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모범이 된 율곡


정치의 모범이 된 율곡.

 

곡을 아는 제자들과 지인들이 대거 조정에 발탁된 결과 율곡의 가르침과 지난 행적은 인조 시대 초기 조정의 행정과 정치의 기준이 되었다.
예를 들면 인조 임금은 인조 1년 5월 7일 예조 판서 이정구를 불러들여 사묘(私廟, 임금 집안의 사당)에 대한 전례에 대해서 물었다.

“두 사묘(私廟)의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 신위에 대해 함께 고제(告祭, 큰일을 치른 뒤에 그 사정을 사당에 모신 조상에게 고하는 제사)를 행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중략) 이번에 사묘의 두 어머니 신위에 대해 친제(親祭, 임금이 직접 제사를 지냄)한다면 고제를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일은 내가 친제를 드려야 마땅한데 먼저 관원을 보내 고제하고 다음에는 친제를 행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고제가 이처럼 지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러한 인조의 고민에 대해서 이정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친제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는 지금 바깥 의논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옛적에 선묘(선조임금)께서 덕흥(선조의 친 아버지)의 묘(廟)에 제사지내려 하자 그 당시 삼사가 논의하였는데, 이이(李珥)만은 ‘친제를 드려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소신의 의견도 이이의 주장을 통론(通論)이라고 여기니, 오늘날 친제를 행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이정구의 답변은 당시 바깥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율곡이 선조 임금 당시에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임금이 친제를 올려도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인조 임금도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율곡의 주장이 당시에 소수의견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율곡의 판단이 통론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난날 율곡의 생각이 현재 이정구 자신에게는 판단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날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
이조참판 이귀(李貴)가 인조 임금에게 관리의 임명에 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때의 상황이다. 이귀는 김류·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 등과 함께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다. 그는 반정에 성공한 뒤 호위대장(扈衛大將),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인조 1년) 3월 14일 그는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영변 판관(寧邊判官) 조정호(趙廷虎)가 전일 혐의를 피하고자 한 것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이귀가 말한 조정호는 1590년(선조 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광해군 4년)때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다 한 때 자기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사퇴했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가 승문원저작에 임명되었을 때, 동인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뒤에 사헌부지평으로 발탁되고, 이어 성균관직강·홍문관교리·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간으로 승진되었다. 그는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을 말함)을 태묘(太廟, 종묘)에 합제(合祭)하려고 할 때, 여러 언관들과 함께 강력하게 반대하다가 인조의 노여움을 사 퇴출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일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일이며 그는 이때 언관(사간 즉 대간臺諫)에서 쫓겨나 외직인 영변 판관으로 임명된 상태였다.
이귀는 조정호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변호를 하였다.

“그러나 그만한 인물을 조신(朝臣) 가운데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짝할 자를 얻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나이 80이 된 노모가 있는데 갑자기 영변으로 떠난다는 것도 형편상 쉽지 않고 어미와 서로 이별하게 하는 것도 차마 못할 일입니다. 지금처럼 효를 기본으로 다스리는 때를 당해서는 더욱 정리 상으로도 애달프게 여겨 살펴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율곡 때의 일을 사례로 들어 제안했다.

“일찍이 선묘조(宣廟朝, 선조시대) 때에 김효원(金孝元, 동인의 영수)이 부령 부사(富寧府使)로 가게 되자 선정신(先正臣, 지난 시대의 신하)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김효원은 평소 질병이 많아 멀리 변방에 부임시키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가까운 고을로 옮겨 제수(임명)하소서.’ 하니, 이에 선묘(선조 임금)께서 삼척(三陟)으로 옮겨 제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번에 조정호도 내지로 옮겨 제수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이귀의 제안은 선조 임금이 율곡의 의견을 들어서 임지를 조정하였듯이 조정호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집안의 사정을 참작하여 가까운 곳으로 발령을 내주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조 임금은 갑자기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였다.

“그렇다면 파직시켜라.”

효도를 그렇게 하고 싶으면 차라리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파직을 시켜라는 뜻이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집의 조희일(趙希逸)이 다음과 같이 발언을 하였다.

“조정호가 모자간에 서로 떨어지지 않게 된 것은 실로 성은이라 하겠습니다.(파직되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필자) 다만 이 일로 인하여 파직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인조는 자기 아버지 원종을 종묘에 모시는 문제에 적극 반대했던 조정호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대간의 직책 수행에 있어서는 임금의 과실을 지적하는 것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풍속을 바르게 하고 기강을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죄를 준다면 안 되겠지만, 만약 사정을 좇아 당파를 비호하려는 잘못이 있었을 경우에는 어찌 대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 죄를 다스리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경들은 조정호가 직간을 하다가 죄를 입었다고 생각하는가? 동문서답을 하였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인조는 조정호의 죄를 당파 비호로 몰아가면서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귀는 이러한 임금의 생각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들이 어찌 그가 직간했다고 감히 생각하겠습니까. 다만 그는 착하지 않은 사람은 아닙니다.”

임금이 다시 말했다.

“나는 당파를 비호하려 했던 죄가 착하지 않은 것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인조도 물러서지 않았다. 인조로서는 아무래도 조정호가 괘씸했던 것이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은 자기 셋째 아들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죽는 것을 보았다. 아들이 죽고 그는 홧병을 얻어 술을 가까이 했다.
『광해군일기』(정초본, 147권, 광해 11년 12월 29일)에는 그의 졸기(<원종 대왕 정원군의 졸기>)가 실려 있다.

“왕(광해군. 정원군의 이복형)이 왕위에 올라 골육을 해치고는 더욱 대왕(정원군)을 꺼렸다. 능창 대군(綾昌大君, 정원군의 3째아들)을 죽이고는 그 집을 빼앗아 궁으로 만들고, 인빈(仁嬪, 정원군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할머니)의 장지(葬地)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사람을 시켜 엿보게 해서 죄에 얽어 해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왕은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선조 임금)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사망할 때의 나이가 40세였다.”

결국 인조는 이귀가 말한 율곡의 전례는 따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율곡의 제자들과 지인들, 즉 서인 세력이 조정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어서 수시로 율곡과 관련된 이야기나 사례를 듣고 거기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향으로 쫓겨났던 조정호는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병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