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럽지만 엄격한 황희 정승


너그럽지만 엄격한 황희 정승

 

골호인과 원칙주의자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너그러운 상사와 깐깐한 상사를 자주 비교하게 된다. 대체로 너그러운 상사가 포용성이 있고 공감 능력이 있다고 선호한다. 반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평가할 때는 너그러운 무골호인(無骨好人)보다 깐깐한 원칙주의자를 선호한다. 그는 소신과 신념이 있고 직무에 충실하다는 평을 듣는다. 만약 아랫사람이 무골호인이라면 줏대가 없이 두루뭉술하고 아첨하여 남의 비위를 다 맞추는 사람이라고 핀잔하고, 윗사람이 원칙주의라면 융통성이 없고 리더십이 경직 되었다고 불평한다.
그렇다면 상사가 되면 너그러워야 하고 부하가 되면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글쎄.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지만, 남의 기대에 본인의 행동을 일치시키기도 어렵고 그러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매사를 남의 기준으로 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의 상사도 되지만 부하인 중간 관리자의 경우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사실 한 사람의 역량과 자질을 두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필요는 없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양자를 구사해야 한다. 쉽게 말해 관용을 베풀 때와 원칙을 고수할 때의 상황이 제각기 있다는 것이다. 때와 형세에 딱 맞게 처신하는 것이 유학에서 말하는 중용(中庸)이다. 그래서 중용을 취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
조선 역사에서 너그러움의 대명사를 말할 때 흔히 황희(黃喜 : 1363~1452) 정승을 꼽는다. 예전에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실린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가 젊었을 때 길을 가다가 두 마리의 소가 끄는 쟁기를 잡고 있는 농부에게 큰 소리로
“어느 소가 일을 잘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농부는
“쉬!”
하며 가까이 다가와 귓속말로 답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소가 일은 잘한다고 크게 말하면 다른 소가 화를 낼지 모르니 그랬다고 한다. 그 뒤로 황희 정승(이하 정승으로 약칭)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남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항상 너그럽게 했다는 일화이다.
이렇게 정승의 너그러운 점과 관련된 일화는 많다. 그러나 한편 정승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깐깐한 원칙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 몇 개의 일화가 보인다. 이렇게 한 인물의 인격에 관용과 원칙을 고수하는 두 가지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성품일까? 그 장점에 가려진 어두운 면은 또 없을까? 정승의 일화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되돌아보면 직장이나 가정생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너그러운 성품
정승은 청백리이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져 있고, 90살까지 살았으니 조선조 최장수 재상으로 꼽힌다. 또 정치 현장에서 관용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 조선 초 국가의 기틀을 반석 위에 올리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하렸다. 권별(權鼈 : ?~?)이 기록한 『해동잡록(海東雜錄)』의 종합적 평가는 이렇다. 그의 본관은 남원(南原) 장수현(長水縣)이며 자는 구부(懼夫)이고 초명이 수로(壽老),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 공양왕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네 임금을 내리 섬겼으며,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의정부(議政府 : 조선시대 백관을 통솔하고 여러 정무를 총괄하던 국정의 최고 기관)에 24년간을 있으면서 역대 왕들이 정해둔 법제를 준수하기에 힘쓰고 어지럽게 고치기를 즐기지 않았다. 규모가 원대하여 대신다운 풍채가 있어, 세종은 왕실의 비밀스러운 일까지도 반드시 그에게 자문했으니, 우리 왕조의 어진 재상으로는 반드시 공(公)을 제일로 친다.
이런 평가는 그가 어진 재상으로서 얼마나 임금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어질다는 말은 너그러움과 통한다. ‘역대 왕들이 정해둔 법제를 준수하기에 힘쓰고 어지럽게 고치기를 즐기지 않았다’는 말은 그의 원칙주의자의 면모를 보이는 부분이기도 한데, 이런 사례는 뒤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너그러운 성품이 보이는 사례는 우선 성현(成俔 :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보인다. 정승은 도량이 넓어서 조그만 일에 거리끼지 아니하고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욱 겸손하여, 나이 90여 세인데도 한 방에 앉아서 종일 말없이 책을 읽을 뿐이었다. 방 밖의 마당에 늦복숭아가 잘 익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와서 함부로 따도, 느린 소리로
“나도 맛보고 싶으니 다 따가지는 마라.”
라고 말하였으나, 조금 있다가 나가보니 복숭아가 모두 없어졌다. 아침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아이들이 모여들면 밥을 덜어주며, 떠들썩하게 서로 먹으려고 다투더라도 공은 웃을 따름이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도량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 사례는 아이들에게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것인데, 물론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보다 좀 지나친 경우도 있다. 이 사례는 『해동잡록』에 보인다.

“공(公)이 무슨 일을 의론하고 붓으로 문서를 쓰려는데 어린 종이 그 위에다 오줌을 누었다. 그런데도 공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다만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아이들이 좌우에 몰려들어 울고불고 장난치고 깔깔대도 조금도 금하지 않았으며, 혹은 그의 턱살을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이에 게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해 주어 편안히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이 지나치게 성가시게 굴어도 너그럽게 대했다는 사례이다. 게다가 그런 성품은 어려운 친족을 돌보는 데서도 드러나, 청빈하게 살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지금까지도 보통 사람들은 정승이 너그럽고 청빈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노라면 옛 속담의 ‘손자를 너무 귀여워하면 할애비 상투를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승은 절제되지 않는 이같은 아이 사랑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 점은 지나치게 너그러운 데 따른 부작용일 수 있는데, 뒤의 관련된 곳에서 설명하겠다.
물론 이런 관용은 아랫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동잡록』에 따르면 세종이 내불당(內佛堂 : 궁궐 안의 절)을 지을 당시에 정승으로 있었는데, 성균관의 유생들이 길에서 정승의 면전에서 나무라기를,
“당신은 정승이 되어 임금의 그릇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오?”
라고 했으나, 정승은 성을 내지 않고 도리어 기쁘게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 세종은 대신들이 절을 짓지 못하게 간언해도 듣지 않았다. 집현전 학사들도 강력하게 간언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집현전은 텅 비었다. 그러자 세종은 눈물을 흘리며 정승을 불러 이르기를,
“집현전 제생(諸生)이 나를 버리고 가버렸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소?”
라고 하자, 정승은
“신이 가서 달래보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학사들의 집을 두루 다니며 간곡히 청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궁궐 안에 절을 짓는 일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에서 있을 없는 일이지만, 정승은 그것을 봐 준 셈이다. 또 유생들이 반발을 기쁘게 생각하는 것은 선비들의 의기(義氣)가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포용성을 발휘한 일이다. 만약 정승이 훗날 조광조(趙光祖)처럼 성리학의 이념에 투철했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이 일을 용납했을지 의문이 든다. 사림이 정권을 장학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라서 이런 포용성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엄격한 태도
재상이라는 직분을 오랫동안 유지하려면 너그러운 성품만으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 이른바 문란해질 수 있는 기강을 바로 잡고, 혼란해질 수 있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행정에서 일정한 원칙이랄까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그럽지만 엄격한 태도가 요청되었다. 허봉(許篈 : 1551~1588)이 지은 『해동야언(海東野言)』에 따르면 정승은 마음이 너그럽고 성격이 모가 나지 않아,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나라 일을 논의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너그럽지만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데서 일정한 원칙주의자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그 점은 앞의 『해동잡록』에서도 대사헌이 되어서도 원칙을 세워 하나하나 까다롭게 굴지 않아도 간악한 자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조정의 기강이 바로 서고 엄숙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통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몇 개 있다. 우선 그 가운데 하나는 『해동야언』의 기록이다. 태종이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폐하자 정승과 이직(李稷)이 당시에 판서(判書)로 있었는데, 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굳이 고집하다가 거의 6년 동안을 지방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는 일이 그것이다. 장자를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김종서(金宗瑞)와 관련된 일인데 역시 『해동잡록』에 보인다. 곧 황희는 정승으로, 김종서는 공조 판서로 있으면서 일찍이 공적 회합을 한 적이 있었다. 김종서가 공조에 명령하여 술과 과일을 간단히 차려 올리게 했다. 정승이 그 것의 출처가 어디냐고 물었다. 공조의 서리(書吏)는 공조에서 차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정승은 화를 내며,
“국가에서 의정부 곁에다 예빈시(禮賓寺)를 설치해 둔 것은 삼공(三公 : 의정부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세 정승)을 대접하기 위해서다. 만약 시장하다면 마땅히 예빈시로 하여금 차려오라고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는, 임금께 아뢰어 김종서의 죄를 청하려고 했다. 다른 여러 제상들이 말해 겨우 그만두었는데, 정승 김극성(金克成)은 일찍이 경연(經筵)에서 이 일을 아뢰고 나서,
“대신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조정을 진압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해당 관청에서 정승을 간단히 대접하는 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마는 정승은 그 문제를 결코 묵과하지 않고 문제 삼았다. 이는 그것이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극성의 지적대로 조정의 기강을 바로 잡는 기회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이런 원칙주의자다운 모습은 많은 관리들의 수장으로서 기장을 바로잡는 일이 되겠고, 또 그래서 그가 장수한 정승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부나 군대처럼 많은 사람을 관리하는 데는 사실 어떤 원칙과 기강이 필요하다. 지금은 그것이 국무총리나 국방부 장관의 소임인데, 그래서 국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이들에게 국회의원들의 질책이 쏟아지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승의 원래 성품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직책상 어쩔 수 없는 일기이도 하였던 것이다.

청백리와 여러 의혹
정승은 또 청백리(淸白吏)로서도 정평이 나 있다. 『해동잡록』에 황익성(黃翼成 : 황희의 시호)이 죽자, 모든 관청의 서리들에서부터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 포화(布貨 : 화폐로 쓰이는 포목)를 내어 제사를 차렸는데, 다투어 풍성하게 차리려고 거리낌 없이 재화를 내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장례비를 남이 부담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추론해 보면 정승이 죽었을 때 장례치를 비용도 넉넉지 못할 정도로 청빈했음을 알 수 있다. 앞에 소개한 『해동잡록』에서 친족 가운데 고아가 되거나 과부가 되어 빈궁하여 홀로 생존할 수 없는 이에 게는 반드시 재산을 털어 구휼했다는 기록도 그가 가난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기간 의정에 재임하거나 역임한 재상이면서도 초라한 집에서 궁핍한 생활로 일생을 보낸 인물에 대해서 조선 시대 청백리 재상의 상징으로 칭송되고 있는데, 정승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과연 청백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단종실록』에 보면 『세종실록』을 편찬할 당시 사관 이호문의 정승에 대한 기록을 의논한 일이 있다. 그 요지는 의논에 참여했던 허후(許詡)의 말에 등장한다. 그가 말하기를
“재상이 된 지 거의 30년에 진실로 탐하거나 더러운 일이 없었는데, 어찌 남몰래 사람을 중상하고 관작을 팔아먹고 옥사(獄事)에서 뇌물을 받아서 재물이 많았겠는가?”
라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도 이호문의 기록은 황희가 남을 중상하고 관직을 팔고 뇌물을 받아 재물이 많았다는 기록이었던 것 같다. 구체적 내용으로 노비가 많았고 또 김익정(金益精)이 황희와 함께 서로 앞뒤로 대사헌이 되어서, 모두 중[僧] 설우(雪牛)의 금(金)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황금대사헌(黃金大司憲)」이라고 일컬었다는 이호문의 글을 지적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는 이호문의 사람됨이 조급하고 망령되고 단정치 못하다고 보고, 이호문의 사적인 감정에 따라 그렇게 기록했다는 성삼문(成三問)의 논증에 따라 그 기록을 삭제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그러나 정승의 자식들에게는 노비가 많음을 인정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혼인하면서 부인 쪽에서 노비를 데려 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승의 자녀들에게 노비 곧 재산이 많았던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는 정승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벼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면서 잔치를 열었는데, 고관들과 권세 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 때 정승은 그 일이 못마땅해
“선비가 청렴하여 비가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집을 이렇게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고 말하고 음식도 들지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정작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더기가 된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고 한다.
둘째 아들 수신(守身)은 『해동잡록』에 따르면 음관(蔭官 : 부모의 공으로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직에 나가감)으로 출사하여 세조 때 성삼문 등의 계획을 미리 알린 공으로 좌익공신(左翼功臣)이 되었고 훗날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술을 잘 마셔서 주량이 홍윤성(洪允成)과 더불어 서로 적수여서 하루 종일 실컷 마셔도 조금도 취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 보면 그의 자녀들은 정승과 풍모가 많이 달랐음을 엿볼 수 없다. 자녀들은 청렴과 지조 등의 선비의 풍격보다 부귀영화나 일신의 영달을 취했기 때문에 훗날의 평가가 그들에게는 별로 후하지 않다. 사실 이 점은 정승의 가정교육 결과일 수 있고 그 또한 그의 성품의 영향인지 모르겠다. 바로 이 글의 서두에서 정승이 평소 아이들에게 너무 너그러이 대한 것도 거기에 해당되겠다. 쉽게 말해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에게도 아비로서 엄격한 가르침이 있었더라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주인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지나친 기대일지는 모르나 아무튼 아쉬운 대목이다.
사실 정승 자신에게 아무런 허물이 없었느냐 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가 있는 법, 그 자신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가령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따르면 사헌부에서 좌의정 황희가 감목관(監牧官) 태석균(太石均)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하여, 대관(臺官) 이심 (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주선하여 주기를 청하였으니, 황희를 파면시켜 청탁으로 법을 어기는 징조를 막으라고 탄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해동잡록』에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신창군(新昌郡) 아전 표운평(表芸平)의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가 그 이튿날로 보방(保放 : 보증인을 세우거나 보증금을 내고 죄인을 석방함)되고 그들의 관직만 파면되었을 뿐,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10여 일이 지나 도로 제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사건은 아마도 정승의 성품을 보아 재물의 욕심보다 인정상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여 연루되었을 수도 있겠다. 인정에 이끌리면 원칙을 지키기 어려워,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공존하기 힘들다. 천하의 황의 정승도 이렇게 한 때의 실수와 허물이 있었고, 또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남들이 흠모하는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그의 공적과 삶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것은 작은 허물이 큰 공을 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성품에 장점이 많고 단점이 적다면, 그 단점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너무 야박한 일이다. 그렇게 평가하는 당사자 자신을 되돌아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그는 보통 사람이 갖추기 어려운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한 성품을 갖추었다. 너그러움과 엄격함은 서로 상충되는데,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사회생활에서도 이런 성품이 필요하다. 윗사람은 엄격하기 쉽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굴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규정과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너그러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