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이중(邊以中)


변이중(邊以中)                                              PDF Download

1546년(명종 1)~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변이중의 자는 언시(彦時)이며, 호는 망암(望庵)이다. 변택(邊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로, 1546년 전라도 장성현 장안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어려서는 향리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20세 때에 우계 성혼에게 나아가 학문을 탐구하고, 21세 때 율곡 이이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로 벼슬에 들어갔다. 변이중이 이이의 문하에서 있을 당시 사계 김장생과 교류하였다. 변이중은 그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문이란 체득하여 행하고 궁구하고 터득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반드시 장진(長進)의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배우는 사람들은 가까운 데서 착수하지 않지만, 그들의 외면적 문장을 보면 공자나 주자와 같은 성인이 아님이 없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들의 큰 병폐입니다.”

이를 보면, 그의 학문은 체득과 실천을 우선하는 경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은 덕에 나아가는 긴요한 법이고, 모든 것이 그르다고 하지 않는 것은 선을 취하는 긴요한 방법이다”라고 하여, 모든 것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항상 잘못을 고쳐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벼슬하는 동안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으려 하였으나, 당시 동인들은 그가 이이의 문인이라 하여 배척함으로써 벼슬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1576년(선조 9) 변이중은 모친상 1년 만에 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상복을 입음에 예를 다하였는데, 특히 묘소 봉우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서쪽 대 위로 나가 묘소를 바라보며 통곡을 하였다. 그 암자를 망암(望菴)이라 이름하였고, 또한 자신의 호로 사용하였다. 그가 상을 마칠 때까지 철저하게 『주자가례』에 의거하였다.
『주자가례』는 중국 남송 시대 주자(朱熹)의 저서로,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의례에 관한 책이다. 본래 책 제목은 『가례』인데, 주자가 저술하였다 하여 통상 『주자가례』라고 부른다. 주자는 남송 때 사람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였는데, 그의 성리학에서 예와 의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대부들이 준수할 의례를 정리할 목적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고려 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주자가례』도 함께 들어왔다. 조선 건국 이후 일반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왕실의 국가 의례를 만들 때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17세기 후반 조선에서 예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주석서가 출간되었다. 책의 체제는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의 네 가지 의례로 편성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보통 4례라고 하면 가정에서 지켜야 할 의례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주자가례』의 상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전통적인 상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변이중은 예학을 치밀하게 탐구하여 1579년 34세 때에는 『가례고증(家禮考證)』 4권을 저술하였다. 윤두수(尹斗壽)에 의하면, 조정의 관리들이 예법을 아는 사람은 변이중과 김장생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35세 때 교서관부정자에 제수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황해도 아사 벼슬에 있을 때 이이가 세상을 뜨자, 스승의 집을 후하게 돌보아 주었다. 이것을 빌미로 이이를 비판하던 무리들로부터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 어천찰발에 제수되고 재임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사․조도어사․도어사 등 여러 직임을 받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세 차례를 상소를 올렸는데, 강화 수비책에 대한 상소는 도성의 보전을 위한 현명한 주장이었다. 그는 모병과 군량 등에 힘쓰면서 “군량을 조달하면서 흩어진 선박을 효과적으로 소집하여 수송에 임하도록 하였고, 이로써 명군과 조선 관군에 군량 공급을 제때에 함으로써 장병들이 허기지지 않고 전쟁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우차(牛車), 그리고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하여 화차 300량을 만들어 전투에 만전을 기하였다. 행주산성 전투에 화차 40량을 권율에게 보내 대첩에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1603년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1605년 사직하고, 그 다음해 겨울 향리로 돌아와 벗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특히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따서 향헌(鄕憲) 10여 조를 만들어 봄가을로 시범을 보이면서 향약보급과 실천에 앞장섰다. 여씨향약은 11세기 초의 중국 북송(北宋) 때에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이다. 협서성남전현 여씨 문중에서 도학(道學)으로 이름 높던 여대충(呂大忠)․여대방(呂大防)․여대균(呂大鈞)․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둘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셋째,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넷째,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
이 향약은 그 뒤 주자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서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1517년(중종 12)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장관에 의해 여씨향약이 널리 공포되었고, 이를 토대로 퇴계 이황은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율곡 이이는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
1611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현재 장성 봉암성원에 배향되어 있다.
여기서는 변이중의 신무기 화차와 총통의 발명이 임진왜란을 타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공헌을 소개한다.
조선은 일본의 침입, 즉 임진왜란을 당하여 초기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는데 매우 어려웠다. 조선은 정상적 국정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뜻있는 선각자들의 의병과 승병 조직에 의한 대응이 약간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전세의 역전을 가져온 것은 행주대첩이었다. 행주대첩은 선조 26년(1593) 2월 12일 수장 권율이 2,300명의 병력으로 왜군 3만의 병사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리하여 행주대첩의 공이 권율에게 돌아가는 것은 그가 수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신무기 화차와 총통의 활용이 있었다. 그 신무기의 발명자가 바로 변이중이었다.
변이중은 행주대첩 이전 1593년 1월 30일 죽산전투에서 우차(牛車)를 이용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패전하자 여러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 패전을 병가지상사로 여겨 자숙하면서 행주 인근 양천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당시 권율은 그의 실책에 적극 변호하였다. 권율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동하자, 일본군 역시 그 이동을 막고자 하였다. 권율은 은밀히 행주산성으로 옮겨 진을 쳤다. 양천에 주둔한 변이중은 신속하게 화차를 제조하였는데, 10여 일 동안 40량을 만들어 권율에게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모사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왜적과 싸워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변이중이 만든 화차는 수레 속에 40군데 총구멍을 내어 구멍마다 승자총(勝字銃)을 장전하고 그 심지를 서로 이어놓아, 한 번 심지에 불을 붙이면 차례로 포가 발사되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이 화차 한 대를 끌고 다니면서 총포를 마음대로 쏠 수가 있어, 이리저리 화차의 방향을 바꾸어 여러 각도에서 왜적과 대응하여 싸울 수가 있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고려 말엽 1380년(우왕 6)에 최무선(崔茂宣)이 금강(錦江) 입구 진포(鎭浦) 싸움에서 처음으로 연속 발사되는 화포로 왜구의 선박 5백여 척을 폭파하여 대승을 거둔 일이 있다. 또 『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의 「군례(軍禮)」에 보이는 ‘사전총통(四箭銃筒)’․‘팔전총통(八箭銃筒)’이라는 화전(火箭)은 화차(火車)의 개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변이중의 화차는 고려 말엽부터 세종 시대를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온 화차를 이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임진왜란 때에 호남지방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 3백 대를 만들어 순찰사 권율에게 보내어 행주대첩을 도왔다. 그 원리는 한 화차에 40개의 구멍을 내고 승자총 40개를 끼워 넣어서 심지에 불을 붙여 연속으로 끊이지 않고 발사하도록 하니 그 소리가 산악을 진동하여 왜군들이 크게 놀라서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화차가 비록 널리 쓰인 것은 아니었으나, 권율의 행주대첩에 사용되어 큰 성과를 내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이 경주를 탈환하는 때에도 이 화차를 써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의 화차 실효성에 대해 김병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이중 화차가 행주대첩에 투입되었을 때, 모두 40대가 사용되었고, 각 화차가 40문의 승자총통을 탑재했으므로 동시에 사격 가능한 승자총통은 모두 1,600문이고, 승자총통 1문은 최대 15발의 철환을 동시에 발사하므로 최대 24,000발에 육박하는 탄환을 적에게 쏟아 부을 수 있다. 이것을 개별 병사가 운용하자면 모두 1,600명의 운용인원이 필요하지만, 화차의 경우 최대 운용인원을 4명이라고 봐도 160명이면 운용이 가능하다.”

이를 보면, 분명 변이중의 화차는 행주대첩 승리에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화차와 총통 등의 발명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특히 화차의 발명은 우리나라 과학사의 지대한 공헌이자 전쟁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공헌이었다. 그 공헌은 수전에서 활약한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응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서에는 『망암집(望庵集)』이 있다.

[참고문헌]: 「망암 변이중 선생의 업적과 공헌」(송재운, 『공자학』21, 한국공자학회, 2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실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