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崔澱)


최전(崔澱)                                                             PDF Download

1567년(명종 22)~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시인.
서울 출신으로 자는 언침(彦沈), 호는 양포(楊浦),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아버지는 군수 최여우(崔汝雨)이고, 어머니는 상주 이씨다. 이이의 문인으로,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최전은 시문 및 글씨와 그림, 그리고 음악에까지 천부적 재주를 드러내었다. 이항복(李恒福)은 그의 「양포묘갈명(楊浦墓碣銘)」에서 최전을 처음 봤을 때 그의 첫인상과 느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예전에 선조(宣祖)께서 서쪽 교외(서울의 서대문 밖)를 검열하실 때에 나도 가서 보았는데, 날이 저물어서야 보기를 그만두었다. 가서 이웃집에 머물렀는데, 앞서 어린 아이 몇 십 명이 와서 평상복을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마침 그 사이에 별처럼 빛나는 봉황의 눈을 갖고 있는 한 아이가 무리에서 나와 나에게 절하였다. 나와 동행한 친구가 곁눈질을 하고 이야기를 할 때에 아이에게 공손하게 천천히 말하였는데, 마치 도(道)가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겨 팔꿈치로 치며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가 말하기를 ‘자네는 알지 못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신동으로 최씨 집안의 자제 전(澱)이라네’라고 하였다.”

최전은 6세에 부모를 여의고, 맏형인 최서(崔湑: 자는 彦盛, 호는 秋浦)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9세에 집을 떠나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시와 역사를 배웠다. 최전이 어린 나이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단아한 모습과 학문에 전념하는 태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뛰어난 시적 재능을 이이가 ‘천부탁절 덕업불가량(天賦卓絶 德業不可量: 하늘이 탁월함을 부여하여 덕업을 헤아릴 수가 없다)’이라고 칭찬한 까닭에 이이의 문하에서는 나이 많은 문생들도 그와 사귀려고 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흠(申欽) 역시 서문에서 1585년에 두 살 연하인 최전과 함께 진사가 되어 태학에 들어갔는데 “방향도 같고 학업도 같았으므로 눈으로 보자마자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한편 최전이 회시(會試)에 응시했을 때의 일화도 여러 글에 나타나 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야 시험 성적을 매기는 감독원이 이이인 것을 알게 된 최전은, 스승과 제자 관계 때문에 혐의를 받을까봐 시를 쓰고도 내지 않은 채 시험장에서 나왔는데, 이 일화는 사람들에게 최전의 인간됨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항복이 쓴 묘갈명과 임숙영이 쓴 행장에서는 최전의 뛰어난 재능과 아울러 그의 어진 심성과 성실한 태도를 언급하였다. 유가의 경전을 탐독하여 경건하거나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여색에 관심을 두거나 세속에 영합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집안사람들이 닭을 잡을 때 들린 닭의 소리로 마음이 아파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최전은 결국 독서를 위해 절에 들어갔다가, 과도하게 열중한 나머지 병이 들어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이 묘갈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가 죽던 해 문경 양산사(陽山寺)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칩거하며 다시 『주역』을 읽기로 하였는데, 이 때문에 병이 들었다. 손수 주자(朱子)의 책을 썼으며, ‘가부좌를 틀고 정좌하여 묵묵히 코끝을 바라보며 잡념을 없애면 가히 병을 고칠 만하다’라는 등의 말로 수련을 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때 나이가 스물 둘이었으니 아아, 얼마나 짧은가?”

임종 직전에 쓴 듯한 <주역잡설(周易雜說)>에는 『주역』을 읽으면서 느낀 단편적인 생각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주로 성정(性情)과 학문의 자세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최전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최전이 남긴 시의 상당수는 10대에 지어졌다. 아래에 제시하는 두 편의 시는 모두 최전이 시로 명성을 떨치게 한 유년의 작품이다.

늙은 말이 솔뿌리를 베고 누워 老馬枕松根
꿈결에 천리 길을 가네. 夢行千里路
가을바람 지는 잎 소리에 秋風落葉聲
놀라 깨니 해질 무렵. 驚起斜陽暮

이 시는 8세 때에 지은 <노마(老馬)>라는 작품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 시를 입에서 입으로 전송하며 신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늙은 말이지만 꿈속에서는 천리 길을 달리고 싶은 포부를 가진다는 대조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는 시의 제목인 늙은 말에서 연상되는 어두운 분위기 대신 꿈결에서도 천리 길을 달리고 싶어하는 늙은 말이 사소한 낙엽 소리에 놀라 깨는 시상으로 전개됨으로써 재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늙은 말에서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도 고려하고 있다. 천리 길을 질주하는 것은 꿈속에서만 가능할 뿐이고, 현실에서는 소나무의 밑둥을 베고 있을 정도로 노쇠한 말이다. 꿈에서 깬 늙은 말의 주변에 감도는 것은 가을 낙엽과 황혼 무렵이고, 이러한 시적 결말은 다시 늙은 말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시는 늙은 말을 형상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대신, 정조와 분위기 면에서 다가가고 있으면서도 늙은 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눈앞에 그려내고 있다.
<노마>와 함께 최전에게 신동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으로는 윤두수(尹斗壽)가 연안군수로 부임할 때 전송하면서 지은 <별해고졸오음(別海皐倅梧陰)>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최전이 12세 때 이이에게 수업을 받으러 연안(延安)을 지날 때 지은 시로, 이후 이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이 시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아득히 길은 서로 뻗어 있고 遙遙路向西
바라보고 바라봐도 산천이 드넓네. 望望山川豁
예전엔 이 곳의 길손이었건만 宿昔此爲客
오늘 아침엔 여기서 이별하노라. 今朝此爲別
광풍은 내 가는 길로 불어오고 狂風吹我行
멀리 호해(湖海)에서 만날 기약을 할 뿐. 遠作湖海期
기로에서 다시 고개 돌리니 臨岐更回首
유유히 내 마음 아프구나. 悠悠傷我思

이 시는 각 연에 다양한 구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 사용된 첩어 요요(遙遙)․망망(望望)․유유(悠悠)가 모두 비슷한 표현이라는 점에 유념한다면, 이 단어들은 아득한 여로와 함께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감정을 드러내는 시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기로에서 불어오는 광풍(狂風)과 먼 훗날을 기약하는 원(遠), 기로에서 재차 고개 돌리는 심정을 강조한 갱(更)은 각각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확신,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첫 부분에서 서로가 가야할 아득한 길이 제시된 것은 헤어지는 슬픔과 기약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불안함을 투사한 것이고, 갱(更)이라는 부사를 등장시켜 이별의 슬픔을 극대화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아득히 가는 길을 강조함으로써 이별의 아쉬움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어서 그의 대표작인 <제경포이수(題鏡浦二首)>를 소개한다.

봉래산은 한 바탕 삼천 년이 지나면 蓬壺一入三千年
은빛 바다 아득하고 물은 맑고 얕아지네. 銀海茫茫水淸淺
난세 타고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驂鸞今日獨飛來
벽도화 꽃 아래엔 아무도 보이지 않네. 碧桃花下無人見

조원(老子)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건만 朝元何處去不知
옥동(玉洞)엔 아득하게 복숭아가 가득하네. 玉洞渺渺桃千樹
밝은 달 비치는 요단(瑤壇)엔 한기 돌아 잠 못 이루는데 瑤壇明月寒無眠
만리 천풍에 향기가 경포에 가득하네. 萬里天風香滿浦

이 시는 많은 문인들이 경포대를 지날 때 즉각적으로 떠올렸으며, 최전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동지방을 유람하면서 뛰어난 경치를 구경한 체험은 최전에게 있어서 신선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경포이수>에는 최전이 생각하는 이상향이 그려져 있다. 금강산은 삼천년이라는 시간과 은빛 동해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3구에서 화자가 난새를 타고 선인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 곳에 홀로 온다는 시적 설정 역시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보이는 대목이다. 제2수에서 다시 등장하는 도화 꽃의 정경과 청량한 기운, 바람이 드리우는 향취 등으로 경포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모습은 삶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비현실적이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처럼 최전은 시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음악에도 천부적 재질을 발휘하였다. 특히 그림은 매화와 조류를 잘 그렸으며, 글씨는 예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양포유고(楊浦遺稿)』 1책이 있다.

[참고문헌]: 「양포 최전의 시세계-16세기 唐詩風의 한 경향-」(이은주, 『한국한시작가연구』, 한국한시학회, 2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