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魯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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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명종 21)~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장수.
노인의 자는 공식(公識),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함풍(咸豐)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증이조참의 노사증(魯師曾)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이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외종숙부인 이나항(李羅恒)에게서 수학하였다. 7세에 아버지로부터 김인후(金麟厚)의 학행을 흠모하는 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김인후를 흠모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맑은 달이 쌓인 눈을 비치니
빛이 나의 창문에 비치는 도다.
누구와 이 광경을 함께 하리요
김가는 세상에 둘도 없도다.

14세 때에는 이정구(李廷龜)와 김광운(金光運)을 따르고 섬겼으며, 정개청(鄭介淸)을 스승으로 모셨다. 백광훈(白光勳)과 임억형(林億齡)과는 금성선사에서 함께 수학한 친구 간이었다. 그는 향리에서 고경명(高敬命)․기대승(奇大升)․나세찬(羅世纘)․나덕준(羅德峻) 등과 교유하였다. 당시 기대승에게 보낸 시가 전한다.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쫓아 힘쓰는데
고봉의 숨은 마음만 천성을 보전한다.
고요한 가을 강에 낚싯대 드리우고
싸늘한 촌락에서 십 년 공부를 쌓으니.

그는 명리를 쫓지 않는 기대승을 흠모하였고, 그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17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다. 그는 진사에 급제한 뒤에 이이를 찾아가 가례(家禮)를 묻기도 하였다. 이때 이이에게 올린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낮은 사람을 사랑하는 이가 없는데
선생은 나를 멀리하지 않는다.
작은 자리에 앉아 글을 논하니
학업에 힘써 집안을 일으켜라 하신다.

20세 때 이정구를 만나 ‘도의지교(道義之交: 도의로써의 사귐)’를 맺고, 23세 되던 해에 이정구와 ‘성정체용(性情體用)의 설’을 주고받았다. 이로써 그가 성리학에 많은 공부를 할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노인은 당대의 이름 있는 이수광(李睟光)․이춘영(李春英)․이덕형(李德馨)․강항(姜沆) 등과 교유하였다. 노인은 1612년(선조 45) 그의 나이 47세 때에 사례집설(四禮集說)을 지어 조위한(趙緯韓)과 이를 토론하였고, 그리고 당대 예학의 최고 권위자인 김장생(金長生)에게 문의하여 수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유성룡은 노인을 평가하여 “명나라를 견문하고 주자서원에 있는 양현사(兩賢祠)에서 엄격히 학업을 닦았으며, 시서(詩書)에 능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후일 정조 때 이굉택(李宏宅)이 노인을 평하여 “문무를 겸비한 군자이다”라고 한 것과, 오시학(吳時學)의 “도학과 절의가 빛났다” 등의 기록은 비록 후인들의 추모라고 하더라도 노인의 사림정신과 학문정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성리학이나 논설 등의 글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무인으로 활동한 그 이면에는 그의 성리학적 의리와 심성론의 바탕이 깔려있어 그것이 가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노인이 활약한 청․장년기는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노인도 임진왜란 의병의 선봉이 되어 국난 타개에 투신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 20여만이 바다를 건어와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경상도와 충청도를 유린하고 도성으로 진군하였다. 백성은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때에 광주목사 권율(權慄)이 노인에게 “국가가 전란을 만났으니, 신하된 자는 마땅히 죽음으로 갚을지라. 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는 것이 어떠하리요”라는 글을 보내 의병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노인은 임금과 신하가 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의리임을 설파하고, 의병에 동참하였다. 이때 노인의 나이가 27세였다. 노인이 권율의 진영으로 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 세상에 당하여
월왕의 부끄러움을 늘 생각한다.
우주에 창칼이 가득하니
시서(詩書)의 뜻을 그만두려 하노라.

그는 약 100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권율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이에 권율은 모의(募義)라는 깃발을 만들어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권율의 휘하에서 남원성을 검문하고 방어하는 참모가 되었다. 1592년 7월 8일에 왜군이 진산(오늘날 금산) 지역으로 남하하자, 노인도 군대를 이끌고 진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왜군 900명이 사살되었으며, 조선인 포로 50명을 구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진산대첩’이었다. 이 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호남은 왜군의 진출이 저지되었고, 후방 병참기지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12월 27일 왜군 5천명이 다시 진산을 침략하였다. 노인 부대도 대응하여 왜군을 크게 토벌하였다. 승전보를 전해들은 권율은 “노인이 있는 한 적이 두렵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 후 노인의 이름은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날은 해상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써 전세가 조선에 유리하게 되었다. 조선이 승기를 잡은 것이다.
1593년 정월에 노인은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군졸을 인솔하여 권율과 합류하였다. 행주대첩에서 노인은 권율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노인은 선봉에 서서 싸워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일본군 사상자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후 권율이 선조에게 노인의 전공에 대해 포상을 건의하려하자, 그는 죽을힘을 다하는 것이 군자로서의 직분이라 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1593년(선조 26) 초 명나라와 일본 간의 화의(和議)가 진행되면서 4월경에 일본군대는 영남으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다시 상주․선산․안동․대구 등에 잔류하고 있다가, 그 외 울산․동래․거제․김해의 잔류 왜군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13만의 규모를 자랑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1593년 6월 22일부터 대접전이 시작되었으며, 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김시민 장군 이하 최경회 등 많은 병사들이 순절하였다. 1593년 6월 왜군이 진주성을 총공격할 때 노인은 모의사(募義使)가 되어 경상도 의령 방면으로 가서 잔류 왜군을 협공하였다. 이때 모의 깃발을 날리며 왜적들을 추적하자 “진산의 승전장이 또 왔다”라고 하며 왜군들이 도망하였다.
1595년(선조 28)이 되자, 노인은 정월 초하루 도원수 권율을 찾아가서 명나라 장군 진운학(陳雲鶴)과 함께 시국을 논하였다. 6월에 영남으로 왜군이 침투하여 부산이 함락되었다. 그해 3월 권율과 함께 순천진으로 옮기고 항시전투 중 선봉에 나섰으며, 권율의 참모로 협력하였다.
1597년(선조 30) 7월 7일 노인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하동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 후 각처에 왜군이 창궐하자, 양친을 피난시키기 위하여 권율의 진지를 나와 고향인 금성으로 돌아왔다. 1597년 7월 21일 부모양친을 모시고 연고가 있는 의령을 향해 출발하려고 금성산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왜군이 나타났다. 대검과 창을 든 왜적이 사면을 포위하였다. 노인은 손을 벌려 양친을 감싸 안았다. 이에 왜적들이 효성에 감동하여 ‘물해효자(勿害孝子)’, 즉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글을 써 놓고 물러갔다. 이 상황에서 두 아들을 노탄회(魯坦回)와 노참(魯參)을 잃어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8월 10일 왜군들이 남원으로 이동한다고 하는 정보가 있자, 권율은 노인에게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원군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갔다. 그러나 왜군들은 남원성의 사면을 완전히 포위하고 15일 야간을 이용하여 성으로 올라왔다. 이에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노인은 역전하며 왜적들을 무찌르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려 돌아가려 하였으나, 갑자기 수많은 복병을 만나 포위되고 말았다. 노인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고 쓰러져 왜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1597년 8월 15일이었다. 그는 순천의 왜군 진지로 이송되었다. 이로부터 노인은 약 19개월간의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1599년 3월 15일 일본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갔다. 이후 중국의 남쪽 복건성과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1599년 12월이었다. 그의 나이 34세이었다.
그 후 노인은 1604년(선조 37) 당포(통영)해전에서 진용교위(進勇校尉)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왜구의 선단을 완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해전의 통제사는 이경준(李慶濬)이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이후 국지전이지만, 일본이 침략한데 따른 응전의 성격으로 조선이 큰 승리를 하였다. 선조는 이 해전의 승리를 기념할 수 있도록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를 그리도록 하여 참전 장수 28명에게 하나씩 하사하였다.
1605년(선조 38) 겨울 노인은 『소오책(沼吳策)』이라고 하는 조선이 일본을 멸망시킬 계책을 적은 복수책을 선조에게 올렸다. ‘소오(沼吳)’는 복수의 뜻으로 궁전이 연못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오나라 오원(伍員)이 죽으면서 20년 뒤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켜 오나라 궁터가 연못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월나라 왕인 구천(句賤)이 오나라 왕인 부차(夫差)에게 원수를 갚게 된다는 말이다. 이 고사와 같이 조선이 일본을 멸망시킬 계책을 말한 것이다.
이듬해 봄 선조는 이를 받아보고 “신하가 사직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계책”이라 하고, “마음과 몸가짐이 언제나 깨끗하고 근면한 생각을 가졌다”라고 치하하였다. 선조는 노인에게 수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607년 그는 황해수사 겸 옹진도호부사가 되었다. 노인은 군무를 잘 다스리고 청렴하게 근무하였다.
1608년(선조 41)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노인은 북인정권 하에서 홀대를 당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대북파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과의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중국의 황제 신종(神宗)이 내린 소승마(小乘馬)가 있었다. 귀국 길에 타고 가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인홍이 이 말을 사고자 하였고, 노인은 “이 말은 황제가 준 것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고 거절하였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정인홍은 노인을 군산의 만호(萬戶)로 좌천시켰다. 그래도 노인은 군무에 충실하게 일하였다. 그러다가 광해군 때의 정국이 점차 혼란해지자 병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행방불명된 두 아들 노탄회와 노참을 슬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1622년(광해군 14) 5월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금산의 금곡사(金谷祠)와 나주의 거평사(居平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 6권 2책 외에, 일본에서 포로생활과 명나라 체류기간 동안 그가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남긴 『금계일기(錦溪日記』와 『간양록(看羊錄)』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금계 노인 연구」(노기욱, 조선대학교 석사논문, 20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