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우계 성혼


율곡과 우계 성혼.

 

곡 이이와 우계 성혼은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인조 1년 11월 2일자 『인조실록』에 <춘천부사 신응구(申應榘)의 졸기>가 실렸다. 이 기사에 이런 글이 있다.

“신응구는 젊어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찍부터 큰 기대를 모아,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받들어 칭찬하였다. 그런데 폐조(광해군) 때 임해군(臨海君, 선조의 큰 아들이며 광해군의 친형이고, 정원군의 이복 형임)의 옥사(獄事)을 당하여 조진(趙振) 등과 함께 정훈(正勳) 공신으로 이름이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집에 있으면서 국가를 걱정한 공신이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뒤에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어서도 행실을 삼가지 못하였다는 비난이 많았으니, 선사(先師, 두 스승)를 욕되게 하였다 하겠다.”

신응구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기사인데 그가 율곡과 성혼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광해군 시대 임해군이 무고로 유배당하여 죽을 때 거기에 참여하여 두 스승을 욕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신응구로서는 억울한 평가이지만 사관은 그가 율곡과 성혼의 공동 제자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성혼(1535년〜1598년)은 율곡(1536년〜1584년) 보다 1살 위이며(양력으로는 2살 위임), 같은 지역, 즉 파주에서 함께 자라면서 같은 선생(휴암 백은걸)에게 글을 배웠다. 율곡은 1548년, 즉 만으로 12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성혼은 16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율곡은 계속해서 과거에 응시하여 1564년(명종 19년, 율곡 28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화려한 관직생활을 출발하였다. 반면에 성혼은 건강문제로 과거를 포기하여 벼슬길을 버리고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다.
두 사람 사이가 서로 매우 가깝고 생활 터전도 가까워 배우는 제자들이 두 사람을 모두 스승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았다. 성리학에 전념하는 성혼과 중앙 조정에서 화려한 관직생활을 해나가던 율곡은 서로 보완적인 환경과 활동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젊은 유학자들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오윤겸, 김장생, 김집, 조헌, 김상용, 이귀, 김자점, 김덕령, 이시백, 조식, 정엽, 윤황, 윤훤, 윤전, 윤방, 조건, 한교, 황신, 정여립, 강황 등이 성혼이나 율곡, 혹은 양쪽을 다 스승으로 모신 인물들이었다. 관직 생활에 바쁜 율곡 보다는 성혼 쪽이 학문에 집중하고 가르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14년을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성혼에게는 제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과의 갈등, 율곡의 죽음, 광해군 시기의 핍박, 성혼의 사망, 인조반정 등을 거치면서 동료의식과 동문의식을 강화해나갔다.
인조 1년 7월 6일 우의정 윤방(尹昉)이 이렇게 임금께 말씀을 올렸다. 윤방은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며 율곡의 문인이다.

“사우(師友, 스승과 벗)의 도(道)가 끊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난 선조(先祖) 때에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유풍(儒風, 유학자들의 기풍, 혹은 유학의 풍습)을 흥기시켜 스승의 도가 크게 융성했었는데, 그 후로 차츰 시들해지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정치를 펼치는 청명한 이때에 관학(館學, 성균관)의 많은 선비들이 모두 흥기하려 하는데, 정엽(鄭曄)이 바야흐로 사장(師長, 성균관장 즉 성균관의 정3품 당상관)이 되었으니 반드시 마음을 다하여 교도할 것입니다.”

윤방은 율곡을 퇴계 이황과 함께 병칭하여 자기 스승인 율곡의 이름을 높혔다. 그리고 퇴계와 율곡이 유학자들의 기풍을 흥기시켜 스승의 도가 크게 융성했다고 언급하며 그 후에는 그것이 차츰 시들해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율곡 이후에 율곡 만한 유학자가 없었다는 말이다.
윤방이 퇴계를 언급한 것은 아마도 퇴계의 제자들인 남인 세력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과 남인은 공동보조를 취했기 때문이다.
인조가 이렇게 물었다.

“스승과 벗의 도가 어째서 이와 같이 끊어졌는가?”

이러한 임금의 질문에 지사 정엽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이는 세상에 이름을 떨친 대유로서 한 시대의 사표가 되어 후학을 인도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성혼(成渾)과 함께 모두 시배(時輩, 그 당시 사람들. 혹은 한때를 만나서 기세를 편 사람들. 즉 동인 무리를 말함)에게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풍습이 크게 변하여 사우의 도가 끝내 끊어지기에 이르렀으며, 간흉(奸兇,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북인 대북파를 지칭함)이 정권을 잡게 되자 세상은 거의 금수의 지경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사기(士氣)가 조금 진작되어 모두들 수칙(修飭, 몸과 마음을 닦고 말과 행동을 스스로 삼감)하기를 생각하니, 이는 대체로 성상(임금)께서 처음 정사(政事, 즉 정치)를 베풀면서 기구(耆舊, 덕망이 높고 사람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노인들)를 초빙하여 유학을 높이 장려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정엽의 설명에 따르면 성혼과 율곡은 함께 동인들에게 배척을 당했으며, 그 이후 광해군 시기에 북인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유학의 도가 무너졌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요즘 젊은이들이 어른을 능멸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모두 사습(士習, 선비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정엽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이런 기풍이 유행하면 그 말류의 폐단이 어느 지경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선조 때에 유몽학(柳夢鶴)의 아들 유극신(柳克新)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천박하고 경솔하여 젊은이들을 모아 이이와 성혼을 헐뜯고 비웃는 자료로 삼고는 심지어 노래까지 만들어 서로 창화(唱和, 어울려서 부름)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정에 있는 자들이 모두 이이와 성혼을 미워하여 그들의 말을 즐겨 들으면서 그르다고 하지 않았던 까닭에 사습이 각박해져서 차츰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편당(偏黨, 한쪽 당파에 치우침)의 병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임금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병이 든 것은 모두 붕당(朋黨, 뜻이나 이익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의 결합체)때문이다.”

인조는 붕당의 폐해를 말하면서 은근히 ‘지금의 서인들도 문제가 있지 않냐?’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정엽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께서 타파하려 하시나 병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 갑자기 제거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정엽의 답변에는 ‘아무리 붕당이 나쁘다고 하지만 서인들이 뭉치는 것을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인조 임금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즈음 나라의 어르신이라고 할 영의정에 대해 젊은 무리들이 그의 잘못을 가벼이 말하니 이런 풍습은 금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시 영의정 이원익을 염두에 두고 한말이었다. 정엽이 임금의 말에 이렇게 맞장구치듯이 말했다.

“이원익은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몸가짐을 청백하게 하니, 이런 사람은 조정의 벼슬아치 중에서 쉽게 얻지 못합니다. 어찌 가벼이 이런 인물을 논한단 말입니까?”

이원익(李元翼, 1547년〜1634년)은 남인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그는 76세의 노구임에도 특별히 조정에 초빙되어 의정부 영의정으로 등용되었다. 반정을 성공시킨 서인과 광해군 시기 비주류로서 대북파의 탄압을 받은 남인이 서로 힘을 합하여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이후에 인조반정이 백성들과 사대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여 이원익은 영의정으로 재직하면서 민심 수습에 힘을 기울였으나 여의치 않았다.(결국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은 1년 만에 사실상 붕괴된다.) 이러한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인조는 정엽에게 요즘 ‘젊은 녀석들(年少輩)’이 나이 드신 영의정을 가볍게 비판한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인조 1년 윤10월 28일 인조가 『대학』을 읽으면서 신하들에게 “나라에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온 나라에 인(仁)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지사 이귀(李貴)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무리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진실로 제대로 기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온 나라에 인(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공자·맹자 같은 성인일지라도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또한 교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임금으로서 어떻게 어진 사람을 위에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귀(李貴, 1557년∼1633년)는 성혼과 율곡에게 배우고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광해군 재위 때인 1616년(광해군 8년)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3년 뒤에 풀려났다. 그리고 1623년 3월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성혼의 이야기로 말을 이었다.

“성혼(成渾)이 일찍이 ‘이이(李珥)가 집안을 다스리는 법은 근래에 드문 바이다. 서모(庶母) 대접하기를 마치 계모를 섬기듯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가훈(家訓)을 지어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온 집안사람들을 나이 순서대로 한자리에 모아 앉혀 놓고 읽도록 하였으며, 또 허물이 있는 자는 그때마다 장부에 적어 두고 정신을 차리도록 꾸짖었는데, 하인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도성의 사대부·서인 모두가 곡을 하고 제사를 올렸으며 서리(胥吏)들도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백성은 부모를 잃고 임금은 보필을 잃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근무하는 군사들도 모두 울음으로 애도 하였으니, 어진이의 효험이란 이런 것입니다. 아내와 자식에게 교화가 행해지는 것은 쉬운 듯도 하지만 이는 반드시 남이 안 보는 곳에서도 부끄러울 일이 없어야 그들이 공경하고 복종하는 법입니다. 혼자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행동 방식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하는 답변이었지만 이귀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율곡의 사례를 성혼의 입을 빌려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성혼은 율곡이 사망한 뒤에 율곡의 행동을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교육의 지침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조 3년(1625년) 2월 22일에 해주의 진사 오첨 등 40여명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인조 1년에 유순익이 율곡의 문묘종사를 청원할 때는 율곡만을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때는 율곡과 성혼을 함께 종사하도록 요청하였다. 『인조실록』의 이날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해주의 진사 오첨(吳瀸) 등 40명이 상소하였다. 상소문에서 선정(先正) 이이와 성혼을 문선왕묘(文宣王廟, 즉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하였다.”

인조 임금은 이러한 상소문을 받아보고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상소문을 살펴보고 그 뜻을 잘 알았다. 공자의 사당에 종사하는 일은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가 지극히 중요하니 아무나 해당될 수도 없고 쉽사리 거행할 수도 없는 것이다. 스승을 존중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간절할지라도 국가의 전례(典禮)를 경솔하게 논할 수 없으니,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고 다시는 이런 일을 말하지 말라.”

인조는 이전에 율곡의 문묘종사를 단호한 태도로 물리쳤듯이 이번에도 굳게 물리치고 ‘다시는 이런 일을 말하지 말라.’고 엄명하였다. 위 인용문에서 ‘공자의 사당’이란 바로 문선왕묘(文宣王廟) 즉 문묘를 말한다.
문묘에 종사하는 일은 아무나 해당될 수 없고 쉽게 할 수도 없다는 말에서 율곡과 성혼에 대한 인조의 판단을 엿볼 수 있다. 인조는 서인들의 힘을 빌려 비록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들의 영수인 율곡과 성혼이 공자의 사당에 모실 정도의 뛰어난 인물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조선의 유학자 중에는 최치현이 1020년에(고려 현종 11년), 설총(薛聰)이 1022년에, 안향(安珦)이 1319년(고려 충숙왕 6년), 1517년(중종 12)에 에 정몽주(鄭夢周)가 각각 배향되었다. 그리고 조선조에서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이 1610년(광해군 2년) 때 문묘 배향이 실현되었다.
이들의 문묘 배향을 유학자들이 선조 때부터 무수히 건의하였으나 선조는 ‘사체(事體, 사리와 체면)’가 중대하는 핑계로 모두 물리쳤다. 광해군 때도 전국의 유생들이 계속하여 상소하고, 고위 관리들이 강경하게 요청을 하였음에도 빈번히 거부하다가 이황이 사망하고 나서 겨우 허가가 났다.
사관은 인조의 답변 아래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평가를 기록하였다.

“반정(反正, 구데타)한 뒤에 이미 이런 의논이 있었고 관학(館學, 성균관)에서도 항소(抗疏)할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정지되었다. 대개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던 것은 영남 사람들 때문이었다. 오첨 등이 재차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어 이 뒤로 이와 같은 상소는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하였다.”

영남사람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모른다. 혹시 퇴계의 제자들일 수 있다. 이들은 서인과 함께 인조반정 뒤 권력을 함께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조정 내에서는 서로가 경쟁관계였기 때문에 율곡과 성혼이 퇴계와 동급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꺼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남명 조식(曺植, 1501년 〜1572년)의 제자들일 수 있다. 조식은 퇴계(음력 1501년〜1571년)와 같은 나이로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난 성리학자로 영남학파의 거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경상우도에는 남명이 있다고 할 정도로 퇴계와는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었으며 사실상 사림들이 선조 때 대거 관가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을 때 남명의 영향력은 퇴계 못지않았다. 류성룡, 김성일, 박승임, 김효원, 심의겸 등이 그의 문하생이며, 광해군 때 정권을 잡아 활약한 정인홍(鄭仁弘), 이이첨 등이 그의 학맥이다. 북인 세력을 이끌었던 이들은 광해군과 함께 몰락하였는데 그래도 여전히 세력을 가지고 있어서 인조는 이들 세력을 경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