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옥(朴光玉)


박광옥(朴光玉)                                                     PDF Download

1526년(중종 21)~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박광옥의 자는 경원(景瑗)이고, 호는 회재(懷齋)이며,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아버지 박곤이 전라도 광주 선도면 개산리(지금의 서구 매월동 회산)에 터를 잡고 살면서,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1526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며 품행이 단정하였다. 10세 때에 조광조의 문인인 정황(丁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30세 때 향리에서 동지들과 선도향약(船道鄕約)을 정하여 실행하였다. 향약은 조선시대 향촌에서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자치 규약이다. 사회적 공동체인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통제하고 교화해나가던 것이다.
1565년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살면서 몸이 쇠약해져 죽을 지경에 이르자, 광주목사 최응룡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약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삼년상을 마치고, 1568년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월정(水月亭)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박광옥은 개산송당(蓋山松堂)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아버지 박곤이 이곳에 터를 잡고 기반을 다져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한 것으로 보인다. 43세 때에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기 위해 방죽을 막고, 방죽 위에 수월당이란 정자를 짓고, 이 정자에서 기대승과 성리학을 담론하고, 박순․고경명․이이․노진․성세장․김언거․이만인 등이 모여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한 토론·감상 등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고 회재집 연보에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박광옥이 이 곳에서 살면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명망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고, 당시에 방죽을 막은 동기를 선도면 향약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선도향약」 서문에 따르면, “땅이 메마르고 물이 낮아서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지면 모두 재앙을 입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광옥은 이 재앙을 막기 위해 방죽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방죽을 만들었다. 이렇게 볼 때 수월당은 이 지역 문학의 산실이요, 나라를 걱정하는 원근 선비들의 교유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죽에는 지금도 작은 섬이 있고, 방죽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놓아 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어 풍치가 아름답고, 연꽃이 피면 방문객들이 붐비곤 한다. 이 기회에 이 섬이 아담한 정자를 복원하여 박광옥 선생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1574년 49세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운봉현감이 되어서는 태조 대왕이 왜구와 싸워 크게 이긴 황산에 황산비대첩을 세웠다. 1578년 53세에 전라도․충청도의 도사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그 뒤 성균관직강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586년 61세에 광주 교수 겸 제독에 임명되고, 다시 사섬시정 지제교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질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바로 광주목사 정윤우(丁允祐)를 찾아가 의병을 모집할 계책을 의논하고,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1차로 고준봉(高準峰) 형제에게 의병을 거느리고 수원으로가 권율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내에 다시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광주관문 앞에 모인 의병을 이끌고 출병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의 몸이 늙고 병이 들어 장수의 직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소모접제(召募接濟) 책임자로 추대하고, 소집된 병사들은 고경명에게 예속시켰다. 이에 담양에서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금산으로 출병하게 되었다. 이때 김천일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어 선생의 의병출병을 만류하였다.

“전장에 참여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이요. 고향에 남아 지방을 방위하는 것도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방에서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국사는 장차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의병의 승패는 오로지 선생의 뜻에 달렸습니다.”

이에 새로 광주목사에 부임한 권율과 의병 수 천 명을 모아 권율이 출전하게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박광옥은 계속해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집․보급하면서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려는 왜군을 막았다. 그리고 승병으로 처영(處英)을 독산에 있는 권율에게 보내어 도왔다. 1592년 7월 21일 의병활동의 공로로 나주목사로 임명되었다. 부임 관아에 의병청을 세우고, 각 읍에 격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여 12월 11일을 출병일로 정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준비하였으나, 갑자기 병세가 위독하여 출병할 수 없게 되었다. 의병 도청에 모인 사람들이 출병을 잠시 멈추고자 하는 요청에 따라, 의병과 군량미를 권율과 김천일 두 장군의 진영으로 나누어 보내고, 자신은 질병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593년(선조 26) 3월 권율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서울을 수복한 다음 서신으로 문병을 하였다. 그해 10월 26일 나라의 중흥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1602년(선조 35) 지방의 유림들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벽진촌에 사우를 세워 벽진서원이라 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선생을 도승지에 증직하고, 사우는 ‘의열사’라 사액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운봉의 용암서원에도 배향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집목판과 영정은 운리영당에 모셔오다가, 1999년에 운리사(雲裏祠)를 복원하고 봄가을로 향사하고 있다. 그리고 선생의 유집목판은 1996년 3월 19일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에 전한다.
광주에 회재로(懷齋路)라는 가로명이 있다. 회재 박광옥을 기리기 위한 가로명으로 광주광역시에 의해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의병의 호남의 진원지인 담양과 나주의 의병을 회재선생이 주도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살았던 지역을 통과하게 되어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
박광옥의 작품은 모두 한문문학으로, 이를 망라하여 전하는 문헌은 『회재집』이다. 박광옥의 학문은 유사경이 쓴 행장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그의 반평생의 학문은 전적으로 성리학에 있었다. 만년에는 더욱 『주역』․『계몽』․『가례』 등의 글이 힘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천문산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구하여 학문이 쌓이고 쌓였다. 일찍이 문장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글귀의 내용이 무게가 있고 아름다워 옛 분들의 정취가 담겨 있으며, 편지사연이 특히 좋았는가 하면 필법이 또한 굳세고 자유분방하였다.”

박광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큰 사위 유사경의 방광옥 학문에 대한 언급이다. 항상 문하생들에게 말하기를 “인(仁)을 좋아하고 불인(不仁)을 미워한 뒤에 가히 인의(仁義)의 도리를 다 실천하였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인품과 학문에 대한 명망으로 당대 유명했던 사람들과 두터운 교분을 갖게 되었다. 박순(朴淳)․노진(盧禛)․성세장(成世章) 등과 서로 덕으로 깊이 사귀었고, 기대승(奇大升)과는 어려서부터 왕래하며 절차탁마하는 사이였다. 따라서 『대동풍토기』에는 기대승․박상(朴祥)․박순․박광옥을 광주의 도학군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유경심(柳景深)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박광옥은 자신의 토지를 내어 향교의 재정을 도왔으며, 향교의 제도를 확충하고 그 규범을 정비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고을의 선비들이 향교의 중건을 기념할 때에도 전면에는 기대승의 글을, 후면에는 박광옥의 글을 새기는 것을 보아도 그의 학문을 짐작할 수 있다. 『회재집』 발문에서는 “회재 선생은 도학과 문장에서 한 시대의 사표가 되었으니, 선현들의 훌륭한 점을 본받아 후학에게 큰 공을 끼쳤다”라고 적고 있다.

[참고문헌]: 「회재 박광옥의 생애와 학문」(이종일, 『향토문화』23,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