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방(尹昉)


윤방(尹昉)                                                           PDF Download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윤방의 자는 가회(可晦), 호는 치천(稚川) 또는 치천(穉川), 본관은 해평이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는 정철과 함께 서인(西人)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정승이 되어 서인을 위한 정책을 펴나갔다. 1591년(선조 24) ‘건저문제’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정철과 윤두수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김장생을 조정에 초빙하여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노론(老論)이 뿌리가 내리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저문제’는 1591년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다. 건저(建儲)는 ‘세자를 세운다’는 뜻이니, 세자 책봉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으로도 불린다. 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동인과 서인 간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나타났던 사건이다.
윤방은 어릴 적에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방은 경전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고 종합한 것을 가지고 가끔씩 두 분 선생이 계시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물었는데, 그때마다 두 분 선생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며, 화려하면서도 질박한 표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전후로 명문 출신의 작품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문장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시문학으로 남과 서로 주고받거나 담론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시문학을 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윤방은 1582년(선조 15)에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 후 승문원정자 등을 지냈다. 1591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과 예문관 봉교, 이후 예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1591년 아버지 윤두수가 동인과의 정쟁으로 유배당하자 사직했다가 다시 복귀하여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윤두수가 다시 재상으로 기용되자, 예조정랑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선조 임금의 어가를 모시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따라갔다.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전적으로 전임되었다. 이양원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것은 조식의 허리에 검명(劍銘)이 새겨진 칼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바로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義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것이다.
이후 예조정랑․호조정랑․호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해 7월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선조 임금은 상중(喪中)이던 윤방을 특별히 벼슬에 나오게 하여 사헌부지평에 임명하였다.
어머니의 상과 관련하여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윤방은 아버지와 함께 선조 임금을 호위하여 의주까지 모셨는데, 도중에 길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이때 이미 왜적이 사방에서 들끓고 있었으므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몰래 길을 달려가서 마침내 빈소에 이르러 소리를 내어 슬프게 울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몇 번이나 왜적을 만났지만, 다행히 몸을 피해서 빠져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의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하였다.”

그 후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형조판서․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다. 당시 왜적의 만행이 극심한 중에도 몰래 숨어서 어머니 빈소에 다녀오는 효성을 보였다. 그의 효성과 가족 사랑에 관한 일화를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항상 부모의 안색을 살펴가면서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에 거의 1년간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지냈다. 그의 집안은 형제들로부터 친척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번성하였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침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모두가 그에게 의지하였다.”

부인 청주 한씨는 판관 한의(韓漪)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이지(尹履之)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고, 차남 윤신지(尹新之)는 선조의 둘째 옹주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해숭위에 봉해졌다. 정혜옹주는 선조와 김인빈(金仁嬪) 사이에서 태어난 4남 5녀 중에서 둘째딸이다. 김인빈의 둘째 아들이 처음에 선조가 세자로 세우고자 하였던 신성군(信城君)이고, 셋째 아들이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다. 정혜옹주는 인조의 고모였으므로, 인조는 윤방․윤신지와 특별한 인척관계였다.
또한 윤방은 의학에 대한 지식이 많아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직하였다. 내의원도제조는 의약에 밝고 고관 가운데 겸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궁중에서 임금의 약을 담당하는 내의원을 중요하게 여긴 탓이다.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승정원일기』의 인조 연간 기록에는 한 명의 내의원도제조가 등장한다. 바로 문관이었던 윤방이다.
윤방은 영의정 윤두수의 아들이다. 윤두수는 1555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에,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 등을 역임했다. 이렇듯 높은 관직에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여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로 인조 때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의약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문관으로서 내의원도제조의 자리에서 최명길․이경석 등과 함께 의약을 논하였다.
특히 인조 연간에 내의원도제조를 하면서 인목대비의 폐상증(肺傷證: 폐가 손상된 증상), 두통, 담성해수흉번(痰盛咳嗽胸煩: 가래가 차올라 기침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등의 증상에 각종 처방을 투약한 기록들은 의학에 대한 그의 깊은 학식을 가늠하게 해준다. 그는 인목대비의 폐상증에 대하여 청금강화탕(淸金降火湯: 열로 인하여 생긴 기침에 쓰는 처방), 두통에 대하여 천궁다조산(川芎茶調散)을 처방하고 있다. 또한 인조의 한열왕래(寒熱往來: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 증상)에 대하여 소시호탕가감방(小柴胡湯加減方)을 투약하고, 침구치료에 의해 생겨난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평소부터 인목대비와 인조가 지니고 있었던 질환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특히 차를 마시거나 침구를 시술받아 생겨난 문제점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문관 출신으로서 의학에 깊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윤방은 조선중기 유의(儒醫)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유의’는 유학자로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을 총괄하여 말한다. 그들 중에는 문과 출신으로서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의료행정을 겸하였으며, 왕실에 질환이 있을 때에 다른 의관과 함께 들어가서 진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의원(內醫院)을 비롯한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고관의 권신들은 비록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정통하더라도 실제로는 ‘유의’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한편 문과 출신이면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전문적이 아닌 틈틈이 취미로 의학을 연구하여 그 지식을 가지고 의서의 편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서 선조 때의 좌랑을 지낸 정작(鄭碏)이 유의로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또 전의감․혜민서에서 의학 교수관이 되어 의학교육과 연구에만 힘쓸 뿐이고, 의술에는 직접 종사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니, 유의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이 계급에 속하였다.
1640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 오음리(梧陰里)의 선영에 안장되어 있고, 이식(李植)이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있다. 조익(趙翼)이 윤방의 시장(諡狀)을 썼는데, 그가 윤방을 지나치게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비난을 받고 파면되기도 하였다. 조익은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의 형 윤춘수(尹春壽)의 외손자였으며, 윤방의 장남 윤이지(尹履之)와 동갑이자 죽마고우였다.
여기에서 ‘시장’은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살아있을 때의 그의 행적을 적은 글을 말한다. 『경국대전』에는 종친 및 문무관 실직 정2품 이상과 직위는 낮더라도 친공신에게 시호를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 밖에 대제학을 지낸 자는 종2품이라도 시호를 주었으며,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나 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정2품이 아니라도 특별히 시호를 주었다.
봉작(封爵)은 해창군(海昌君)이며,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에는 『치천집』이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윤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후덕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인품이 중후하고 성품이 지극히 유순하고 근면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다. 또한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덕망이 있었다.”
또한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방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일을 처리할 때 허심탄회하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되 경계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풍채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그를 옆에서 모신 측근도 그가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그의 인품과 기량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참고문헌]: 『위키 실록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