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문묘 종사 논의


다시 시작된 문묘 종사 논의.

 

곡에 대한 문묘 종사 요청은 그동안 인조 1년에 한차례, 그리고 인조 3년에 한차례 있었다. 인조 1년(1623년)의 요청은 조정에서 고위관리들이 거의 집단적으로 요구한 것으로 인조는 빗발치는 요청을 모두 물리치고 “그(율곡)의 문인 제자 및 서로 아는 자의 말만 가지고 (율곡을) 갑자기 종사하는 것도 타당치 않는 것 같다”고 싸늘하게 물리쳤다.
인조 3년(1626년)에는 해주의 진사 오첨 등 40여명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첫 번째는 율곡만을 요청해서 실패를 하였다고 판단했는지 서인 유생들은 이번에는 성혼과 함께 종사를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에 인조는 “스승을 존중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간절할지라도 국가의 전례를 경솔하게 논할 수 없으니, 그대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고 다시는 이런 일을 말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뒤 10년 가까이 그야말로 임금의 말대로 문묘 종사에 대한 요청은 조정에서 사라졌다.
그 10년 사이에 만주족이 세운 후금이 침략해 들어왔으며(1627년의 정묘호란), 후금이 만주지역을 장악하고 청나라를 세워 장차 조선을 치고 중원을 점령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1635년, 인조 13년 5월 11일 성균관 유생 송시형 등 2백 70여 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이이는 성품이 매우 뛰어나고 총명이 절륜하여 어린 나이에 이미 도(道)를 구할 뜻을 품고 비루한 속학(俗學)에 싫증을 느낀 나머지 백가(百家)를 섭렵하고 이교(異敎)를 드나들었으나, 이윽고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반성을 하였습니다. 단 한 번의 변화로 깊은 경지에 도달한 그의 도학은 지(知)와 행(行)이 겸비하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도학으로 꽉 찼었습니다. 따라서 정미한 도체(道體)를 진즉에 의심 없이 환히 꿰뚫어 보았음은 물론, 또한 그 규모가 웅대하고 심원하며 체용(體用)이 완비되어 있었습니다. 임금을 선도하여 백성에게 혜택을 주고, 앞선 성인을 이어받아 후학을 계도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차라리 성인을 배우다 성인의 경지에 도달을 못할지언정 작은 성취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정(程, 정호와 정이)·주(朱, 주희)의 참다운 맥락을 깊이 체득한 데가 있어서입니다.”

율곡에 대해서는 그동안 서인 측 고위 관료들이 조정에서 지속적으로 임금에게 설명하고 소개를 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임금을 움직여 문묘종사가 성공할 가능성도 있었다. 송시형 등은 다음과 같이 율곡에 대해서 소개를 이어갔다.
“그리고 저술에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배우는 자의 일용 공부에 더없이 절실하거니와, 『성학집람(聖學輯覽)』은 제왕이 닦아야 할 학문의 요점이 골고루 갖추어져서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또 『동호문답(東湖問答)』은 분명한 체(體)와 적절한 용(用)의 실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단 칠정(四端七情) 등에 대한 여러 글들은 여러 선유(先儒)들이 아직 확정하지 못한 논리를 단정하기에 족합니다. 이러한 글들이 모두 남아 있으므로 이를 상고(詳考, 상세히 검토)하여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격몽요결』은 이미 1629년에 황해 감사 이경용(李景容)이 수백 권을 인쇄하여 임금에게 올린 바 있었다. 당시 인조는 내외에 반포하라고 명하기도 하였다. 상소문은 『성학집요』, 『동호문답』 등을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율곡은) 조정에 들어온 이래 좀처럼 나오지 않고 늘 물러나 있기만 하다가 늦게서야 선조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서 계미년(1583년, 선조 16년) 변란 때 병조 판서를 위임받았습니다. 웅대하고 심원한 계책이 치밀하고 동작마다 시의 적절히 들어맞아서 선조께서 거는 기대가 갈수록 커지니, 소인배들의 시기가 더욱 가중되어 보이지 않는 모함과 드러난 배척으로 기어코 헤아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으려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성명의 통철한 지감을 힘입어 거짓과 바름은 저절로 판명되었으나, 불행히도 복이 없어서 배운 경륜을 다 펴지 못하고 세상을 마쳤으니, 뜻있는 선비들은 오늘날까지도 통탄스러워하는 바입니다.”

계미년 변란이란 ‘계미변란(癸未變亂)’ 혹은 ‘계미당사(癸未黨事)’라 하는데, 1583년 계미년에 율곡이 병조판서로 있을 때였다. 북방에 이탕개(尼湯介)의 사변이 있었는데 상황이 급박하여 율곡이 임금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말을 바치게 하고 신역을 면제시켰었다. 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대궐에 나가다가 갑자기 현기증이 생겨 율곡이 내병조(內兵曹, 궁궐내에 설치하였던 병조의 지부)에서 지체한 적이 있었다. 당시 송응개·박근원·허봉 세 사람이 이 일을 가지고 율곡이 ‘일을 제멋대로 하고 주상(임금)을 무시하였다.’고 하여 탄핵을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이 각각 회령·갑산·강계로 유배당하였는데 이 세 사람을 계미 삼찬(癸未三竄)이라고 한다.
송시형 등은 계속해서 성혼에 대해서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계미년에 이이가 소인들의 모함을 받았을 당시 성혼은 서울에 와 있으면서 글을 올려 이이를 변호했다가 다른 편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이홍로(李弘老)의 교묘한 참소를 입었고 나중에는 정인홍(鄭仁弘)의 추악한 비난을 받아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선왕의 거룩한 마음으로도 끝내 보존해 주지 못하여, 황천에서 원망을 품고 있는 지가 벌써 수십 년째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등극하시어 비로소 원망이 해소되었으니, 이는 실로 사문(斯文, 유학)이 흥성하느냐, 침체되느냐 하는 일대 기회로써 그 사이에 어찌 가로 막는 것을 용납하겠습니까?”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지었다.

“대저 두 신하(율곡과 성혼)가 우리 도학에 있어 그 공덕이 이와 같은데도 받들어 보답하는 은전(恩典,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는 특혜)은 여태 소식이 없으니, 이것은 참으로 신들의 죄이자 또한 성세(盛世)의 흠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금 성화(聖化, 성스러운 변화, 즉 임금이 덕행으로 사람이나 백성을 바람직하게 변하게 함)가 다시 새로워지고 있음을 만물이 다 함께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참으로 사풍(士風, 선비들의 기풍)을 고무시켜서 도맥(道脈)을 배양할 일대 기회이기에, 신들이 감히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임금께서는 사문(斯文)이 지극히 중요함을 깊이 생각하고 많은 선비들의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두 유신의 문묘 종사를 결정케 하신다면 그 다행스러움은 이루 가누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건의를 듣고 인조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하였다.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은 비록 착한 사람이기는 하나 도덕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고 있다. 그러니 막중한 문묘 종사의 예전을 결코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이번에 인조는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에 대해서 그것이 불가함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특히 율곡 등 두 사람은 도덕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고 있으니 문묘에 종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사관은 이러한 임금의 태도를 보고 문묘종사를 건의한 송시형 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이는 도학이 고명하고 성혼은 품행이 독실하여 참으로 백대의 유종(儒宗, 유학의 대표)이라 할 만하니, 문묘 종사의 논의는 참으로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론으로 한번 알력이 생긴 뒤부터 훌륭한 사람을 시기하고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는 무리들이 속속 일어나서 왕왕 유언비어를 지어 내어 비방, 중상할 계책으로 삼았다. 임금의 하교에서 이른바 도덕이 높지 않고 하자가 있다는 비방을 받는다는 말도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송시형 등은 시세도 헤아려 보지 않고 노유(老儒)들에게 자문도 구하지 않은 채 부질없이 소회를 개진하였다가, 선대(先代)의 대현(大賢, 율곡과 성혼을 지칭함)으로 하여금 도리어 소인배들의 추악한 헐뜯음을 받게 하였으니, 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관의 이러한 발언을 보면 송시형 등의 상소문은 서인들 내부에서 충분한 논의가 없이 제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나이든 관료나 선비들의 의견은 묻지 않고 성균관 내부의 젊은 학생들이 단합하여 일을 일으켰던 것 같다. 위와 같은 송시형 등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문이 올라온 당일 날 5월 11일 곧바로 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올라왔다. 채진후 등이 율곡 등에 대해 문묘종사 반대의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인조실록』의 이 기사는 사관의 의견이 없고 대신 맨 처음 글머리에 다음과 같은 사관의 소개가 있다.

“관학(館學, 성균관)에서 상소문을 올릴 적에 시기하는 무리들이 명륜당에 모여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어서 건복(巾服, 갓을 쓴 복장) 차림으로 대궐 앞을 걸어서 지나가면서, 성균관 유생에게 축출 당하였다고 외쳐대며 임금이 듣고서 놀라서 노여워하도록 행동하였다. 그러고는 동학(東學)으로 가서 생원 채진후(蔡振後)를 우두머리로 내세워 상소하기를(이하 채진후 등의 상소문이 이어짐)”

채진후 등이 올린 상소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송시형(宋時瑩) 등이 고(故)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의 종사 문제를 가지고 유생들의 원점(圓點, 성균관 유생의 출결을 점검하기 위하여 찍는 점) 시간을 틈타 감히 상소를 할 계획을 제시했는데, 이 말이 한번 발의되자 많은 유생들이 일제히 분개하였습니다. 신들이 비록 이이·성혼 두 신의 학술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이의 사직소 및 선조 대왕께서 성혼의 죄를 책한 전교로 볼 때 종사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채진후(蔡振後, 1602년∼1654년)는 자는 계창(季昌),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증조부는 채난종(蔡蘭宗)이고, 조부는 채경선(蔡慶先)이다. 부친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 채충연(蔡忠衍)과 안사열(安士說)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채유후(蔡裕後, 1599년〜1660년)의 동생이다. 채유후는 1623년(인조 1년) 개시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임명되었으며,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친 뒤, 교리(敎理)·지평(持平)·이조좌랑·응교(應敎) 등에 임명되고, 나중에는 대사헌,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채진후는 성균관 유생들을 규합하여 상소문을 올릴 당시는 생원이었다. 그는 2년전, 즉 1633년(인조 11년)에 치루어진 증광시에서 생원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상소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이가 무진년(1568년 선조 1년)에 부교리를 사직하면서 올린 소에서 ‘소시적에 도학을 찾았으나 학문의 방향을 몰라서 제가(諸家)를 다 섭렵하여 보았지만 귀착지는 잡지 못하고, 신세가 불행하여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어서 슬픔을 달래겠다는 부질없는 생각에 드디어 불교에 빠져들어 산속으로 달려가 불교에 종사하였다가, 오장을 다 끌어내어 씻어도 가시지 않을 오점을 안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끄러움과 격분에 북받친 나머지 죽을 길을 찾았습니다.’고 하였고, 또 ‘옛날부터 석씨(釋氏)의 해독에 빠진 사람치고 신과 같이 특별히 깊이 빠진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그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어서 나온 말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그가 처음 상사(上舍, 소과인 생원진사시)에 선발되어 알성(謁聖, 성균관 문묘의 공자 신위에 참배하는 일)을 할 적에 그가 일찍이 이교(異敎)에 물들었었기 때문에 성묘(聖廟, 공자묘)의 통알(通謁, 참배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하면, 묘정(廟庭, 종묘)의 참배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는데, 하물며 문묘의 종사이겠습니까. 이러고 보면 이이가 문묘 종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곡의 문묘 종사가 적절치 않다는 주된 이유는 율곡이 불교에 일시적으로나마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상소문은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쓴 것은 아니었다. 율곡 자신의 기록에 근거하고 전해지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상소문은 이어서 성혼에 대해서도 이렇게 진술했다.

“성혼에 있어서는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 선조 대왕께서, 성혼을 삭탈 관작하자고 한 양사(兩司, 사간헌과 사간원)의 요청에 답하기를 ‘간흉(奸兇)과 무리를 짓고 군부(君父, 임금과 부친)를 저버린 죄만으로 정죄하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서울을 핍박하였는데, 재신(宰臣, 재상 즉 대신)의 반열에 있는 신하로서 하루거리 이내의 경기 지역에 있으면서도 변고를 듣고 달려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가(大駕, 임금의 가마)가 그의 거처를 지나가던 날에도 배알하지 않았다.
그 뒤 왕세자가 이천(伊川)에 머무르고 있을 적에 그가 멀지 않은 곳에 피란을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간곡히 불렀으나, 처음에는 말이 없다는 핑계를 대더니 말을 보내어 다시 불러도 끝까지 나오지 않다가, 성천(成川)으로 옮긴 뒤에야 비로소 왔다.
그러나 곧바로 북적(北賊, 북쪽에서 내려오는 적)이 장치(獐峙)를 넘어오고 있고 왕세자는 용강(龍岡)으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며 함께 수행하지 않았다. 또 용강이 평양(平壤)의 적과 거리가 가깝자 의주(義州)로 질러가서 보국(報國)은 잊고 자신을 보전할 계책만 세웠다.’라고 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임금을 버리고 국난에 달려오지 않고도 천벌을 면하는 이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채진후 등은 이렇게 의견을 제시하고 자신들의 의견이 결코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이것이 신들의 억측으로 기어코 두 신하(율곡과 성혼)에게 누를 씌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이의 출처는 자신이 다 말하였고, 성혼의 심적(心跡)은 성상(임금)의 비답(批答, 상소문의 말미에 임금이 적는 가부의 답)이 엄존하는 만큼, 시비의 분간은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신들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이어서 이들은 율곡의 ‘문장과 학문이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기에 족하니 현대부(賢大夫)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문묘에 종사하기에는 출처가 바르지 못’하며, 성혼은 ‘이이에도 못 미쳐서 거리가 너무도 먼 데다 간흉과 무리를 지은 정상과 군부를 버린 행적은 수많은 눈이 본 바’이라고 다시 주장하면서 당시 성균관 내부에서 율곡 등의 문묘 종사 상소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소상히 서술하였다.

“성균관에서 회의를 가질 당초에 재임(齋任) 윤유근(尹惟謹) 등이 얼굴을 붉히며 고함치기를 ‘의견이 이미 다른 이상 나가시오.’ 하였는데, 신들이 지적당하여 옆방으로 피신하여 나오자, 다시 사특한 말을 한 사람으로 지목하여 마음대로 삭벌(削罰)하였습니다.
신들이 갈 곳이 없어서 동학(東學)으로 갔더니, 또 학관(學官)에게 단자를 올려서 몰아내도록 하였습니다. 아! 관학(성균관)이란 바로 많은 선비들이 공부하는 집이지 어찌 저들이 독차지하는 곳이겠으며, 문묘란 곧 성현을 봉향하는 곳이지 어찌 사람마다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겠습니까? 뭇사람의 의논이 격앙되어 저절로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국가 종사의 중대함을 아시고 신들의 공통된 논의를 살피소서. 그러면 사문(斯文, 이 문화, 즉 유학)의 다행이겠습니다.”

5월 11일 송시형 등 2백 70여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과정에서 반대파 유생들과의 알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 반대파 유생들의 선봉에 서 있었던 유생중 한명이 채진후였다.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인조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하였다.

“문성공 이이 등의 종사를 청하는 것은 너무도 참담하고 외람되다. 나도 (이이와 성혼이 종사)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인조는 역시 강경하게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채진후의 형 채유후(蔡裕後, 1599년〜1660년)의 5대손 가운데 채제공(蔡濟恭, 1720년〜1799년)이 있다. 채제공은 영조 후반 시대와 정조 시대 남인의 영수였으며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 한사람이었다. 사도세자의 스승이었으며 정조 즉위 후에는 요직을 역임하고 당시 노론과 소론을 아우르며 탕평책을 추진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채제공의 5대조 작은 할아버지가 되는 채진후는 역시 남인 세력과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채진후는 1635년 5월 11일의 사건으로 경솔하다는 질책을 받았다. 위에서 결정이 내려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상소를 올렸기 때문이다. 또 응교(應敎) 심지원(沈之源) 등은 이이의 배향을 건의하며, 채진후(蔡振後)가 정직한 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모함을 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비판으로 채진후는 결국 성균관에서 퇴교를 당하였고,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 시험 자격을 박탈당한 것이다.

다음날 인조 13년 5월 12일에 다시 영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상소를 올렸다. 성균관에서 유생들은 원래 정원이 200명 정도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75명으로 줄었다가 영조 대에 100명으로 늘었다. 인조 때 270여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함께 상소문을 올렸다는 것은 성균관 전체가 움직였다는 말이다. 채진후 등 반대의견을 가진 일부 유생들은 또 반대 상소문을 올렸으니 당시 나라에서 보통 사건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일이 5월 11일(음력)에 일어났는데 다음날에는 영의정과 우의정이 나섰다. 요즘으로 친다면 3명 있는 국무총리 가운데 2명의 총리가 직접 나섰다는 것이다. 사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윤방 등의 상소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였다.

“유선(儒先, 원로 유학자)은 백세의 사표이고 공론은 국가의 원기(元氣)인데, 유선이 모함을 당하면 사도(師道, 스승의 도)가 없어지고 공론이 저지당하면 원기가 병드는 법이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신들이 삼가 보건대, 성균관 유생이 앞 시대의 신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한 것은, 대개 선비들의 논의가 일제히 발의되어서 선현을 높이 받듦으로써 유학의 기풍을 진작시킬 기반을 마련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그 뜻이 또한 가상합니다.
그런데 임금께서 내리신 비답(批答)를 살펴보건대, ‘하자가 있다는 비방이 있다’느니, ‘너무도 참람하고 외람되다’느니 하는 등의 말씀은 신하들이 성상께 바라는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영의정 윤방(尹昉)은 영의정을 역임한 윤두수(尹斗壽)의 아들이며, 율곡에게서 글을 배웠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우참판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하다가 우의정에 올랐다. 1624년 좌의정으로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1627년(인조 5년)에 영의정이 임명되었다.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1561년〜1637년)은 광해군 시대 1617년에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해 벼슬을 버리고 서울을 떠났다. 인조반정 후에는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임명되었고, 이어 병조·예조·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서 서울을 지켰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이 상소문을 올릴 때는 정묘호란 직전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1630년(인조 8년)에 70이 가까워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으며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스스로 늙었다는 이유로 사퇴하였다. 그는 성혼(成渾)과 율곡의 문인으로 황신(黃愼), 이춘영(李春英), 이정구(李廷龜), 오윤겸(吳允謙) 등과 친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며, 인조 시대 초기에 서인이 노서(老西, 나이든 서인파)와 소서(少西, 젊은 서인파)로 나뉘자 노서파 영수의 역할을 하였다.
윤방이나 김상용이나 모두 서인의 중심인물로 재상의 자리에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상소문에서 직접 임금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동안 유생들이 올린 상소문에서 율곡과 성혼에 대해서 임금이 도에 지나친 언급을 한 것에 대해서 거리낌 없이 ‘신하들이 성상(임금)께 바라는 뜻과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라고 직언을 하였다.
이어서 율곡과 성혼에 대해서 다시 이렇게 분명히 말했다.

“두 현신(賢臣, 율곡과 성혼)의 학문적 깊이에 대해서는 저희들의 천박한 지식으로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일생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리학을 닦아서 동정과 언행을 반드시 성현(聖賢)으로 준칙을 삼아, 조정에서 임금을 섬길 때는 요(堯)·순(舜)과 주공(周公)·공자(孔子)의 도가 아니면 앞에서 개진하지를 않았고, 의리를 분명히 밝혀 후학을 계도한 것도 선유들이 밝히지 못한 점을 확충한 것이 많으니, 백세의 종유(宗儒, 으뜸가는 유학자들)라 하여도 될 것입니다. 문묘에 종사된 본조(本朝, 우리나라 즉 조선)의 여러 선현과 비교하여 보아도 아마 부끄러울 점이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조선의 학자로 문묘에 종사된 인물들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이 있었다. 율곡과 성혼의 학문이 이들에 비해 손색이 없음을 강변한 것이다. 상소문은 계속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론이 비뚤어져 가고 시비가 뒤섞인 말세에 태어나 시속의 시기와 질투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고하를 단정 짓는다면 이는 공통된 의논이 아닌 듯합니다.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중대한 일인 만큼, 만약 함부로 의논할 수 없다 하여 신중히 하는 뜻을 보이셨다면 큰 허물은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자가 있다’느니, ‘참람하고 외람되다’느니 하는 등의 말씀으로 하교하시어 많은 선비들이 실망할 뿐만 아니라 공론이 온통 울분을 품고 있으니, 성현을 존숭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성상의 거룩한 뜻에 흠이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윤방과 김상용은 영의정과 우의정의 이름을 걸고 다시 한번 인조임금에게 율곡과 성혼의 행실에 ‘하자가 있다’느니 이 두 사람의 문묘종사 요구에 대해 ‘참람하고 외람되다’느니 하는 답변으로 많은 선비들이 실망하고 있으며 온통 울분을 품고 있다고 단언을 하였다.
이들의 비판은 전날에 기습적으로 제출된 성균관 유생 채진후 등의 문묘종사 반대 상소문으로 향한다.

“그리고 신들은 또 하나의 개탄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당론(黨論)이 갈라지고부터 사람마다 각기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데, 참으로 억지로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선비들이 협의를 거쳐서 성현을 존숭하자는 상소문을 올리고자 한 것입니다.(전날 270여명의 성균관 유생들이 합의를 거쳐 상소문을 올린 것을 말함.) 그렇다면 비록 견해가 같지 않은 자가 있더라도 자기의 견해를 피력하고 그 논의에 참가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일부러 따로 한 떼를 지어 맞서서 진소(陳疏, 글을 올림)하여 못할 말이 없이 성현(율곡과 성혼)을 마구 헐뜯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어찌 선비의 좋은 풍습이겠습니까? 두 현신(율곡과 성혼)이 설령 문묘 종사에 걸맞지 않는다 해도 역시 선배 숙덕(宿德, 오랫동안 쌓은 덕망)이자 선생 장자(長者, 어르신)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데, 선비라는 이름을 가지고서 어떻게 이토록 거침없이 함부로 모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버릇이 자라난다면 선비들이 어떻게 화합할 수 있겠으며, 공론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겠습니까? 인심과 세도(世道, 세상에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날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드는 것이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시고 멀리 고려하시어 조속히 뉘우치는 뜻을 보이시어 사문(斯文, 유학의 도)이 진작되도록 하신다면 유림(儒林)의 다행이겠습니다.”

채진후 등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함을 꾸짖고 그들이 올린 상소문에 적극 동조하였던 임금의 행동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준엄하게 비판하는 말로 점철되어있다. 두 재상은 인조임금에게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좀 더 멀리 고려한 뒤에 ‘조속히 뉘우치는 뜻을 발표하라’고 재촉하였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인조도 당황하였는지 다음과 같이 답을 하였다.

“채진후(蔡振後) 등이 국가의 처치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글을 올린 일은 너무도 경망한 행위이다.”

채진후 등의 행동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인조는 자신이 거기에 동조한 일은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인조는 서인 측 고관들까지 나서서 율곡과 성혼을 두둔하고 이 두 인물이 기왕에 문묘에 종사된 인물들에 전혀 모자라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율곡 등의 문묘 종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다음날 5월 13일, 전날 두 재상이 임금을 대면하여 문묘 종사 반대 의견을 낸 채진후 등을 꾸짖었다는 소식을 들은 송시형 등 성균관 유생들은 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이들은 이날 다섯 차례나 상소문을 올렸다.
이들의 상소문은 처음에 이렇게 시작하였다.

“신들은 모두 몽매하고 비루한 자질로서 오랫동안 인재를 양성하는 은혜를 입었기에, 유현(儒賢, 유학의 현인)을 우러르는 마음을 가누지 못한 나머지 피를 토하며 글을 올려서 유현을 존숭하고 도학을 중요시하는 성조(聖朝, 성스러운 조정)의 성전(盛典, 성대한 모범)을 이룩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신청한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부연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상소문을 올리고 나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하였다.

“그러나 미약한 정성이 믿음을 받지 못한 까닭에 성상(임금)의 비답(批答, 즉 전전날 임금이 외람되다는 답변)이 아득하기만 하였습니다. 신들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 경악할 뿐 아직 성상의 의도를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또 채진후 등이 올린 상소문 초본을 보니, 모함한 내용이나 비뚤어진 말이 하도 낭자하여 정주(程朱, 정호程顥·정이程頤와 주희朱熹)를 헐뜯던 범치허(范致虛)나 심계조(沈繼祖)의 모함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늘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의견이 같으나 다르나 사람들과 화합하여 다 같이 큰 도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잘못이나 어긋난 처사는 없을 줄만 알았지, 이렇게까지 인심이 나빠지고 사설(邪說, 간사한 말들)이 판을 칠 줄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이 통탄스러움을 어떻게 가눌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비답을 보고 깜짝 놀랐던 일, 그리고 채진후 등의 상소문을 읽고 그 내용이 너무도 통탄스러운 것이었다는 점 등을 말하였다. 이어서 상소문은 자신들이 전전날 상소문을 올린 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그저께 신들이 글을 올리고자 성균관에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생원 권귀중(權貴中)·박미(朴) 등 수십 명만이 반대 의견을 제기하였습니다. 유생들의 여론은 일제히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반대자들은) 약간 명으로서는 버틸 수가 없자 곧바로 스스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의리를 들어 분명히 말해 주었는데, 그들은 물러가 동학(東學, 동쪽 학당)에 모여 감히 추한 글를 올려서 (저희들을) 저격할 계획을 달성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신들이 애당초 유선(儒先, 율곡과 성혼)의 공적이나 선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려고 발의한 일이 도리어 횡역(橫逆, 도리에 어긋나는 무례)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신들로서는 눈을 닦고 마음을 가다듬어 전하께 할 말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였기 때문에 다시 상소문을 올려서 자신들의 의견을 전부 말하지 않으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소문에서는 이어서 공자, 맹자, 주자 등이 무도한 사람들에 의해서 훼방과 모욕을 받은 일을 상기시키고 나아가 이이와 성혼도 그런 비방과 모욕을 당했다고 하며 그 전말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였다.

“바야흐로 성혼이 선조의 지우(知遇, 인격이나 학식을 인정해서 잘 대우함)를 받고 있을 적에 높은 총애와 남다른 은혜가 천고에 없던 바여서 심지어는 선조 임금이 ‘나도 이이와 성혼의 무리에 들어가고 싶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필경에는 그 좋던 지우의 만남이 끝까지 온전히 유지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무도한 사람들의) 참소로 인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은 바로 조광조의 일과 똑같은 일로서, 다만 성혼이 화를 당한 것이 조금 가볍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사문의 액운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두 선현의 일월과 같은 광명정대함이야 언제 한 점의 가림이라도 받았겠습니까?”

송시형 등은 이어서 자신들은 율곡과 성혼의 글과 시를 읽으면서 그들의 도학 연원이 이미 문묘에 종사된 선현에게 결코 뒤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때문에 자신들은 감히 가슴속 담고 있던 진실을 진술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상소문을 마쳤다.
인조는 이러한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문을 읽고 “문묘 종사의 예는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고 무익한 말을 하지 말라.”고 냉정히 답변을 하였다.
이에 송시형 등은 이날 다섯 차례나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인조는 답하기를, “따르기 어렵다는 뜻은 이미 다 말하였으니 너희들은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답변을 하였다.

이날 5월 13일에는 성균관 유생들뿐만 아니라 조정의 고위 관료들도 문묘 종사 건에 관련된 임금의 답변을 듣고 글을 올렸다.
먼저 좌의정 오윤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였다.

“신이 교외에서 병들어 있으면서 그저께 저보(邸報,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 사무를 주로 담당한 관청에서 지방 고을로 띄우는 연락 보고 문서)를 보니, 관학(성균관) 유생 송시형의 상소에 대한 답에 (임금께서) ‘하자가 있다는 비방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채진후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는 ‘너무도 참람하고 외람되다.’고 하였기에, 놀라움과 개탄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생각하기를, 전하께서는 이이와 성혼의 학문과 도덕의 깊음과 선왕의 권우(眷遇, 임금이 신하를 특별히 사랑하여 후하게 대우함)가 높았던 사실 및 말년에 (율곡 등이) 참소와 모함을 입게 된 연유에 대해 경연 신하들이 진계(임금에게 사리를 가려 아룀)나 또는 그의 논변과 저술을 통해서 깊이 살피시고 밝게 변별하셨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존경하고 사모하며, 존경하며 믿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온당치 않은 하교(下敎, 신하에게 가르침이나 명령을 내림)를 내리실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는바, 실로 성상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좌의정 오윤겸은 1623년 인조반정 후 노서(老西)파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이조판서를 지냈고, 1626년는 우의정, 1627년 좌의정, 그리고 1628년 영의정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성혼의 제자 이며 1602년에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쫓겨났다가 그 뒤 7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기도 하였다. 또 1610년(광해군 2년)에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있었을 때는,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된 적더 있었다.
전날 임금에게 영의정 윤방(尹昉)과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 항의의 글을 올렸는데 이날은 좌의정 오윤겸 역시 임금의 지나친 발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으니 3정승 전원이 인조의 입장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셈이 되었다.
오윤겸은 특히 자기 스승에 대한 임금의 잘못된 판단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신은 성혼에게 사사 받아 그의 심사를 잘 알고 있는 만큼 성혼에 대한 본말을 진술하고자 합니다. 계미년을 전후하여 선조의 이이에 대한 신임은 물고기와 물의 만남과 같아서 천년만에 단 한번 있을 관계였으나, 소인들의 질투와 시기의 대상이 되어 헤아릴 수 없는 죄에 걸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혼이 마침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서 글을 올려 이이의 충성과 어짊을 논하여 구제하고 당시 사람들의 심술을 공박하였는데, 성상께서 너그러이 비답하기를 ‘어진 이가 국가에 유익함이 이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론으로 지목하게 된 시초입니다.
또 신묘년에 와서 사화가 크게 일어났을 때 이이는 이미 죽고 성혼만이 살아 있었습니다만, 그를 깊이 미워하며 죄를 씌우려 함이 어찌 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성혼은 산야에 살고 있으면서 본시 세론(世論)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양길은 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간당으로 지목되어 죄명이 매우 무거웠습니다.”

아울러 성혼이 전란 속에서 임금을 보필하지 못한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임진왜란 때 마중을 나오지 않은 일은, 사세가 창황하여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가지고 간사한 사람들은 ‘행차가 집에서 지척인 곳으로 지나가는데도 나오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임금을 버렸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아, 임금께서 파천한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가지 않고 편안히 앉아 있을 사람이 하늘 아래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송시형 등의 상소 속에 이미 다 진술되었습니다.”

오윤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전날 상소문을 올려 일을 크게 만든 채진후를 이렇게 비판하였다.

“아, 사도(師道, 스승의 도)가 오랫동안 끊어지면서 학술도 전승을 잃어서 세상에서 선비라고 하는 자들이 글이나 읽는 것으로 업을 삼습니다. 이에 앞선 유학자들의 도학의 깊이와 학문의 깊이를 아는 자가 극히 드무니, 채진후 따위가 성현을 거침없이 마구 모욕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 망녕된 소인(小子)이 스스로 현자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애처로운 노릇이지, 이이와 성혼의 도덕에야 무슨 손상이 가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믿고 독실히 좋아하여 이론에 동요되지 마시어 저 음흉하고 사특한 말들이 밝은 해와 달 아래서 도망칠 길이 없게 하소서. 그러면 유도가 저절로 존숭되고 사습(士習, 선비의 풍습)이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좌의정의 상주문에 인조는 다음과 같은 답을 내렸다.

“이 두 사람(율곡과 성혼)의 장단점은 내가 안 지 오래이다. 부황한 논의에 동요되어 윤허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인조는 율곡과 성혼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 안지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자신이 미천한 성균관 유생의 의견을 듣고 부화뇌동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하였다. 세 대신 모두 인조의 판단에 비판을 하였는데 인조는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대사헌 조익(趙翼)도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조익은 윤근수의 문인으로 역시 서인에 속한 인물이다. 그는 “신의 얕은 지식으로 비록 어진 이의 깊이를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구구한 심정만은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고, 또 두 신하의 일에 있어서는 어른들에게 한두 가지 들은 바가 있기에 감히 전하께 진술하는 바입니다.”라고 하면서 율곡과 성혼의 어린 시절까지 포함하여 그들의 인간됨 그리고 학자로서의 성실함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익의 상소문에 대해서 인조 임금은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5월 13일, 같은 날에 응교 심지원(沈之源)과 교리 윤구(尹坵)아 조석윤(趙錫胤) 등도 상주문을 올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가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채진후 등이 정직한 사람을 미워하였다는 내용을 개진하였다. 아울러 임금이 시비를 분명히 변별하여 선비들의 여론을 진정시킬 것을 요청하니, 임금은 ‘알았다’고 답하였다.

인조 13년(1635년) 6월 6일. 대사헌 조익이 자신의 상소문에 대해서 임금의 답변이 없자 다음과 같이 관직을 물러나고 싶다는 요청을 하였다.

“신이 저번에 글을 올려 이이·성혼 두 분의 덕행을 진술한 것은, 단지 성상(임금)께서 그들에게는 공경하고 사모할 만한 행실이 있어서 옛 현인들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며, 소인들(채진후 등)이 비방하는 말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를 바라서였습니다. 그런데도 성상께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여태까지 한 말씀의 비답도 없으시니, 신이 어떻게 감히 풍헌(風憲)의 자리에 무릅쓰고 앉아서 한 시대의 비웃음거리가 되겠습니까. 체직(遞職, 다른 사람으로 교체함)하도록 명하소서.”

‘풍헌(風憲)’이란 풍화(風化)와 헌장(憲章)을 줄인 말로 조직, 사회의 기강이나 분위기, 관습 등을 지칭하는 말이다. 조헌은 당시 대사헌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대사헌은 중앙과 지방행정의 감찰과 고발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수장이다. 당시에는 사헌부와 대사헌을 비롯한 사헌부 관원을 ‘풍헌’, 또는 ‘풍헌관’이라 지칭하기도 하였다.
자신이 올린 상소문에 대해서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않은 임금을 향하여 관직 사퇴의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인조 임금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이 날(6월 6일)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로 하루 종일 궁궐 안팎이 시끄러웠다.
진사 권적(權蹟) 등은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문묘 종사는 도학(道學, 유교)을 전수한 것만 가지고 논하여야 됩니다. 비록 학문에 힘쓰고 소신을 꿋꿋이 지켰다 해도, 만약 성현의 도를 이어받아서 후학을 계도한 공적이 없다면 참여할 수 없습니다. 이이가 산속에 들어갈 때 15세가 넘었었으니 어린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 안 가서 깨우쳐 마침내 훌륭한 사대부라는 칭찬을 받았으니, 자질이 남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전혀 허물이 없는 군자는 못 됩니다.”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상소문이었다. 권적(權蹟)은 본관이 안동이며, 후일에 대군사부(大郡師傅, 대군의 교육을 담당한 관직)를 역임한 사람인데 후손으로 녹암 권철신(權哲身), 성오 권일신(權日身) 등이 있다. 이들은 남인계 인물들이므로 권적 역시 남인과 가까운 사람으로 추측된다.
인조 임금이 서인 관료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이렇게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도승지 이민구(李敏求)가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도승지는 정3품 당상관직으로 승정원의 우두머리 관직이다.

“근일 (성균관) 유생의 상소에 대한 일을 조정에서 가까스로 진정시켰는데, 지금 또다시 (일부 유생들이) 상소문을 올려 채진후 등과 같이 죄를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할 말이 있겠으나, 다만 분노에 북받쳐서 안간힘을 다하여 장황하게 (자기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 즉 율곡 등 문묘종사를 요청하는 사람들을 )공격한 것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20 명의 연명소를 물리치고 받지 않는 것도 미안할 듯합니다. 어떻게 처리하여야 되겠습니까?”

이에 임금은 들여보내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민구가 또 다음과 같이 보고를 하였다.

“채진후 등 세 사람이 정거(停擧, 과거시험 참가 자격 정지)를 당하였으니, 같이 상소하고서 처벌을 면한 자들이 원점(圓點, 출석 점검)을 받아 (당일 점검에 불참한 죄로) 과거에 응하지 못하는 것은 사리와 형세상 당연한 법입니다. 그러나 50여 명이나 정거를 당한다는 것은 과거를 보여 사람을 널리 선발한다는 도리에 너무도 어긋납니다. 다시 (성균관의) 지관사(知館事)로 하여금 참작하여 선처해서 진정시키는 방도로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신이 출납의 관직에 있는데다 또 사유(師儒, 유학을 가르치는 자)의 자리에 있기에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당시 이민구는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이기도 하였다. 동지성균관사는 실권이 없는 직책으로 다른 일을 하면서 겸직을 하였는데 종2품 관직으로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이민구의 보고에 임금은 그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이날 지관사 최명길이 상소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이민구가 딴 의논을 제기하여 다시 선처토록 하자고 청한 일에 대해서 신으로서는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무릇 일을 처리하는 도리는 시비의 판단이 제대로 들어맞아야만 인심이 승복하고 황당한 논의가 자연히 그치는 법입니다. 옳은 지, 그른 지에 대해 전혀 따지지 않고 한결같이 구제하기만 일삼으면, 진정시키자는 것이 도리어 분란을 더 일으키게 됩니다. 작은 일도 그러한데 더구나 공론이 나오는 태학(성균관)은 어쩌겠습니까?”

최명길(崔鳴吉, 1586년〜1647년)은 윤두수, 윤근수, 이항복, 신흠 등 다양한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운 사람으로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퇴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반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인정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채진후와 함께 과거 시험 자격 정지의 처벌을 받은 성균관 유생들을 구제하자는 도승지 이민구의 제안에 반발하여 상소를 하였다. 그는 문제가 발생된 당일 채진후 등의 행동에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성균관에서 동학으로 가는 데는 직로가 있는데도 그 길을 놔두고 건복(巾服, 갓을 쓴 복장) 차림으로 걸어서 궐문 밖을 둘러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니, 선비의 행실로서 비루하고 수치스럽기가 이보다 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도학이 밝혀지지 않고 사도(師道)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된 사건으로 사유(師儒, 유생들의 스승)로 있으면서 어떻게 앉아서 보기만 하고 바로잡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것은 본시 몇몇 사람의 주창과 부추김에서 나온 것으로, 그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선동과 기세에 몰려서 참여하였을 뿐이므로 깊이 허물할 것은 못 됩니다. 신이 전일 보고에서 주창자 한두 사람 외에는 반드시 깊이 다스릴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최명길은 이어서 자신이 채진후 등의 과거시험 자격 정지에 관여한 것은 그들의 앞날을 영원히 막자는 뜻이 아니었다고 하며 선생으로서 그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방도였을 뿐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채진후 등의 선동에 그냥 따라 참여한 사람도 또 원점(圓點)을 줄이기는 하였으나, 과거에 응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었으니, 벌을 내리려는 뜻 보다는 선도시키려는 의도가 더 컸던 조치라고 강변하였다.
그리고 “그런데도 이런 생각은 내지 않고 다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여 조정의 조치를 아침에 지시하였다가 저녁에 고쳐서 마치 어린아이 장난처럼 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국시가 이 때문에 확립되지 않고 이론(異論)이 이 때문에 날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신으로서는 실로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고 조정의 조치가 조변석개(朝變夕改,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바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자꾸 변하는 조정의 조치 때문에 서로 반대하는 의견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관직 사임의 의사를 제시하였다.

“당초 본관(최명길 본인의 소속관청)이 올린 상주문을 신이 쓰기는 하였으나 이미 동료들의 의논을 하나로 귀결시킨 다음에 아뢴 것입니다. 이는 역시 신 혼자만의 견해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민구의 상주문이 지금 이와 같으니, 체면으로 헤아려 볼 때 실로 온당치 못합니다. 이는 모두가 신이 못난 소치입니다. 더구나 이 밖의 선처하는 길 역시 신으로서는 감히 감당할 바가 아닌 데 어쩌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겸대하고 있는 대제학과 지성균관사 등의 직을 교체하고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옮겨주어, 사유(師儒, 스승)의 선발을 중하게 하소서.”

자신의 잘못으로 이민구의 상주문이 잘못 올라갔으며 이민구가 제시한 제안, 즉 채진후를 따르던 성균관 유생들의 처벌을 선처하는 것 역시 자신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미 공론으로 정해진 처벌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이민구의 제안을 허락한 임금의 조치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인조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이민구가 상주문을 올려 요청한 일에 대해 다시 선처할 길이 없다면 소견이나 개진하면 그만이지, 까닭 없이 사직까지 하며 불평스런 기색을 보이는 것은 실로 옳지 못한 듯하다. 그리고 곧장 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궐문 앞으로 지나간 선비들도 잘못이지만,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여 많은 선비들을 몰아낸 유생들(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요청한 유생들)의 행위는 옳은 처사인가?”

인조는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여 많은 선비들을 몰아낸 유생들(其欲行己志, 驅逐多士之儒)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율곡 등의 문묘종사를 주창하는 유생들을 ‘소수’로, 그 요청에 반대한 유생들을 ‘다수’로 생각한다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상당히 많은 고위 관료들이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고 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200명이 훨씬 넘는 유생들이 그것을 요청하였음에도 많아야 50여명이 되는 반대파 유생들을 ‘많은 선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문묘 종사 반대의사를 굳게 견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해 8월 3일에도 부응교 심지원(沈之源), 교리 김경여(金慶餘), 부교리 박서(朴遾), 수찬 김익희(金益熙) 등이 또 임금의 율곡과 성혼에 대한 답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비답(批答)한 글 가운데 뚜렷이 싫어하는 빛을 보이시어 선비들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고 사문(斯文)으로 하여금 낙심하게 만들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도 한 시대의 선비들로 하여금 의지할 곳이 있게 하고 추향을 바르게 하기를 바라기란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글을 올린 부응교 심지원 등은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 관리에 관련된 사람들이다. 이들을 또 임금의 정치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거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임금을 질책하였다.

“신 등이 삼가 살펴보니, 전하께서 말을 듣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태만해져서 평범한 논핵조차도 윤허하시지 않으며, 조금만 뜻에 어긋나거나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갑자기 뜻을 꺾으려 하십니다. 혹은 과격하다고 의심하시고, 혹은 당파를 좋아한다고 의심하시며, 혹은 명예를 구한다고 의심하시어, 남의 말을 듣기 싫어하는 기색이 사람들을 천리 밖에서부터 막으시며, 매이고 집착하시는 병통이 말하는 사이에 지나치게 드러나십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 인조 임금은 “상주문에서 의견을 개진한 바가 이치에 맞지 않은 바가 없으니, 마땅히 조심스럽게 생각하여 채택해 쓰겠다.”고 답하였다.

8월 9일에는 영의정 윤방이 영남지방의 재난과 수군의 정비 문제 등을 임금과 상의하다 문묘 종사의 문제도 함께 다시 논의하였다.
윤방이 이렇게 말했다.

“지난번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로 연달아 상소하여 누차 호소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결점이 있다는 비방이 있다.’는 교서를 내리셨습니다. 대개 두 현인(이이와 성혼)은 일대(一代)의 유종(儒宗)이요 백세(百世)의 사표(師表)인데, 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사림의 실망이 매우 큽니다.”

이를 듣고 임금이 “이번 종사에 대해 대신의 뜻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이에 윤방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종사하는 것은 혹 백 년이 지난 뒤에 종사를 결정한 경우도 있었고 혹 백 년이 되기 전에 종사를 결정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비록 두 신하를 알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그 종사의 합당함은 의심할 바가 없는 듯합니다.”

이날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이로부터 40여일이 지난 9월 26일 충청도(당시는 공청도) 유생 민여기(閔汝耆) 등이 율곡 등의 문묘 종사에 대해 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임금은 “상소문에서 진술한 일은 가볍게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도록 하라.”고 하였다.
임금의 이러한 일관된 태도가 효과를 발휘했는지 한동안 율곡 등의 문묘종사에 대해서는 조정 안팎으로 거론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다음해 10월 19일 진사 윤성(尹城) 등 수백 명이 상소하여 율곡 등의 문묘 종사를 요청하였다. 임금이 거부하였으나 이들은 계속해서 세 번이나 상소하고 그쳤다.
인조시대에 율곡과 성혼의 문묘 종사 문제는 이것으로 끝났다. 인조는 끝까지 문묘 종사를 거부하였다.

이상으로 율곡의 문묘 종사 문제를 둘러싼 인조시대 지식인들과 인조 임금의 줄다리기를 살펴보았다. 문묘 종사 문제가 이렇게도 중요한 문제인가? 서인의 관료들과 유생들은 왜 이렇게 고집스럽게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주장하고 요청하였을까? 인조 임금은 왜 이렇게 끝까지 그것을 거부하였을까?
조선시대에 어떤 유학자가 문묘에 배향된다는 것은 그 자신의 영광일 뿐 만 아니라 그 집안, 그리고 그 자손의 영광이기도 하였다. 문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니 그곳에서 유학의 도통을 잇는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유학자의 제자들은 바로 그 정통을 이어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는 사회의 주류로서 활동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관직에 들어가면 인맥이 생기며, 초야에 있으면 또 그 도통을 잇는 학자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제자들을 모으는데도 유리하다.
인조 임금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은 서인 측 유학자들 덕분이다. 서인들은 논공행상의 과정을 통해서 중앙 조정에 많은 인물들이 포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자신들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인물로 율곡과 성혼을 지목하여 이들의 문묘종사를 요청하였다. 인조 임금으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조정에 서인들만 가득하여 여론이 한편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자기가 쫓아낸 광해군의 신세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인조 2년에 일어난 서인 이괄의 난은 그런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래서 인조는 남인 세력을 대항마로 키우고자 하였다. 상대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들을 더 결집시킬 수 있는 문묘종사 문제는 외면하고 남인계 인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남인계 성균관유생들은 율곡이 입산하여 불교승려가 되었다는 것과 성혼이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가마를 보고도 찾아보지 않았다며 비난하는 글을 올렸는데 심정적으로 인조는 이들 편이였던 것이다.
인조는 서인들 사이에서 반정에 참여한 서인들과 참여하지 않은 서인들이 서로 의견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공서(功西)’, ‘청서(淸西)’의 구분이 생겼다. 다음에는 나이의 고하에 따라서도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노서(老西)’, ‘소서(少西)’의 구분이 생겼다.
조정에서 수많은 일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차이가 생기고 그 차이가 그 집단의 정체성이 되었다가 또 어느 순간에 없어지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임금의 역할을 무척 중요했다. 신하들의 의견이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뉘는 것도 임금의 의도에 따른 것이다. 결국 신하들의 운명은 임금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인조 임금이 어느 한쪽 의견만을 쫓아서 모든 일을 하게 되면 결국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그들이 결정해버릴 것이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파의 존재가 임금에게는 필요했다. 국가의 대사를 판단할 때는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눈앞에 볼 수 없는 관리들의 악행을 감시하는 일도 한쪽 당파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유교의 가르침을 이용하여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해도 인간의 심성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율곡은 인조 시대를 거치면서 물론 문묘 종사까지는 될 수는 없었지만 많은 논의를 통해서 조선의 정치와 교육 그리고 특히 유교적인 이념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율곡의 학문이 얼마나 뛰어났는가 하는 문제는 당시 많은 학자들도 이야기 하였듯이 ‘잘 알 수는 없다.’ (율곡의 학문에 대한 평가는 독창성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계속 평가가 진행되고 있다.)
단지 율곡은 사람들의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그가 생전에 했던 행동, 미담, 그리고 가르침이 낱낱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아울러 그가 남긴 문헌도 하나하나 소개되고 인쇄되어 조선에서 중요한 고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의 학문, 사상도 많은 유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검토되고 비판을 받고 또 추앙을 받으면서 점차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율곡 이이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 때문에 끝까지 율곡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고 율곡의 학문적 성취나 관리로서의 성실성과 공정함, 그리고 인간적인 고매함을 내놓고 인정하지 않았던 인조는 율곡의 문묘종사를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 일을 마련해두었다. 송시열을 조정으로 부른 일이다.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은 어려서 부친을 통해서 율곡의 『격몽요결』을 배웠다. 그리고 율곡의 제자 김장생과 김장생의 아들 김집에게 학문을 배웠다. 1633년(인조 11년)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2년 뒤에 대군사부(師傅)가 되어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을 가르쳤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모시고 따라가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다. 이후 벼슬길에 대한 욕심을 끊었다. 그러나 인조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그를 가까이 부르고자 노력하였고 존경과 관심을 보였다. 송시열은 이때 대부분 사양하였으나 인조의 이러한 노력은 효종(봉림대군)이 등극한 뒤에 송시열이 조정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나중에 송시열의 활약으로 율곡과 성혼은 우여곡절 끝에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