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과 복권


복직과 복권.

 

조 1년(1623년) 3월 16일의 일이다.

“김장생(金長生)을 장령(掌令)에 임명하였다. 김장생은 타고 난 자질이 훌륭하고 순수하였다. 일찍부터 이이(李珥)를 사사하면서 학문에 침잠하여 당대의 대유(大儒)가 되었다.
계축옥사 때 그의 동생 두 사람이 고발을 당하니, 광해군(전 임금)이 반역을 고발한 자(박응서 – 필자주)에게 친히 이렇게 물었다.
‘김모(金某, 김장생)도 미리 알고 있었는가?’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김모는 현인이라, 저희들의 모의를 그가 들어서 알까 염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김장생은 죄에서 벗어나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뒤 두문불출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강론하니, 양호(兩湖, 충청도와 전라도)의 선비들이 모두 높이 추앙하였다. 이때에 와서 맨 먼저 헌직(憲職, 사관헌의 관직 즉 장령)으로 불러들였다.”

『인조실록』1권, 인조 1년(1623년) 3월 16일자 다섯 번째 기사에 실린 기록이다. 김장생을 사헌부의 장령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율곡 이이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워 나중에 대유학자가 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장령(掌令)’이란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4품 관직이다. 사헌부(司憲府)는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기관으로, 지금의 감사원에 해당한다. 정치를 살피고 관리들을 규찰하는 직책이다.
김장생(金長生, 1548년 〜1631년)은 나중에 문묘에 종사된 인물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대유학자의 반열에 든 사람으로 『인조실록』의 ‘대유(大儒)’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예학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그 아들 김집(金集)은 이를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김장생이 철원부사로 재직하고 있었던 1613년(광해군 5년)에 계축옥사(癸丑禍獄) 사건이 발생했다.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 등이 조령(鳥嶺)에서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범인 일당들이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적서 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무륜당(無倫堂)을 만들고 화적질을 일삼았다.
당시 대원군 밑에서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 관리들은 그들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조작하였다. 그들은 역모를 일으켜 영창대군(광해군의 배다른 동생으로, 계모 인목왕후의 아들)을 옹립하려고 하였으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가담했다고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때 김장생의 서제(庶弟, 서자 동생)인 김경손(金慶孫)과 평손(金平孫)의 이름도 거론되어 그 역시 역모의 의심을 받았다. 당시 그 동생들은 모두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장생도 체포되었는데, 심문 과정에서 무혐의로 풀려났다.
앞에 소개한 『인조실록』의 기록에는 당시 임금이던 광해군이 직접 심문에 참여하여 반역을 고발한 자에게 김장생도 관계하였는지 물었으며, 심문을 받던 자는 박응서였다. 박응서는 우호적인 답변으로 김장생은 위기를 모면하고 고향으로 귀향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대원군이 권좌에서 끌려 내려오고 정권을 잡고 있던 북인의 대북파 관리들이 물러나자 그 자리를 서인과 남인들이 차지하였다. 이들이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대원군을 몰아내는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조가 즉위한 직후에 공신들에 대한 사례가 추진되었고 대원군 시대에 배척 받았던 많은 관리들이 복권되었다.
고향에 내려가 있던 김장생 역시 복권되어 다시 서울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상소문을 올려 늙고 병들었음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다만 임금을 위하여 반정(구데타) 공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임금을 잘 보좌할 것, 민생을 구제할 것, 폐주(광해군)의 생명을 보전할 것, 옥사를 삼갈 것, 인재를 수용할 것, 기강을 진작시킬 것, 공도(公道, 바른 도리 혹은 정의)를 넓힐 것, 탐욕의 폐풍을 혁신할 것 등을 간곡히 경계하였다.
김장생은 어렸을 때, 처음에 구봉 송익필(宋翼弼, 1534년∼1599년)에게 예학을 배웠다. 송익필은 서얼 출신으로 나중에 환천(還賤, 양민의 자격을 잃고 천민으로 돌아감)의 위기에 처했으나,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가 그를 10여년간 먹여 살린 적이 있다. 송익필 외에도 김장생은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학문을 배웠다. 그러나 이날 『인조실록』의 김장생 관련 기록에는 김장생의 스승으로 오직 율곡만 거론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인조반정으로 서인과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음으로써 율곡의 지인들이나 제자들이 다수 중앙의 권력 있는 자리에 속속 배치되었다.
3월 16일자로 김장생과 같이 복권된 인물 몇 사람의 기록을 소개한다.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앞선 조정 때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온 나라 사람들의 중망(重望, 큰 기대)을 받았다. 혼란한 시절 임해군(臨海君, 선조의 장자이며 광해군의 친형)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로 그 일의 부당함을 개진하였고, 폐모론(廢母論, 인목대비를 폐위하자는 논의)이 한창일 때에 또 상소문을 올려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힘껏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인 대북파)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洪川)에 유배되었다가 시골마을로 귀향해 있었다.”

이원익(1547년〜1634년)은 율곡(1536년〜1584년)보다 11살 어리다. 17살의 나이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9년(선조 2)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그는 율곡이 황해도 감사로 있을 때(선조 7년, 1574년경), 율곡 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일을 잘 처리하여, 율곡의 눈에 들었는데, 율곡의 추천으로 1576년 정언이 되었으며, 1578년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이후 선조시대에 그는 우의정과 영의정, 좌의정을 지냈고 광해군 때에도 초기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는 인품이 곧았으며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불필요하게 사람을 사귀거나 어울리기를 싫어하여 공적인 일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율곡은 이러한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자기보다 11살이나 어리지만 존경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원익은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정여립의 옥사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남인의 편에 섰다. 학문적으로 남명 조식을 따르던 사람들은 북인으로, 퇴계 이황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으로 모였다. 광해군 때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제시 하다가 집권파인 대북파에 밉보여 유배를 당했었다.

같은 날 『인조실록』에는 오윤겸(吳允謙, 1559〜1636)의 복직 기사도 실렸다.

“오윤겸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오윤겸은 그 사람됨이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온화하였다. 일찍부터 성혼(成渾)의 문하에 수학하여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성혼이 자주 칭찬하였다. 또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는데 고상한 지조를 지녀 이국인들이 또한 존경하였다. 경신년 이후에 중국에 갈 때는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사신을 보낼 때면 사람들이 모두 기피하였다. 그러나 오윤겸은 사명을 받은 즉시 출발하였으므로 광해군이 이를 가상히 여겨 ‘신하가 된 자의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주위에 권장하였다.”

오윤겸은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1602년(선조 35년) 성혼이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승을 변호하다가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쫒겨 났다가 그 뒤 7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 외직으로 전전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때는 다시 서울로 들어와 호조참의, 우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 광해군 아래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정인홍을 탄핵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다시 중앙으로 돌아왔으나 계축옥사 사건이 일어나 정계가 혼란해지자 부모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여 외지로 나갔다.
그는 1617년에는 일본 파견 사절단의 정사로서 400여 명의 인원을 이끌고 일본에 가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구해오기도 했으며, 1618년 북인들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제기할 때는 이를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1622년는 다시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선발되어,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당시 육로는 여진족의 후금에 의해서 봉쇄되어 있었다. 광해군이 그를 칭찬한 것은 그러한 어려움을 피해서 명나라에 잘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의 스승 성혼은 성리학에 일가견이 있었던 부친 성수침(成守琛)에게 글과 성리학을 배우고 휴암 백인걸(白人傑)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 당시 같은 고을 파주에 살던 율곡도 백인걸에게 글을 배웠는데 두 사람은 이때부터 동문으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서로 동문, 동창 관계이다.
한편 성혼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대신 학문 연구에 뜻을 두었는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사물의 이치 등을 논하기도 하였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깊이 감동하였다. 성혼의 이러한 태도가 오윤겸에 영향을 미쳐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였던 것 같다. 오윤겸은 1623년 대사헌에 임명된 뒤,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위에 소개한 인물들 외에도 서성(徐渻), 정경세(鄭經世), 이수광(李睟光), 박동선(朴東善), 김덕함(金德諴), 윤지경(尹知敬), 조정호(趙廷虎), 정온(鄭蘊), 엄성(嚴惺) 등이 복권되거나 복직되었다. 이들은 대개가 광해군 시대 때 탄핵을 받고 쫓겨났거나 탄압을 받았던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