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과 선비의 기상


남명 조식과 선비의 기상

 

라에 원로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가 예전보다 여러 모로 시끄러운 것은 사실이다. 다양한 정치 세력이 어떤 이슈를 놓고 투쟁·선전·선동하는 탓도 있지만, 직업별·직능별 또는 지역별 단체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놓고 주장하고 시위를 벌이는 일이 흔하며, 언론들이 광고료 수입을 위해 자극적인 보도를 일삼는 면도 있고, 게다가 영리를 위해 시선을 끌만한 가짜 뉴스의 생산도 마다하지 않는 개인 미디어가 인터넷을 통해 범람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이니까 이런 일들이 당연하다고 여긴 반면, 어떤 이들은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고 개탄한다.
한 술 더 떠 어떤 이는 시국이 어수선할 때 나라의 원로들이 나서서 갈등을 중재하거나 대안을 제시하기를 바라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원로가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원로랍시고 무슨 성명서를 내거나 단체 시위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살아온 행적이나 과거 속했던 집단의 성격,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인식 수준을 고려해 보면, 원로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들러리로만 보인다. 그분들의 치우친 주장에 공감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물론 재야에 올곧은 선비 같은 분이 있겠지만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는다. 이른바 장사를 위해 이용 가치가 있어야 알아주니, 누가 스스로 ‘내가 원로다!’ 하고 자신을 드러내겠는가? 더구나 군자는 원래 자신의 덕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지만, 스스로 덕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원로를 만나기 어려운 것은 대중의 취향이 모든 일의 기준이 되고, 인터넷 발달로 과거의 작은 실수마저도 낱낱이 까발리는 한국 사회의 풍조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 자체가 더럽고 치욕스럽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적어도 한 개인의 고결하고 떳떳한 삶과 인생을 위해서도 옛 선비의 기상이 필요하다. 그것이 사회나 국가를 위해 도움이 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그렇다면 그런 선비의 기상을 누구에게서 찾아 볼 것이며, 또 어떤 일이 참된 선비의 기상이고, 그런 선비의 공부와 삶의 모습은 어떤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융·복합 학문의 선구자
현대는 융·복합 학문이 대세다. 상고대에는 모든 학문과 예술이 종합적으로 미분화되어 있었으나 근대로 올수록 분과 학문으로 분화되었다. 그래서 전문가 집단이 생겨났고, 분과 학문에서도 더 세밀하게 분화되어 자기 분야가 아니면 가까운 이웃 학문에 대해서도 문외한이 되는 깜깜이 학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유학도 원래는 종합적인 학문이었다. 그러다가 특히 송 대 이후 성리학이 등장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실천과 그 근원을 탐구하는 이론 분야에 치중한 감이 없지 않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로는 주자성리학이 이념화 되면서 이론 천착에 매달리고, 그 이념의 순수성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도학자가 아니라고 여겼다. 가령 율곡 이이 선생이 쓴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1~1572) 선생(이하 선생으로 약칭)에 대해 “문인들이 그를 추앙하여 도학군자(道學君子)라고까지 하는 것은 진실로 실상에 지나친 말이다.”고 평가 했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평가에는 선생이 섭렵한 학문과도 관련이 있다. 선생은 생원·진사과의 과거에 급제할 정도로 유교 경전과 『성리대전』을 섭렵하여 유교적 기초를 닦은 것은 물론이요, 옛 문장과 천문·지리·의방(醫方)·수학(數學)·병법(兵法)까지도 익혔으며, 유학자들이 외도(外道)로 여겼던 노자·장자의 서적은 물론이요, 불교의 그것도 섭렵했다고 한다. 선생의 호가 남명(南冥)인 것도 『장자』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러니까 요즘말로 말하면 문학·철학·의학·천문학·지리학·수학·군사학 등을 익혔으니, 그의 삶과 가르침은 자연히 이런 것들이 융합되어 나타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학문들은 대체로 현실 생활에 당장 필요한 학문이다. 선생이라고 해서 성리학을 모를 리 없었다. 권별(權鼈)이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선생의 이런 말이 실려 있다.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하는 것, 이것이 덕에 나아가는 순서인데, 인사는 버리고 천리를 담론하니, 이것은 입으로만 떠드는 이치일 뿐이다.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많이 듣기만 하는 것은 귀 밑의 배움[耳底之學]일 따름이다.”

본 뜻은 인사를 멀리하고 이론에만 천착하는 성리학자들을 비판하며, 인사를 배우는 것도 덕에 나아가는 일이라고 보았다는 점이다. 더 추론할 수 있는 점은 의학·천문학·지리학·수학·군사학 등은 인사에 필요한 학문이요, 성리학은 천리를 다룬다는 점이다. 성리학의 기본 전제인 성즉리(性卽理)도 ‘인간이 본성이 곧 천리’라는 뜻이니, 그 천리를 인간의 심성과 도덕적 규범에 적용시킨다. 사실 도덕의 근거를 따지는 일이 인사에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켜주는 인사가 더 급선무였다. 이렇듯 현실 문제는 율곡 선생의 상소문이나 대책 등에도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결국 선생은 학문적으로 개방적인 선비로서 폭넓은 공부를 했다는 뜻이며, 이는 ‘군자는 한 분야만의 전문가가 아니라’는 군자불기(君子不器)의 공자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하겠다. 곧 전인적(全人的)이고도 융·복합적 지식을 탐구하는 학자의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실천 중심의 공부와 그 영향
선생이 이렇게 아카데믹한 이론 연구에 천착하지 않은 것은 선생만의 학문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 외에 다른 학문을 섭렵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었지만, 학문이나 공부는 실생활에 직접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부법에 대한 『해동잡록』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곧 선생의 독서는 장(章)마다 해석하고 구(句)마다 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열 줄 정도 읽어 가다가 자기에게 절실한 곳에 가면 그때는 알고 넘어갔다. 언제나 제자를 가르치며 말하기를,
“사람이 도시의 큰 시장에 놀러 가면 금은과 진귀한 보물 등 없는 것이 없다. 종일 거리를 다니면서 그 값을 묻곤 하지만, 그것들은 끝내 자기 집에 소용되는 물건이 아니고 남의 집 물건일 뿐이다. 차라리 내게 쓸모 있는 포목(布木) 한 필이나, 물고기 한 마리를 사오는 것만 못한 것이다. 지금 학자들이 성리학을 소리 높게 떠들고 있지만, 자기에게 얻는 것이 없으니 이것과 다를 게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내게 필요한 것 그것을 얻는 것이 독서의 진정한 목표였다. 이는 지식 자체만을 위한 이론 공부가 아니라 나의 수양과 실천에 당장 필요한 공부를 해야 한다는 뜻과 통한다. 이런 학문 태도는 ‘몸을 닦아 남을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이다. 이렇게 선생이 성리학에 더 이상 천착하지 않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완성된 이론으로 수양하여 실천하는 일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또 『해동잡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염락(濂洛 : 주렴계와 정호·정이 등 북송의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학자를 상징하는 말) 이후로 저술하고 주석한 것이 학문의 단계와 맥락을 환히 나타내기를 해와 별처럼 하여서, 새로 배우는 자들이 책만 펼치면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공부하는 마음가짐이 깊고 얕은 것은 그것을 구하는 성의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정자나 주자 등의 넓고 깊은 학문이 이미 책으로 완성되어 있으므로 따로 이론 탐구에 천착하기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정성을 가지고 수양하고 실천하는 것이 후학들의 참된 학문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 그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유학만이 아니라 병법을 익힌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의병장으로 활약한 이들이 많다. 그 가운데 정인홍(鄭仁弘)은 그의 수제자이고,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郭再祐)는 선생의 외손사위이다. 조경남(趙慶男 : 1570~1641)이 지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는 정인홍이 전승(戰勝)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서 군공(軍功)은 남의 맨 끝자리에 있었으나, 사실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사람 가운데서 정인홍이 첫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면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실천적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또 선생의 제자 가운데 최영경(崔永慶)이란 분이 있는데, 『석담일기』에는 최영경이 전에 선생을 좇아 배웠고 청렴하고 절개가 세상에 뛰어나서 의가 아니면 한 터럭만큼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더니 부모가 돌아가자 가산을 모두 기울여 장사지내니 마침내 곤궁하여졌다. 집을 성안에 두었으나 친구를 사귀지 아니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고집 있는 선비라 할 뿐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선생의 제자라고 해서 모두 이런 것은 아니지만, 문하에 선생의 가르침을 이렇게 몸소 실천하는 제자들이 많았다.
이렇게 벼슬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산다고 해서 국가나 사회의 현실과 무관하게 유유자적하게 살지는 않았다. 그의 상소와 각종 기록에는 관리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말들이 많다. 『해동잡록』에는 언제나 선비들과 이야기하다가 대화가 정치의 잘못과 민생의 곤궁함에 이르면, 주먹을 불끈 쥐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꿋꿋한 선비의 기상
선생은 그 누구에게도 비굴하지 않는 꿋꿋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모습은 『석담일기』에서 선생은 성품이 청렴하고 꿋꿋하였으며, 주고받는 것을 반드시 의(義)로써 하여 구차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 『해동잡록』에는 기량이 크고 태도와 행실에는 과단성 있고 확실하였다고 말하고, 친구를 사귀는 데도 반듯하여 친구로 삼지 못할 사람이면, 설사 벼슬이 높고 귀한 사람이라도 시궁창 보듯 하여 그와 마주대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였고, 이 때문에 교제가 넓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집에 있을 때도 엄격하여 집의 아랫사람들이나 시중드는 자들도 머리카락을 묶지 않거나 더벅머리를 단정하게 하지 않으면 선생이 무서워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남의 나쁜 일을 들으면 혹시나 한 번이라도 만날까 두려워하여 마치 원수를 피하듯 하였고, 눈은 음란한 것을 보지 않고 귀는 엿듣지 않으며,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이 항상 마음에 있어서 게으른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런 성격과 태도는 물론 타고난 성품일 수도 있겠지만, 수양이 없었다면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선생은 아랫사람에게만 이렇게 대했느냐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선생의 유명한 「단성소」라는 상소가 있는데, 『석담일기』에는 이렇게 소개한다. 곧 선생이 벼슬에 뜻이 없어 상소로 사직하고 동시에 나라의 폐단을 말하였는데, 그 글에는
“자전(慈殿 : 임금의 어머니)께서 사리 깊고 착실하시나 단지 깊은 대궐 안의 한 과부에 불과하시고 전하께서는 나이가 어려서 선왕의 한 외로운 상속자에 불과하시다.”
라고 말고, 또
“노래는 처량하고 의복은 희니 나라가 망할 징조가 드러났다.”
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명종은 욕이 대비께 미쳤다고 하여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래도 산림처사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소개되지 않았지만 이 상소에는 심한 말은 더 있다. 이것으로보다 윗사람에게도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과격하게 보일 정도로 직언(直言)하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해동잡록』에 선생이 직접
“내가 평생에 단 하나 장점이 있는 것은 죽어도 구차하게 남을 따르지 않는 일이다.”
라고 한 말에서도 보이지만, 이 말의 핵심은 남을 따르지 않는 일보다 ‘구차하지 않다’는 데 있다. 곧 지위나 이익이나 명예 또는 권세 때문에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뜻과 통한다. 선생의 ‘구차하지 않다’는 말은 『석담일기』에도 보인다.
이렇듯 선생이 보인 불굴의 선비다운 기상과 학문은 유교적 도통(道統 : 도가 전해지는 계통)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이고, 청렴하고 과단성이 있고 자신에 대해 엄격하며, 세상을 감시하는 비판정신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다.

산림처사와 현실 참여
선생이 살았을 16세기 조선은 기성 정치 세력인 훈구파와 앞선 시대부터 점점 성장하기 시작한 사림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사화(士禍)가 연속적으로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 싸움에서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며 훈구파가 승리하는 결말로 이어졌다. 오늘날도 그렇듯이 경제적·정치적으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묘사화 때는 선생의 숙부 조언경이 화를 당하고 부친도 좌천되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지 않았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오로지 수양하며 제자를 기르는데 전념하였다. 이런 모습은 『석담일기』에도 보이는데, 선생이 직접
“후세 사람들이 나를 처사(處士)라 하면 옳지만 만일 유자(儒者)로 지목한다면 실상이 아니다.”
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선생이 스스로 유학자가 아니라고 한 점은 겸사(謙辭)인지 아니면 속된 유학자를 비판하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처사로 대우받기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재미있는 점은 이정형(李廷馨 : 1549~1607)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에 퇴계 선생도 임종하기 직전의 유언에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계와 도산에서 만년에 은거한 진성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였다. 남명 조식이 이것을 듣고 씩 웃으며 말하기를,
“퇴계는 이 칭호에 마땅하지 못하다. 나 같은 이도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
라고 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선생이 은사 곧 처사로 자처하는 것을 선호하지만 그것도 감당키 어려운 일로 여겼다.
흔히 처사라고 하면 초야에 묻혀 살며 세상일에 무관심안 은둔형 선비를 일컫지만, 선생의 예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몸은 초야에 있어도 마음은 조정과 세상에 있었다. 마음이 조정에 있었다는 것은 관직에 연연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 정치를 비판하며 그것이 백성을 살리는 올바른 것이 되기를 바랐다는 뜻이다. 그렇게 세상의 일에 근심했다는 의미에서 ‘은사(隱士)라 칭하는 데는 오히려 부끄러움이 있다’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선생이 유학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말 가운데는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치인’을 소홀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선생은 정치 비판과 제자 양성을 통해 현실 에 분명히 관여하고 있었다.
사실 선생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벼슬이 싫어서가 아니다. 왕의 외척과 훈구파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권을 정당화하고 선전하기 위하여, 실권이 없는 직책이나 허명(虛名)으로서 산림의 선비들을 유혹하고 농락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관직에 나아 가 보았자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의 군사 독재 시절 그런 인사들이 좀 많았던가? 국무총리니 무슨 자문위원장 자리를 주면 얼씨구나 덥석 받았다가, 실제로는 뜻을 펼치지도 못하고 ‘얼굴마담’ 노릇만 한 자가 그 얼마였던가? 그래서 선생은 실속 없는 헛된 명성에 이름을 팔지 않았다. 선비의 지조를 지켰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의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원칙 곧 출처관(出處觀)은 뚜렷했다. 올곧은 선비라면 이래야 한다. 이런 모습은 훗날 조선 사회에서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을 주는 산림 출신을 숭상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큰 유학자로 추앙받았던 송시열(宋時烈)과 허목(許穆)도 이런 산림 출신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두 분은 신도비(神道碑)를 써서 선생을 추앙했고, 과거 출신보다 산림을 더 높이는 기풍을 만들었다.
선생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라는 두 글자로 집약되고, 이 글자를 그가 소지했던 칼에 새기고, 만년에 제자를 가르쳤다는 산천재(山天齋)의 창 좌우에 ‘경’자와 ‘의’자를 적어 두었다고 하는데, “안으로 밝은 것은 경이요,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의 의이다.”라고 풀이했다고 한다. 곧 경은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내적 수양을 뜻하는 말이요, 의는 밖으로 만사에 대처하는 과단성 있는 태도를 말한다. 이 또한 수기치인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에는 참다운 선비로서 원로가 있는가? 없다면 왜 없는가? 자본주의 문화의 특징상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야 따돌림 당하지 않고 출세하고 먹고 살아남기 때문이다. 허나 그 옛날에도 꿋꿋한 선비가 되려면 처음엔 가난과 냉대를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 선비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가 세상의 등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