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의 관작 회복


성혼의 관작 회복.

 

1623년(인조 1년) 3월 25일,(『인조실록』의 기록) 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예조판서에 임명된 이정구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을 올렸다.

“기묘사화를 겪은 후부터 사람들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았는데, 성혼(成渾)이 차분히 학문하여 사림의 창도자가 되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유일(遺逸, 초야에 묻힌 재능 있는 선비를 천거하여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로 발탁하여 참찬(參贊)을 제수하기까지 하시니 높이고 권장함이 극진하였습니다. 뒤에 정인홍의 무고(근거 없는 고발)를 입어 관직을 박탈당함에 이르렀으므로 사림(士林, 유학자들)이 지극히 분노하였습니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11월(음력)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 죽이거나 귀양 보낸 사건이다.
이정구는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장생과도 친분이 깊었으며 서인에 속하는 정엽(鄭曄)과도 가까운 사이였다.(오세현, 『월사 이정구의 문한활동과 학통의식』,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04, 국문초록 참고) 이 때문에 율곡과 우계 성혼이 사망한 뒤 서인측 선비들이 율곡과 성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서인의 학통을 정비하는데 이정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정구는 또 율곡과 성혼의 행장을 짓고 시호를 요청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이보다 9일전, 즉 3월 16일에 예조 판사에 임명되어 인조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모시고 있었다.
이정구의 발언을 듣고 인조 임금이 이렇게 물었다.

“정인홍의 탄핵이 언제 있었는가?”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광해군 때 정권을 잡은 대북파의 영수였다. 광해군이 이 해(1623년) 실각하면서 처형당했다. 인조는 80세 이상의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다는 기존의 관례를 어기면서까지 그를 참형에 처한 바 있다.
임금이 탄핵시기를 물은 것은 어느 왕 때의 일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정구가 이렇게 답하였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에 있었습니다. 근래에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고 선비의 풍습이 혼란한 것이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3월 16일 대사헌에 임명된 오윤겸이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인홍의 탄핵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성혼이 일찍이 정인홍의 옳지 못한 점을 말하였고, 또 최영경(崔永慶)의 처신이 옳지 못함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못하는 짓이 없이 모함하였습니다. 최영경이 죽음에 이르자 성혼 또한 원통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 아들 성문준(成文濬)을 시켜 위문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어려서 부터 성혼의 문하에 출입하였기 때문에 그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성혼은 곧 이이(李珥)의 친구입니다. 이이와 성혼은 이황(李滉) 이후 일인자로서 그 학문을 펴지 못하고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으니 애석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성혼의 제자 오윤겸은 이이와 성혼을 나란히 언급하면서 두 사람은 친구사이이고, 퇴계 이후 학문의 일인자라고 소개하며 그들이 학문을 펴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애석해하였다.
이에 이정구는 임금에게 건의하였다.

“선조 임금 즉위 초에 특별한 예우를 받고 심지어 임금 스스로가 이이와 성혼의 당(黨, 즉 서인당)이 되고 싶다는 하교(임금의 말씀)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동인들의) 당론으로 쫓겨나 영원히 뜻을 펴지 못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근래 유학자로서 학문의 올바름에 이이와 성혼 같은 이가 없으니, 국가에서 의당 사제(賜祭, 임금이 칙사를 보내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줌)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기에 아룁니다.”

이러한 건의를 듣고 임금이 말했다.

“성혼이 죄를 입은 것은 선왕조의 일이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다.”

정인홍이 성혼을 탄핵한 것을 결국 선조 인금의 결정에 따른 일이니 인조 임금으로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결정한 사항을 자신이 뒤집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만약 광해군 때였다면 인조가 그렇게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윤겸이 임금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임금께서) 새로 즉위하신 때라 좋고 나쁨을 분명히 보여주셔야 합니다. 시비를 잘 살펴 조처해야지, 어찌 선왕조 때의 일이라 하여 망설이실 수 있겠습니까.”

예조판서 이정구가 대사헌 오윤겸의 말을 거들었다.

“선왕조(선조 임금시기)때는 초기에 즉시 명묘조(明廟朝, 명종 때)의 위훈(僞勳, 잘못된 공훈. 잘못 지정된 공신 칭호)을 혁파하였으니, 이것 또한 선왕 때의 일이 아니었습니까? 오직 일의 시비에 달렸을 뿐입니다.”

시비를 따져서 옳으면 추진하면 되는 것이지 선조 임금이 결정한 사항이라고 하여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이에 인조는 다음과 같이 성혼에 대한 복권을 허락하였다.

“공론이 이와 같다면 그 관작을 회복하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기록을 하던 사관은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견을 덧붙여 놓았다.

“성혼은 자질이 순수하고 태도와 행실이 확고하였다. 어려서부터 가정의 훈계를 받아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 도덕의 완성을 추구하는 학문)에 전심하였고, 또 이이와 사귀어 절차탁마의 도움이 있었다. 학문과 실천의 성과를 함께 이루었고, 평소의 언행이나 집안을 다스리는 예법을 한결같이 『가례(家禮)』(주자가례)와 『소학(小學)』에 의해서 행하였다. 파산(坡山)에 은거하여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생을 마치려 하였는데, 선묘(宣廟, 선조임금)께서 그 명성을 듣고 여러 차례 초빙하여 은총과 예우가 극진하였다.”

성혼에 대한 이러한 우호적인 평가는 물론 사관이 서인이거나 서인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파산은 파주 파평면에 있는 산으로 현재 이곳 파평면 눌노리에는 파산 서원이 있다. 파산 서원 뒤편에 경사가 가파른 파산이 있으며 서원 앞으로 우계(牛溪)가 흐르는데 지금은 눌로천(訥老川)이라 부른다.
파산서원은 동쪽으로는 감악산이 우뚝 솟아있고 맞은편에는 파평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작은 마을 파평면 눌노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뒤편 파산(坡山)은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앞으로는 우계(牛溪, 소 개울)가 흐르는데 우계는 현재 눌로천이라 불리며 임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혼의 호가 우계인 것은 바로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선조가 성혼을 자주 부르게 된 것은 율곡의 간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관은 이어서 성혼이 억울하게 탄핵을 받고 결국에는 복권을 하게 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신묘 사화(辛卯士禍, 1591년 선조 24년에 일어난 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성혼이 정철(鄭澈)과 친했다는 이유로 연좌되었고, 최영경의 죽음을 구제하지 않았다고 해서 또한 다른 당의 지목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께서 임진강에 이르러 성혼의 집이 이곳에서 어디쯤인가 하고 그 원근을 물었을 때 이홍로(李弘老)가 망령되게 근처 강변의 민가를 가리켜 (거짓으로) 대답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하기도 하였다.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정인홍이 그 무리를 사주해 상소하여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며 불측하게 모함함으로써 끝내는 관작이 박탈되기까지 하였다.
앞서 최영경이 옥에 갇혔을 때 성혼이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매우 강력하게 구제하니, 정철이 조정에 들어가 임금께 최영경의 구제를 간곡하게 건의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상(임금)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뒤에 와서 도리어 (동인들이 성혼이) 최영경을 모함한 것이라고 죄목을 만들었으니, 이는 군소배(群小輩,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들)가 평소 성혼의 높은 명망을 시기하여 반드시 모함해 해치고자 한 것이다.
성혼이 선조임금과의 만남에서 유종의 미를 보지 못한 것 역시 임금께서 이홍로의 거짓된 보고에 현혹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림(유학자들)이 몹시 애통해 하였고, 태학(太學, 성균관)에서는 여러 차례 상소하여 그 원통함을 호소하기까지 했으나 다 반응이 없었다. 이제 와서 드디어 인조 임금께서 복관을 명하고 이어 제사를 내리며 시호를 주었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축하하였다.”

사관의 이러한 평가는 선조 35년(임인년), 즉 1602년 성혼이 탄핵을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시 사헌부는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 사헌부에서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정철은 천하의 간흉인데, 성혼이 정철과 교분이 깊고 정이 친밀하여 한 몸이 되었으니 모든 모의에 참여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경인년(1590년, 선조 23년) 무렵에 정철이 사방으로 통문을 보내어 쌀과 포목을 수합하여 성혼의 아비 성수침(成守深)의 청송당(聽松堂)의 옛터에 큰 집 한 채를 지어놓고는 정철이 그의 도당을 거느리고 날마다 모여서 성혼의 지휘를 들으며 흉모를 자행하였으니, 성혼은 곧 정철의 모주(謀主, 모의를 꾸미는 두목)입니다.
또 신묘년(1591년 선조 24년) 무렵에 정철이 강계(江界)로 귀양갈 때는 성혼이 파주(坡州)로부터 송도(松都)에까지 따라가서 이틀 밤을 함께 자며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임진년에 적(왜군)이 경성에 접근했을 때는 성혼은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경기의 하룻길 거리에 있었는데도 변란의 소식을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 임금을 모신 가마)가 그가 사는 곳을 지나갈 때에도 나와서 뵙지 아니하였으니, 간사한 인간(정철)의 편을 들고 임금을 저버린 죄는 이에 이르러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비판을 받았던 성혼은 인조반정에 참여한 제자들과 지인들 덕분에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율곡은 그러한 성혼의 친구로서 성혼과 나란히 새로운 조정의 권력자들이 존경하며, 칭송하는 존재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