躇)”
라는 거였다. 모재는
“이 시가 매우 짧고 초라하니 머지않아 반드시 죽으리라.”
라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고 전한다.
게다가 『송와잡설』에는 정소종(鄭紹宗)은 꿈에 어떤 노인이 손바닥에 시를 써 주었는데, 그는 훗날 과거에서 해당 시구에 각각 두 글자씩 보태 지어 급제했다고 한다. 시험관인 모재가 그것을 보고 크게 칭찬하며 “이것은 실로 귀신의 말이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정소종이 모재를 뵙자 시상이 거기에 미치게 된 연유를 밝히자, 모재의 글을 알아보는 명성이 이때부터 알려졌다고 전한다.
모재는 성리학 이념이 백성들의 실생활에 뿌리 내릴 수 있도록 교화에 힘쓴 공이 있고, 또 시문을 통하여 외교 활동만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게다가 성격이 섬세하고 인정이 많아 환난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며, 형제 사이에 우애도 뛰어났다. 이만하면 동시대나 후세의 관심과 추앙을 받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흔히 처세술을 말할 때 소인의 아첨과 군자의 너그러움을 구별하지 않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가 환난에서 살아남고 한 시대에 명성을 얻은 것은 단순히 세상에 아첨했기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성리학을 기초로 덕을 쌓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오늘날의 덕은 무엇을 기반으로 쌓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