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제16대 조선왕 인조의 시대.

 

조가 임금으로 있던 시기는 1623년부터 1649년까지 26년간이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조선으로서는 다사다난(多事多難, 여러 가지 일들이 많고 곤란함도 많음)한 시기였다.
나라 안에서는 쿠데타로 임금이 바뀌고 이어서 그 임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북쪽에서 두 차례나 침략해왔으며 조정은 역시 두 차례나 피난을 갔는데 결국에는 임금이 항복하여 맨몸으로 신생 청나라의 대장에게 절을 올리는 치욕을 당했다. 그 여진족에게 60만명 가까운 백성들이 끌려가고 인질로 왕세자들이 잡혀갔다.
눈을 세계로 돌려보면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에도 막부가 정권을 장악하여 공전의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유럽에서는 장차 지구 전체의 판도를 바꿔버릴 서구 문명이 꿈틀거리며 일어서기 시작한 때였다.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년〜1642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고,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년 〜 1650년)가 『방법서설』을 집필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근본 원리를 구상하고 있었다. 또 상인들의 국가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상대로 지루한 독립전쟁(1567년〜1648년)을 치루고 있었는데, 그 곳에서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년〜1669년)가 활동을 하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1632년)>, <돌다리가 있는 풍경 (1637년)>, <야경(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 1642년)> 등을 그리면서 중세 기독교의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씩 걷어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 파스칼(Blaise Pascal, 1623년〜1662년)도, 영국의 과학자 뉴턴(Sir Isaac Newton, 1642년〜1727년)도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새로운 사상과 문화 그리고 종교로 꿈틀거리는 시대였으며 전체적으로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준비하는 시기였다.
인조의 시대 26년을 간략한 연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23년(인조 1년) 반란이 일어나 광해군이 하야하고 인조가 등극함
1624년(인조 2년) 공신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함
1627년(인조 5년) 만주의 후금(후일의 청나라)이 침입(정묘호란)
1628년(인조 6년)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제주도 표류
1632년(인조 9년) 사신 정두원이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화포 등 전래
1636년(인조13년) 만주에 청 제국이 성립함. 청나라가 침입(병자호란)
1637년(인조14년) 삼전도에서 왕이 청나라 황제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함
1642년(인조19년)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이 일어남
1644년(인조21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함
1645년(인조22년) 소현세자가 청에서 과학문물, 서양서적을 들여옴
1649년(인조26년) 인조 사망.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임금(효종)으로 즉위

인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시기는 참으로 임금노릇하기가 힘든 시기였다. 자신이 광해군 정권을 뒤엎고 왕권을 쟁취하였지만 그 다음해 바로 자신이 반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반란군은 19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흥안군(선조의 서자)을 왕으로 옹립하여, 인조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새 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반란군내부에서 분란이 발생하여 우두머리 이괄은 부하 장수들에게 살해당하고 능지처참 되었다. 인조는 당시 공주로 피난을 가 있었는데 그 곳으로 그 두목의 머리가 배달되었다.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을 취해가던 3년 뒤인 1627년(인조 5년)에 만주의 후금이 침략해 들어왔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조선 조정을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 정묘호란 때 후금의 홍타이지가 보낸 군사는 주력부대가 3만여명으로 3월초(양력)에 약 10여일 만에 정주성, 안주성을 거쳐 평양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조선의 북방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북방을 책임지고 있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몰락하고 그 휘하의 부대들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당시 첫째 아들 소현세자를 전주로 피난시키고, 자신은 조정 대신들과 함께 강화도로 피신을 하였다.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긴 싸움은 피하고 곧바로 조선의 조정과 강화를 맺었다. 조선과 후금이 형제관계를 맺는다는 조건이었다. 조선으로서는 오랑캐로 무시하였던 여진족의 추장을 형님으로 모시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 뒤 10년 정도 지난 1636년에 후금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이 때 후금은 이미 더욱더 강성해져서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홍타이지는 청태종이라는 천자의 존호를 자칭하고 조선에 대해서 신하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해 12월 청나라가 침략하였다.(병자호란)
홍타이지가 보낸 청나라 군대는 약 12만명이었다. 이들은 이전에 침입하였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속히 서울로 진격하여 강화도로 피난을 가는 조선의 임금과 조정을 막았다. 당시 인조는 수군이 약한 청나라 군대를 생각하여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장기전에 돌입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수를 읽은 청나라 군대는 신속히 피난길을 막았다. 인조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여 항전 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은 1만 3천여명의 조선군이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사전에 전쟁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아 군량이 부족하였다. 또 조정에서 전국 각지의 관군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청나라 군대가 가로 막아 남한산성은 고립되었다.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대군(훗날의 효종) 등이 피난을 간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거기에는 왕실 관계자들과 역대 임금의 신주도 함께 피난해 있었다. 청군은 예상을 깨고 수전 경험이 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여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강화도 함락 사실을 전해 받은 인조는 식량도 떨어지고 있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청나라에 항복을 하였다.
홍타이지가 이끈 청나라 군대는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뒤에 50만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포로로 삼아 데려갔다. 인질로 인조의 아들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데려갔다. 이후 그는 명나라를 제압하고 북경을 장악한 뒤에 천하를 평정하였다.
앞서 소개한 연표에서 유심히 봐야할 대목은 세계 역사의 대변화이다. 네덜란드인 박연(Jan Jansz Weltevree)이 1628년(인조 6년)에 제주도 표착한 것은 그러한 변화의 시작을 조선에 알리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기 스스로 반란 세력이 되어 선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임금이 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반란 세력을 목도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고 반란의 두목은 살해되었다. 그리고 외부의 적인 여진족의 침입도 견뎌냈다. 비록 그들을 극복하여 쫒아내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어차피 중국 천하를 정복하게 될 세력이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신하의 예로 섬기는 것으로 위협은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인조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양문명이었다.
박연은 조선에 처음으로 유럽의 존재를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얀 얀스 벨테브레(Jan Jansz Weltevree)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의 선원이었다. 제주도에 표류해온 그는 한양으로 호송되어 심문을 받고 훈련도감에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에 임시기구로 설치된 군사기관이다. 이후 상설기구로 바뀌었다. 정예 병사를 양성하기 위한 군사훈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는 그 자체에 군사 조직 체계도 갖추게 되었다. 급료를 받는 병사들 약 1000여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훈련도감군이라 부르며 삼수군, 즉 포수(砲手)·살수(殺手)·사수(射手)로 구분되는 군사조직이 있었다.
박연은 이곳에 소속되어 나중에는 조선 사람으로 귀화를 하고 조선 이름을 가지고 무신으로 병자호란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1648년(인조 2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 그는 네덜란드에서 같이 온 부하 2명과 함께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관리하는 일을 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紅夷砲, 오랑캐포)’의 제작법과 조종법을 지도했다.
박연이 보여준 새로운 세계의 문물에 이어서 1632년, 명나라에 간 사신 정두원이 서양의 망원경(천리경), 시계(자명종), 그리고 화포 등을 받아왔다. 또 그보다 13년이 지난 1645년(인조22년) 인조가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큰 아들 소현세자가 과학문물과 서양서적을 들여왔다.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 이를 경계하던 터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해에 사망하고, 인조는 아들의 미망인이자 며느리인 세자빈 민회빈 강씨와 소현세자의 아들들이자 자신의 손자들 두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자신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서양문물 전래의 싹을 자른 것이다.
국내외적으로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율곡은 왜, 어떤 이유로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그의 개혁사상이 재평가 되었을까, 아니면 유학 연구의 업적 때문이었을까? 당시 조선 지식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서 정치를 하였을까? 『인조실록』에 나타난 율곡 관련 기사를 읽으며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