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귀(李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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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명종 12)~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이며, 호는 묵재(默齋)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아명은 영용(盈龍)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조정에서는 연평(延平)이라는 호칭을 많이 썼는데, 이는 연평부원군이라는 그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다. 1557년 3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인데, 아버지는 아들 이귀와 손자 이시백(李時白)의 영화롭고 높은 지위를 가짐에 따라 영의정에 증직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귀가 출생한 다음 해,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청송부사 권용(權鎔)의 딸이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이귀가 막내아들이다.
이귀의 아명이 영룡인 것은 그의 어머니 태몽에 하얀 용이 물 항아리에 들어있는 것을 본 것에 따른다. 이귀가 2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익산으로 가게 된다. 이정귀(李廷龜)가 쓴 신도비문을 보면, 어머니 안동 권씨는 아버지를 잘 모르는 이귀에게 다음과 같이 아버지상을 기억시키려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외할머니)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은 원래 훌륭한 집안이다. 너의 할아버지 목사공이 기묘명인(기묘사화 때에 피해를 입은 사림들을 기묘명인이라 부른다)으로 매우 어지셨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이 다 바른 가르침을 삼가 지켜서 사람들이 ‘너의 집을 모범적 집안’으로 여겼다. 너의 아버지는 총명하여 보통 자식과 달랐으며,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할아버지 목사공께서 매우 소중히 대하시고, 너의 아버지 또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오직 판서 오상과 승지 유희림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처럼 이귀는 할아버지 양주목사와 아버지의 훌륭함을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익히 듣게 된다. 이것으로 보면, 이귀의 어머니 안동권씨는 상당히 총명하고 부덕이 높은 분으로써, 자녀들의 교육과 훈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4세에 이르자, 시골 익산에서 학업을 위하여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14세 소년으로 서울에 온 이후,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을 만나 같이 공부하며 평생을 같이하는 친구가 된다. 특히 이항복과는 밤새워 놀다가 이별을 아쉬워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된다. 그리하여 선조 말에서 광해군 때에 걸친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는 동지적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이덕형과는 어려서 윤우신(尹又新) 문하에서 같이 배우면서 절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 또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이들과의 이러한 관계는 이귀가 스승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동인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잠시 오성과 한음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을 소개한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수많은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와 그의 후손 이명교가 밝혔듯이, 둘은 과거장에서 처음 만났다. 특히 이덕형의 문집을 보면, 이덕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총 110여 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만 무려 77통에 이른다. 특히 이덕형은 이항복을 ‘형’이라는 매우 격식 없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형도 내 마음 몰라요”라고 징징대는 편지도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는 다만 이덕홍을 위해 지어준 시가 몇 수 남아있을 뿐, 이덕형에게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실려 있지 않다. 20세가 되어 일생의 스승이 되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이 된다. 당대의 대학자인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둔 것이다. 아마도 이귀의 넓고 해박한 지식과 지혜는 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박세채(朴世采)는 이귀를 이이의 고제자(高弟子)라고 말한다. 그는 초기에 과거시험보다 학문에 뜻을 둔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의 권고로 과거공부를 하여 26세 되던 해에 생원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당시의 문과시험에는 사마시(司馬試) 혹은 생진과(生進科)라고 하는 소과시험과 문과라고 하는 대과시험이 있다. 또한 생진과는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작문과 작시를 위주로 한 합격자는 진사(進仕)라고 하고, 경서 위주의 합격자는 생원(生員)이라 한다. 생원과 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하급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귀는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후에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도중에 다시 대과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1590년 34세에 강릉참봉으로 처음 벼슬길에 오른다. 강릉은 선조의 선왕인 명종의 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능의 제기 등 모든 기물을 묻고,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 행재소로 달려간다. 그의 큰형 이보(李寶)는 400명의 익산 의병장으로 진산전투에서 순절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귀는 삼도소모관․삼도선유관․상서원직장․공조좌랑․유성룡의 종사관․장성현감․도총검찰관 등으로 맹활약한다. 왜란이 끝나고 김제군수․군기판관․체찰사소모관․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찰방․백천군수․함흥판관 등으로 선조 때에 18년간 벼슬한다. 특히 정인홍(鄭仁弘)의 죄 10조목을 선조에게 상소하여 정인홍의 대사헌 임명에 반대한다.
1608년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군이 집권할 때에도 함흥판관 차사원으로 서울에 있었으며, 이어서 당상관으로 숙천부사에 임명된다. 1612년 모친상으로 경기도 고양 원당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한다. 여묘는 부모가 죽은 후에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여막을 지어 여묘하는 풍습은 중국의 장례제도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회의 여막의 규모나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예고(禮考)」 <사상례조(私喪禮條)>를 보면,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미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도록 법제화하였다고 한다. 여막의 풍속은 고려 말부터 배출된 주자학자들의 생활에서 더욱 두드러져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가에서 효행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묘살이를 한 자에게 특별히 정려표가 주어졌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일반 상민들은 물론 사대부가에서조차도 보편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닌 듯하다. 다만 부모나 남편의 죽음을 당하여 탈상하는 3년간 상복을 입은 채 일상음식을 피하면서 묘 옆의 초가에서 죽은 자의 무덤을 지키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효도를 다한다는 이상적 규범으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귀는 경기도 고양 농가에서 3만자에 이르는 「갑인함사(甲寅緘辭)」라는 장문의 상소를 광해군한테 올린다. 「갑인함사」는 1614년(광해군 6)에 정인홍 등이 그를 죽이려고 이이첨(李爾瞻)․박재(朴梓) 등을 사주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자고 도모하였는데, 그에 대해 함사로써 임금에게 변명한 내용이다. ‘함사’는 조선시대 관아에 직접 출두할 수 없는 경우 서면으로 진술하는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듣지 않는다.
1616년 친구인 해주목사 최기(崔沂)가 모함을 받아 재판이 진행 중인데, 친구의 의리로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강원도 이천에 유배된다. 1622년 유배와 연금에서 해제된 이귀는 평산부사겸 방어사로 임명된다. 또한 1623년 3월 12일 새벽 2시 홍제원에 집결한 1,000여명의 반란군은 ‘강상윤리를 밝힌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김자점․이귀․이괄․심기원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 반란 후 이귀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된다. 경성호위대장․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대사헌․개성유수․어영사․세자좌빈객․세자이사․지경연사․3차에 걸친 병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우찬성․좌찬성․연평부원군 등의 직책을 수행한다.
1633년 2월 후금 침략에 대비책을 논의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1633년 2월 5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인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연평부원군 이귀의 졸기(卒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던 것이다.

“연평부원군 이귀가 졸하였다. 이귀는 강개한 성품에다 큰 뜻을 품어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자주 글을 올려 국사를 말하였는데, 그 말이 수천마디나 되었다.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정사훈(靖社勳: 인조 때 반란을 평정한 공적) 1등에 포상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고, 충정(忠定)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귀는 조정에 있을 때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간혹 흥분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 대신들을 꾸짖다가 여러 차례 임금의 꾸지람을 받기도 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죽자, 임금이 비통해하며 특별히 하교하기를 ‘연평부원군 이귀는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왔다. 그 충직함이 세상에 비할 데가 없으므로 내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장례에 쓰이는 물건을 평소의 수량보다 특별히 더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묵재 이귀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기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