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이이의 문묘 종사를 건의함.

 

조 1년(1623년) 3월 27일, 율곡의 제자들과 지인들이 새 조정의 고관으로 대거 임명되고 10일이 채 지나기 전이었다. 특진관 유순익(柳舜翼)이 인조 임금에게 율곡에 대한 문묘종사를 건의하였다.

“임금은 마땅히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겨 문치(文治, 학문을 통한 통치)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창을 버리고 문예를 닦으며, 말(馬)을 세워 두고 도(道)를 강론한 이가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 눈을 씻으며 새로운 교화를 바라는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더욱더 유술(儒術, 유교 사상과 문화)을 권장해야 합니다. 선현 이이(李珥)를 문묘에 종사(從祀)하면 사론(士論, 유학자들의 공론, 즉 지식인들의 여론)이 흡족해 할 것입니다.”

문치란 학문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정치에서 무력이나 무인을 배제하고 학문을 주요 수단으로 하는 통치를 말한다. 말하자면 성리학에 바탕을 둔 통치를 말한다. 이미 조선은 시작부터 이러한 문치를 통치 이념으로 삼아 성리학이 주요 시험 과목인 과거시험으로 관리들을 뽑고 있었다.
인조에게 율곡의 문묘 종사를 건의한 유순익(柳舜翼, 1559년〜1632년)은 서인 출신으로 1582년(선조 15)에 사마시를 거쳐 159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1606년에 면천군수를 거쳐 예조좌랑·병조정랑·함경도도사·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는 대북파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주장할 때 적극 반대하며, 여론을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그는 큰 공을 세웠다. 서궁(西宮, 즉 인경궁仁慶宮)에 있으면서 반정군이 들어올 때 궁궐의 호위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고 청천군(菁川君)에 봉해졌다.
인조 시대에 율곡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의견은 그가 처음이었다.
유순익의 의견에 대해 인조는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 가벼이 결단할 수 없다.”

이에 승지 민성징이 유순익을 거들었다.

“만약 부당한 일이라면 언제라도 따르기 어렵겠지만, 타당한 일이라면 어찌 어렵게 여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민성징(閔聖徵, 1582〜1647, 나중에 민성휘閔聖徽로 개명함)은 1606년(선조 3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년) 증광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사관·호군(護軍)·사용(司勇), 강원도사, 영변판관(寧邊判官), 금산군수, 여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인조반정을 계기로 내직으로 발령을 받아 동부승지·우승지에 임명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율곡의 문묘종사 논의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나중에 개성부유수, 전라도관찰사, 형조참판, 평안감사, 함경 감사, 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민성징에 이어서 시독관 이민구도 이렇게 건의하였다.

“이이는 범상한 선비가 아니니 속히 종사해야 합니다. 성상께서 이이의 학문에 대해 그 깊이를 모르시기 때문에 가벼이 배향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의 문집을 가져다 보시면 그의 학문의 조예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민구의 이 말은 언뜻 생각하면 인조 임금에게는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시독관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시독관(試讀官)이란 경연청(經筵廳)에 속해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정5품의 관리이다. 그래서 율곡의 학문에 대해 임금이 그 깊이를 모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율곡의 문집을 읽어보라고 권한 것은 임금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입장에서 자연스럽게 추천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임금이 기분을 상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민구는 그해 조정의 추천을 받아 사가독서(賜暇讀書,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에 선발된 관리이기도 하였다.
그는 1609년(광해군 1년)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해 진사에 임명되었고, 1612년에는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이후 예조좌랑, 병조좌랑, 지평 등을 거쳐서 1623년에는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을 접대하기도 하였다. 당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관리 중에서도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이 선발되었다. 그만큼 그는 문장을 잘 쓰고 또 다른 사람의 문장을 읽고 그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율곡의 학문을 말한 것은 그만큼 권위가 실린 것이었다.
이민구는 나중에 대사간, 병조참의, 이조참판, 대사성, 도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사부(詞賦)를 잘 지었다고 하며, 글쓰기를 좋아해서 평생 쓴 책이 4,000권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거의다 소실되어 버렸다. 그의 저술은 『동주집(東州集)』, 『독사수필(讀史隨筆)』, 『간언귀감(諫言龜鑑)』등이 아직 남아있다.
검토관 유백증(兪伯曾)도 나서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율곡의 문묘 종사를 촉구하였다.

“이이의 문묘 종사는 곧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다만 지난날에 공론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거행되지 못한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문집을 보시지 않더라도 속히 문묘 종사를 허락하심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율곡에 대해서는 이미 온 나라의 공론이라고 단정하고 문집을 볼 것도 없이 신속히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헌납 이경여(李敬輿)도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헌납은 사간원의 정5품 관직으로 임금에게 간언을 하는 일을 의무로 삼는 관리, 즉 간관諫官이다.)

“이이를 종사하자는 건의가 실로 공론에서 나왔음을 성상(聖上, 임금)께서도 필시 이미 들었을 것입니다.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그 문집도 혹시 이미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보시다시피 지금 의리가 막히고 도학이 밝지 못하여 선비들의 마음이 그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쾌히 허락하여 일국의 선비들로 하여금 지향할 바를 알게 하소서.”

이에 인조 임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불가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묘 종사는 중대한 일이라 경솔히 할 수 없다. 또 그의 문인 제자 및 서로 아는 자의 말만 가지고 갑자기 종사하는 것도 타당치 않은 것 같다.”

인조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사실 대답은 이렇게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율곡을 문묘에 종사하게 되면 다른 쪽에 서 있는 관리들이나 선비들의 비판을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자신이 앞선 임금(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임금에 오른 입장에서 자신 역시 어떤 빌미를 주어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경여는 1601년(선조 34년)에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년)에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1611년에 검열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었다. 이후 12년이 지난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이 쫓겨나가자 다시 관직에 복귀되어 수찬(修撰)에 취임했다. 그는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이경여가 율곡의 문묘 종사에 대한 임금의 생각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

“신들의 이러한 건의는 곧 일국의 공론이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경여의 이 말에는 광해군 시대에 관직을 멀리하고 10여년간 재야에 은거하면서 격은 고초와 고통이 묻어나 있다. 또한 동시에 백성들의 여론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임금을 끌어내려 준엄하게 몰아낸 혁명세력의 자신감도 언뜻 드러나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