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옥(朴光玉)


박광옥(朴光玉)                                                     PDF Download

1526년(중종 21)~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박광옥의 자는 경원(景瑗)이고, 호는 회재(懷齋)이며, 본관은 음성(陰城)이다.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아버지 박곤이 전라도 광주 선도면 개산리(지금의 서구 매월동 회산)에 터를 잡고 살면서,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1526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며 품행이 단정하였다. 10세 때에 조광조의 문인인 정황(丁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46년(명종 1)에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30세 때 향리에서 동지들과 선도향약(船道鄕約)을 정하여 실행하였다. 향약은 조선시대 향촌에서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자치 규약이다. 사회적 공동체인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통제하고 교화해나가던 것이다.
1565년 가을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시묘를 살면서 몸이 쇠약해져 죽을 지경에 이르자, 광주목사 최응룡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약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삼년상을 마치고, 1568년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월정(水月亭)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박광옥은 개산송당(蓋山松堂)을 짓고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아버지 박곤이 이곳에 터를 잡고 기반을 다져 비교적 넉넉한 살림을 한 것으로 보인다. 43세 때에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기 위해 방죽을 막고, 방죽 위에 수월당이란 정자를 짓고, 이 정자에서 기대승과 성리학을 담론하고, 박순․고경명․이이․노진․성세장․김언거․이만인 등이 모여 시를 짓거나 시에 대한 토론·감상 등을 위한 모임을 가졌다고 회재집 연보에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박광옥이 이 곳에서 살면서 이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명망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고, 당시에 방죽을 막은 동기를 선도면 향약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선도향약」 서문에 따르면, “땅이 메마르고 물이 낮아서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지면 모두 재앙을 입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에 박광옥은 이 재앙을 막기 위해 방죽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방죽을 만들었다. 이렇게 볼 때 수월당은 이 지역 문학의 산실이요, 나라를 걱정하는 원근 선비들의 교유 장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죽에는 지금도 작은 섬이 있고, 방죽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놓아 서구청에서 관리하고 있어 풍치가 아름답고, 연꽃이 피면 방문객들이 붐비곤 한다. 이 기회에 이 섬이 아담한 정자를 복원하여 박광옥 선생의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한다.
1574년 49세에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운봉현감이 되어서는 태조 대왕이 왜구와 싸워 크게 이긴 황산에 황산비대첩을 세웠다. 1578년 53세에 전라도․충청도의 도사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그 뒤 성균관직강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586년 61세에 광주 교수 겸 제독에 임명되고, 다시 사섬시정 지제교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질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는데, 왜구의 침입 소식을 듣고 바로 광주목사 정윤우(丁允祐)를 찾아가 의병을 모집할 계책을 의논하고,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였다. 1차로 고준봉(高準峰) 형제에게 의병을 거느리고 수원으로가 권율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도내에 다시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광주관문 앞에 모인 의병을 이끌고 출병하려고 하였으나 선생의 몸이 늙고 병이 들어 장수의 직책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선생을 소모접제(召募接濟) 책임자로 추대하고, 소집된 병사들은 고경명에게 예속시켰다. 이에 담양에서 고경명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금산으로 출병하게 되었다. 이때 김천일이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어 선생의 의병출병을 만류하였다.

“전장에 참여한 것도 국가를 위한 것이요. 고향에 남아 지방을 방위하는 것도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더구나 지방에서 근본이 한번 흔들리면 국사는 장차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의병의 승패는 오로지 선생의 뜻에 달렸습니다.”

이에 새로 광주목사에 부임한 권율과 의병 수 천 명을 모아 권율이 출전하게 되어 많은 공을 세웠다.
박광옥은 계속해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수집․보급하면서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어오려는 왜군을 막았다. 그리고 승병으로 처영(處英)을 독산에 있는 권율에게 보내어 도왔다. 1592년 7월 21일 의병활동의 공로로 나주목사로 임명되었다. 부임 관아에 의병청을 세우고, 각 읍에 격문을 보내고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여 12월 11일을 출병일로 정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준비하였으나, 갑자기 병세가 위독하여 출병할 수 없게 되었다. 의병 도청에 모인 사람들이 출병을 잠시 멈추고자 하는 요청에 따라, 의병과 군량미를 권율과 김천일 두 장군의 진영으로 나누어 보내고, 자신은 질병으로 사직소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593년(선조 26) 3월 권율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서울을 수복한 다음 서신으로 문병을 하였다. 그해 10월 26일 나라의 중흥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1602년(선조 35) 지방의 유림들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벽진촌에 사우를 세워 벽진서원이라 하였다. 1681년(숙종 7)에 선생을 도승지에 증직하고, 사우는 ‘의열사’라 사액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운봉의 용암서원에도 배향되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령에 의해 훼철되어, 유집목판과 영정은 운리영당에 모셔오다가, 1999년에 운리사(雲裏祠)를 복원하고 봄가을로 향사하고 있다. 그리고 선생의 유집목판은 1996년 3월 19일에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에 전한다.
광주에 회재로(懷齋路)라는 가로명이 있다. 회재 박광옥을 기리기 위한 가로명으로 광주광역시에 의해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의병의 호남의 진원지인 담양과 나주의 의병을 회재선생이 주도하고, 성리학을 연구하며 살았던 지역을 통과하게 되어 더욱 의미가 크다 하겠다.
박광옥의 작품은 모두 한문문학으로, 이를 망라하여 전하는 문헌은 『회재집』이다. 박광옥의 학문은 유사경이 쓴 행장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그의 반평생의 학문은 전적으로 성리학에 있었다. 만년에는 더욱 『주역』․『계몽』․『가례』 등의 글이 힘써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천문산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구하여 학문이 쌓이고 쌓였다. 일찍이 문장에 뜻을 두지 않았지만, 글귀의 내용이 무게가 있고 아름다워 옛 분들의 정취가 담겨 있으며, 편지사연이 특히 좋았는가 하면 필법이 또한 굳세고 자유분방하였다.”

박광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큰 사위 유사경의 방광옥 학문에 대한 언급이다. 항상 문하생들에게 말하기를 “인(仁)을 좋아하고 불인(不仁)을 미워한 뒤에 가히 인의(仁義)의 도리를 다 실천하였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인품과 학문에 대한 명망으로 당대 유명했던 사람들과 두터운 교분을 갖게 되었다. 박순(朴淳)․노진(盧禛)․성세장(成世章) 등과 서로 덕으로 깊이 사귀었고, 기대승(奇大升)과는 어려서부터 왕래하며 절차탁마하는 사이였다. 따라서 『대동풍토기』에는 기대승․박상(朴祥)․박순․박광옥을 광주의 도학군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유경심(柳景深)이 광주목사로 부임하여 향교를 중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박광옥은 자신의 토지를 내어 향교의 재정을 도왔으며, 향교의 제도를 확충하고 그 규범을 정비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고을의 선비들이 향교의 중건을 기념할 때에도 전면에는 기대승의 글을, 후면에는 박광옥의 글을 새기는 것을 보아도 그의 학문을 짐작할 수 있다. 『회재집』 발문에서는 “회재 선생은 도학과 문장에서 한 시대의 사표가 되었으니, 선현들의 훌륭한 점을 본받아 후학에게 큰 공을 끼쳤다”라고 적고 있다.

[참고문헌]: 「회재 박광옥의 생애와 학문」(이종일, 『향토문화』23, 향토문화개발협의회, 20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변이중(邊以中)


변이중(邊以中)                                              PDF Download

1546년(명종 1)~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변이중의 자는 언시(彦時)이며, 호는 망암(望庵)이다. 변택(邊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풍이씨로, 1546년 전라도 장성현 장안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황주(黃州)이다.
어려서는 향리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20세 때에 우계 성혼에게 나아가 학문을 탐구하고, 21세 때 율곡 이이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로 벼슬에 들어갔다. 변이중이 이이의 문하에서 있을 당시 사계 김장생과 교류하였다. 변이중은 그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학문이란 체득하여 행하고 궁구하고 터득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라야 반드시 장진(長進)의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배우는 사람들은 가까운 데서 착수하지 않지만, 그들의 외면적 문장을 보면 공자나 주자와 같은 성인이 아님이 없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들의 큰 병폐입니다.”

이를 보면, 그의 학문은 체득과 실천을 우선하는 경향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이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은 덕에 나아가는 긴요한 법이고, 모든 것이 그르다고 하지 않는 것은 선을 취하는 긴요한 방법이다”라고 하여, 모든 것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만을 고집하지 않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항상 잘못을 고쳐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으로 벼슬하는 동안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으려 하였으나, 당시 동인들은 그가 이이의 문인이라 하여 배척함으로써 벼슬 생활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1576년(선조 9) 변이중은 모친상 1년 만에 또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는 상복을 입음에 예를 다하였는데, 특히 묘소 봉우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서쪽 대 위로 나가 묘소를 바라보며 통곡을 하였다. 그 암자를 망암(望菴)이라 이름하였고, 또한 자신의 호로 사용하였다. 그가 상을 마칠 때까지 철저하게 『주자가례』에 의거하였다.
『주자가례』는 중국 남송 시대 주자(朱熹)의 저서로, 사대부 집안의 예법과 의례에 관한 책이다. 본래 책 제목은 『가례』인데, 주자가 저술하였다 하여 통상 『주자가례』라고 부른다. 주자는 남송 때 사람으로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였는데, 그의 성리학에서 예와 의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사대부들이 준수할 의례를 정리할 목적으로 편찬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고려 말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주자가례』도 함께 들어왔다. 조선 건국 이후 일반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왕실의 국가 의례를 만들 때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17세기 후반 조선에서 예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주석서가 출간되었다. 책의 체제는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제례(祭禮)의 네 가지 의례로 편성되어 있다. 이에 따라 보통 4례라고 하면 가정에서 지켜야 할 의례를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주자가례』의 상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전통적인 상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변이중은 예학을 치밀하게 탐구하여 1579년 34세 때에는 『가례고증(家禮考證)』 4권을 저술하였다. 윤두수(尹斗壽)에 의하면, 조정의 관리들이 예법을 아는 사람은 변이중과 김장생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35세 때 교서관부정자에 제수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황해도 아사 벼슬에 있을 때 이이가 세상을 뜨자, 스승의 집을 후하게 돌보아 주었다. 이것을 빌미로 이이를 비판하던 무리들로부터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1591년 어천찰발에 제수되고 재임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사․조도어사․도어사 등 여러 직임을 받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세 차례를 상소를 올렸는데, 강화 수비책에 대한 상소는 도성의 보전을 위한 현명한 주장이었다. 그는 모병과 군량 등에 힘쓰면서 “군량을 조달하면서 흩어진 선박을 효과적으로 소집하여 수송에 임하도록 하였고, 이로써 명군과 조선 관군에 군량 공급을 제때에 함으로써 장병들이 허기지지 않고 전쟁에 임하도록 조치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우차(牛車), 그리고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과 「화차도설(火車圖說)」에 의거하여 화차 300량을 만들어 전투에 만전을 기하였다. 행주산성 전투에 화차 40량을 권율에게 보내 대첩에 크게 기여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1603년 함안군수가 되었다가 1605년 사직하고, 그 다음해 겨울 향리로 돌아와 벗들과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특히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본따서 향헌(鄕憲) 10여 조를 만들어 봄가을로 시범을 보이면서 향약보급과 실천에 앞장섰다. 여씨향약은 11세기 초의 중국 북송(北宋) 때에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적인 규약이다. 협서성남전현 여씨 문중에서 도학(道學)으로 이름 높던 여대충(呂大忠)․여대방(呂大防)․여대균(呂大鈞)․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德業相勸). 둘째,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過失相規). 셋째,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禮俗相交). 넷째,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患難相恤).
이 향약은 그 뒤 주자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서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1517년(중종 12)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장관에 의해 여씨향약이 널리 공포되었고, 이를 토대로 퇴계 이황은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율곡 이이는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
1611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현재 장성 봉암성원에 배향되어 있다.
여기서는 변이중의 신무기 화차와 총통의 발명이 임진왜란을 타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공헌을 소개한다.
조선은 일본의 침입, 즉 임진왜란을 당하여 초기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는데 매우 어려웠다. 조선은 정상적 국정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뜻있는 선각자들의 의병과 승병 조직에 의한 대응이 약간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전세의 역전을 가져온 것은 행주대첩이었다. 행주대첩은 선조 26년(1593) 2월 12일 수장 권율이 2,300명의 병력으로 왜군 3만의 병사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리하여 행주대첩의 공이 권율에게 돌아가는 것은 그가 수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신무기 화차와 총통의 활용이 있었다. 그 신무기의 발명자가 바로 변이중이었다.
변이중은 행주대첩 이전 1593년 1월 30일 죽산전투에서 우차(牛車)를 이용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패전하자 여러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 패전을 병가지상사로 여겨 자숙하면서 행주 인근 양천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당시 권율은 그의 실책에 적극 변호하였다. 권율은 한양을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이동하자, 일본군 역시 그 이동을 막고자 하였다. 권율은 은밀히 행주산성으로 옮겨 진을 쳤다. 양천에 주둔한 변이중은 신속하게 화차를 제조하였는데, 10여 일 동안 40량을 만들어 권율에게 보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모사 변이중이 만든 화차가 왜적과 싸워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변이중이 만든 화차는 수레 속에 40군데 총구멍을 내어 구멍마다 승자총(勝字銃)을 장전하고 그 심지를 서로 이어놓아, 한 번 심지에 불을 붙이면 차례로 포가 발사되는 것이었다. 또 한 사람이 화차 한 대를 끌고 다니면서 총포를 마음대로 쏠 수가 있어, 이리저리 화차의 방향을 바꾸어 여러 각도에서 왜적과 대응하여 싸울 수가 있었다. 그보다 앞서서는 고려 말엽 1380년(우왕 6)에 최무선(崔茂宣)이 금강(錦江) 입구 진포(鎭浦) 싸움에서 처음으로 연속 발사되는 화포로 왜구의 선박 5백여 척을 폭파하여 대승을 거둔 일이 있다. 또 『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의 「군례(軍禮)」에 보이는 ‘사전총통(四箭銃筒)’․‘팔전총통(八箭銃筒)’이라는 화전(火箭)은 화차(火車)의 개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변이중의 화차는 고려 말엽부터 세종 시대를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온 화차를 이었을 것이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임진왜란 때에 호남지방 소모사 변이중이 처음으로 화차 3백 대를 만들어 순찰사 권율에게 보내어 행주대첩을 도왔다. 그 원리는 한 화차에 40개의 구멍을 내고 승자총 40개를 끼워 넣어서 심지에 불을 붙여 연속으로 끊이지 않고 발사하도록 하니 그 소리가 산악을 진동하여 왜군들이 크게 놀라서 도망갔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화차가 비록 널리 쓰인 것은 아니었으나, 권율의 행주대첩에 사용되어 큰 성과를 내었다. 뿐만 아니라 박진(朴晉)이 경주를 탈환하는 때에도 이 화차를 써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의 화차 실효성에 대해 김병륜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이중 화차가 행주대첩에 투입되었을 때, 모두 40대가 사용되었고, 각 화차가 40문의 승자총통을 탑재했으므로 동시에 사격 가능한 승자총통은 모두 1,600문이고, 승자총통 1문은 최대 15발의 철환을 동시에 발사하므로 최대 24,000발에 육박하는 탄환을 적에게 쏟아 부을 수 있다. 이것을 개별 병사가 운용하자면 모두 1,600명의 운용인원이 필요하지만, 화차의 경우 최대 운용인원을 4명이라고 봐도 160명이면 운용이 가능하다.”

이를 보면, 분명 변이중의 화차는 행주대첩 승리에서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화차와 총통 등의 발명은 전세를 역전시키는 원동력이었다. 특히 화차의 발명은 우리나라 과학사의 지대한 공헌이자 전쟁사에 길이 빛날 위대한 공헌이었다. 그 공헌은 수전에서 활약한 이순신의 거북선과 상응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서에는 『망암집(望庵集)』이 있다.

[참고문헌]: 「망암 변이중 선생의 업적과 공헌」(송재운, 『공자학』21, 한국공자학회, 2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실록사전』

최전(崔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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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명종 22)~1588년(선조 21). 조선 중기의 시인.
서울 출신으로 자는 언침(彦沈), 호는 양포(楊浦),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아버지는 군수 최여우(崔汝雨)이고, 어머니는 상주 이씨다. 이이의 문인으로, 18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2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최전은 시문 및 글씨와 그림, 그리고 음악에까지 천부적 재주를 드러내었다. 이항복(李恒福)은 그의 「양포묘갈명(楊浦墓碣銘)」에서 최전을 처음 봤을 때 그의 첫인상과 느낌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예전에 선조(宣祖)께서 서쪽 교외(서울의 서대문 밖)를 검열하실 때에 나도 가서 보았는데, 날이 저물어서야 보기를 그만두었다. 가서 이웃집에 머물렀는데, 앞서 어린 아이 몇 십 명이 와서 평상복을 입은 채 앉아 있었다. 마침 그 사이에 별처럼 빛나는 봉황의 눈을 갖고 있는 한 아이가 무리에서 나와 나에게 절하였다. 나와 동행한 친구가 곁눈질을 하고 이야기를 할 때에 아이에게 공손하게 천천히 말하였는데, 마치 도(道)가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내가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겨 팔꿈치로 치며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가 말하기를 ‘자네는 알지 못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신동으로 최씨 집안의 자제 전(澱)이라네’라고 하였다.”

최전은 6세에 부모를 여의고, 맏형인 최서(崔湑: 자는 彦盛, 호는 秋浦)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9세에 집을 떠나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시와 역사를 배웠다. 최전이 어린 나이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에 그의 단아한 모습과 학문에 전념하는 태도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뛰어난 시적 재능을 이이가 ‘천부탁절 덕업불가량(天賦卓絶 德業不可量: 하늘이 탁월함을 부여하여 덕업을 헤아릴 수가 없다)’이라고 칭찬한 까닭에 이이의 문하에서는 나이 많은 문생들도 그와 사귀려고 하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흠(申欽) 역시 서문에서 1585년에 두 살 연하인 최전과 함께 진사가 되어 태학에 들어갔는데 “방향도 같고 학업도 같았으므로 눈으로 보자마자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한편 최전이 회시(會試)에 응시했을 때의 일화도 여러 글에 나타나 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야 시험 성적을 매기는 감독원이 이이인 것을 알게 된 최전은, 스승과 제자 관계 때문에 혐의를 받을까봐 시를 쓰고도 내지 않은 채 시험장에서 나왔는데, 이 일화는 사람들에게 최전의 인간됨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항복이 쓴 묘갈명과 임숙영이 쓴 행장에서는 최전의 뛰어난 재능과 아울러 그의 어진 심성과 성실한 태도를 언급하였다. 유가의 경전을 탐독하여 경건하거나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여색에 관심을 두거나 세속에 영합한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집안사람들이 닭을 잡을 때 들린 닭의 소리로 마음이 아파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최전은 결국 독서를 위해 절에 들어갔다가, 과도하게 열중한 나머지 병이 들어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이 묘갈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가 죽던 해 문경 양산사(陽山寺)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칩거하며 다시 『주역』을 읽기로 하였는데, 이 때문에 병이 들었다. 손수 주자(朱子)의 책을 썼으며, ‘가부좌를 틀고 정좌하여 묵묵히 코끝을 바라보며 잡념을 없애면 가히 병을 고칠 만하다’라는 등의 말로 수련을 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 때 나이가 스물 둘이었으니 아아, 얼마나 짧은가?”

임종 직전에 쓴 듯한 <주역잡설(周易雜說)>에는 『주역』을 읽으면서 느낀 단편적인 생각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주로 성정(性情)과 학문의 자세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최전의 시 몇 편을 소개한다. 최전이 남긴 시의 상당수는 10대에 지어졌다. 아래에 제시하는 두 편의 시는 모두 최전이 시로 명성을 떨치게 한 유년의 작품이다.

늙은 말이 솔뿌리를 베고 누워 老馬枕松根
꿈결에 천리 길을 가네. 夢行千里路
가을바람 지는 잎 소리에 秋風落葉聲
놀라 깨니 해질 무렵. 驚起斜陽暮

이 시는 8세 때에 지은 <노마(老馬)>라는 작품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 시를 입에서 입으로 전송하며 신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늙은 말이지만 꿈속에서는 천리 길을 달리고 싶은 포부를 가진다는 대조적인 내용이다. 따라서 이 시는 시의 제목인 늙은 말에서 연상되는 어두운 분위기 대신 꿈결에서도 천리 길을 달리고 싶어하는 늙은 말이 사소한 낙엽 소리에 놀라 깨는 시상으로 전개됨으로써 재기발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 시는 늙은 말에서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도 고려하고 있다. 천리 길을 질주하는 것은 꿈속에서만 가능할 뿐이고, 현실에서는 소나무의 밑둥을 베고 있을 정도로 노쇠한 말이다. 꿈에서 깬 늙은 말의 주변에 감도는 것은 가을 낙엽과 황혼 무렵이고, 이러한 시적 결말은 다시 늙은 말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 시는 늙은 말을 형상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대신, 정조와 분위기 면에서 다가가고 있으면서도 늙은 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눈앞에 그려내고 있다.
<노마>와 함께 최전에게 신동이라는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으로는 윤두수(尹斗壽)가 연안군수로 부임할 때 전송하면서 지은 <별해고졸오음(別海皐倅梧陰)>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최전이 12세 때 이이에게 수업을 받으러 연안(延安)을 지날 때 지은 시로, 이후 이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이 시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아득히 길은 서로 뻗어 있고 遙遙路向西
바라보고 바라봐도 산천이 드넓네. 望望山川豁
예전엔 이 곳의 길손이었건만 宿昔此爲客
오늘 아침엔 여기서 이별하노라. 今朝此爲別
광풍은 내 가는 길로 불어오고 狂風吹我行
멀리 호해(湖海)에서 만날 기약을 할 뿐. 遠作湖海期
기로에서 다시 고개 돌리니 臨岐更回首
유유히 내 마음 아프구나. 悠悠傷我思

이 시는 각 연에 다양한 구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시에 사용된 첩어 요요(遙遙)․망망(望望)․유유(悠悠)가 모두 비슷한 표현이라는 점에 유념한다면, 이 단어들은 아득한 여로와 함께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의 감정을 드러내는 시어라고 할 수 있다. 이별의 기로에서 불어오는 광풍(狂風)과 먼 훗날을 기약하는 원(遠), 기로에서 재차 고개 돌리는 심정을 강조한 갱(更)은 각각 상황과 미래에 대한 불확신,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의 첫 부분에서 서로가 가야할 아득한 길이 제시된 것은 헤어지는 슬픔과 기약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불안함을 투사한 것이고, 갱(更)이라는 부사를 등장시켜 이별의 슬픔을 극대화한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첫 부분으로 돌아가 아득히 가는 길을 강조함으로써 이별의 아쉬움과 불안감이 교차하는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어서 그의 대표작인 <제경포이수(題鏡浦二首)>를 소개한다.

봉래산은 한 바탕 삼천 년이 지나면 蓬壺一入三千年
은빛 바다 아득하고 물은 맑고 얕아지네. 銀海茫茫水淸淺
난세 타고 오늘 홀로 날아왔건만 驂鸞今日獨飛來
벽도화 꽃 아래엔 아무도 보이지 않네. 碧桃花下無人見

조원(老子)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건만 朝元何處去不知
옥동(玉洞)엔 아득하게 복숭아가 가득하네. 玉洞渺渺桃千樹
밝은 달 비치는 요단(瑤壇)엔 한기 돌아 잠 못 이루는데 瑤壇明月寒無眠
만리 천풍에 향기가 경포에 가득하네. 萬里天風香滿浦

이 시는 많은 문인들이 경포대를 지날 때 즉각적으로 떠올렸으며, 최전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시의 전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동지방을 유람하면서 뛰어난 경치를 구경한 체험은 최전에게 있어서 신선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경포이수>에는 최전이 생각하는 이상향이 그려져 있다. 금강산은 삼천년이라는 시간과 은빛 동해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절대공간으로 떠오르고 있다. 3구에서 화자가 난새를 타고 선인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이 곳에 홀로 온다는 시적 설정 역시 이상세계를 표현한 것이라 보이는 대목이다. 제2수에서 다시 등장하는 도화 꽃의 정경과 청량한 기운, 바람이 드리우는 향취 등으로 경포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모습은 삶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비현실적이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처럼 최전은 시문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음악에도 천부적 재질을 발휘하였다. 특히 그림은 매화와 조류를 잘 그렸으며, 글씨는 예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양포유고(楊浦遺稿)』 1책이 있다.

[참고문헌]: 「양포 최전의 시세계-16세기 唐詩風의 한 경향-」(이은주, 『한국한시작가연구』, 한국한시학회, 2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황신(黃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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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명종 15)~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여기서는 1596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통신사 황신의 일본에 대한 시각을 그의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황신은 1562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본관은 창원(昌原),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며, 어머니는 내섬시정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1582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1588년 알성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는 임진왜란 중 심유경의 배신으로 일본군 진영에 1년 여간 머물렀으며, 1596년 명나라 사신과 함께 일본을 다녀왔다.
황신은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협상이 진행될 때에 명나라 사람들과 함께 협상 현장에 있었고, 조선을 대표하여 일본을 직접 방문했던 인물이다. 일본의 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에 따라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통신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황신은 통신사 파견 이전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재침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때문에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가 구체화되면서 조선의 장수들 대부분이 강화를 통해 전쟁이 끝날 것으로 믿는 분위기를 경계하며, 일본의 재침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596년 7월 17일 조선 정부는 일본에 서신과 예물을 보냈다. 8월 2일 박홍장은 서신과 예물을 가지고 부산에 도착했고, 8일 조선 사신 일행은 일본을 향해 출발하였다. 조선 사신은 쓰시마(對馬島)․잇키(一岐島)․나고야(名古屋)․아이노시마(藍島)․아카노미세케(赤間關) 등을 거쳐 사카이하마(界濱)에 이르렀다.
1596년 9월 히데요시는 일본의 왕자 방환에 대한 조선의 사례가 없었다는 점, 고관을 사신으로 파견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조선 정부가 보낸 선물도 받지 않았다. 이에 황신은 히데요시가 조선 사신의 접견을 거부한 사실과 함께 일본의 재침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다.
1596년 12월 일본에서 돌아온 후 황신은 이듬해 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조에게 알렸다. 구체적으로는 1~2월 일본의 선발대가 침략할 것이며, 3~4월에는 일본군 전부가 부산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일본군이 조선의 수군을 격파한 후 육군과 합세하여 먼저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수군은 야간 기습작전으로 조선의 전선을 5~6척 내지 7~8척으로 포위하여 일시에 공격하여 돌진할 것이라며 일본군의 구체적 전략까지 알렸다. 황신은 일본에서 직접 자신이 보고 들은 바에 따라 일본의 재침을 예상했던 것이다.
황신은 조선에 주둔 중인 일본군 진영을 ‘늑대와 범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그가 일본을 믿을 수 없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 사신행차 중 일본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중과 상인 외의 남자는 길고 짧은 두 가지 칼을 차며, 3~4개의 칼을 찬 자도 있다. 원통한 일이 있으면 칼로 배를 십자로 갈라 스스로 해명하고, 원수를 지게 되면 반드시 칼을 빼어 갚는다.”

이러한 모습을 목격한 만큼 일본은 모든 문제를 대화가 아닌 칼로 해결하려 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일본의 재침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들이 가장 알고 싶었던 정보는 히데요시에 관한 것이다. 그 이유는 히데요시가 바로 조선을 침략한 원흉이기 때문이다. 황신은 히데요시가 아랫사람에게 포악하며, 남의 수고는 생각지 않아 일본인 모두에게 원한이 사무쳤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황신은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해 천황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과, 실제 정치는 간파쿠에 의해 행해지며 국왕전(國王殿)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히데요시의 집권과정과 일본의 정치체제에 대한 황신의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된다.
조선인들은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히데요시와 함께 쓰시마에 주목했다. 그 이유는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쓰시마의 책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 전쟁과 관련된 쓰시마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황신이 일본의 조선 침략에 쓰시마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을 다녀온 이후의 일이지만, 1598년 12월 황신은 전쟁의 주역으로 쓰시마를 지목하고, 쓰시마 정벌을 주장했다. 그는 일본을 다녀온 직후, 선조가 쓰시마를 공격할 경우 승산이 있는지를 묻자, 쓰시마는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으며 비축된 식량이 없는 만큼 조선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대답한 바 있다. 때문에 자신이 선봉이 되어 쓰시마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인들은 “부자형제간에 친애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일본의 가정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또 일본인들은 남성과 여성이 함께 목욕하고 희롱한다며, 남녀유별의 분수를 모르는 야만적인 존재로 규정했다. 또 남성 간에 동성연애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기록하였다. 일본에서 오누이 간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사실, 부자가 한 여성과 간음한 사실 등을 금수의 풍속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일본 여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음란하다고 이해하였다.

“부녀자들은 경쾌하고 영리하며 얼굴이 훤칠하지만, 성질이 음탕하여 비록 지체가 있는 좋은 집안의 여자라도 대개 딴 마음이 있고, 장사치의 여성 역시 몰래 사사로이 지내는 자가 있으며, 승려 역시 부녀자를 데리고 사찰에서 사는 자가 있다.”

황신은 성리학적 윤리규범에 입각하여 일본의 풍속을 바라보았다. 때문에 조선의 성리학적 풍속과 다른 일본의 모습을 야만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 1596년 7월 13일 새벽에 발생한 후시미(伏見) 지진에 대해,

“일본국의 각처에 지진이 크게 일어나서 집들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사람이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라고 하며, 지진으로 인한 피해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귀국 후 선조에게 복명할 때에도 일본에 지진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로 보아 그는 일본의 지진을 매우 특이한 경험으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일본에 지진이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통해 일본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황신은 일본에는 진귀한 생선이나 특이한 것이 없다고 설명하였다.

“숭어는 뼈가 많고, 은어는 기름이 적으며, 송이버섯은 향기가 없고, 소는 누린내가 나고 힘줄이 많으며, 닭은 발에도 털이 났고 고기가 굳으며, 꿩은 털이 검고 고기에 비린내가 나며, 생물(生物)의 성질이 이와 같이 달랐다.”

이러한 평가 역시 일본은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며, 일본에 있는 동물과 식물 역시 조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그의 일본관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황신이 일본에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하여 일본을 오랑캐로 본 것만은 아니었다. 화이론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준말로, 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물론 일본 역시 오랑캐로 간주되었다. 그는 일본의 풍속은 간소하여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긍정적인 면을 소개하기도 했다. 또 일본인들의 성격은 경박하지만 영리하고 솔직하여 남의 말을 잘 믿는다고 하여, 일본인에게 단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점도 있음을 인정하였다. 황신은 일본의 농민에 대한 세금제도를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농민에게 전답마다 절반을 거두고, 그 외에는 다른 부역이 없으며, 수송하는 일은 모두 품삯을 주기 때문에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농민들에게 전세(田稅) 외에 별도로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개했다. 조선의 농민들은 조세(租稅)나 지대(地代) 외에 역(役)과 공납(貢納) 등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또 인신적 구속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황신이 농민에게 어떤 강제적 부담도 지우지 않는 일본의 세제를 소개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부분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신은 일본의 면적이 조선보다 넓다는 점을 지적했다. 조선은 일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영토 역시 조선보다 작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에서 일본을 조선의 1개 도(道) 정도의 크기로 표시하고 있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을 직접 방문한 후 일본이 조선보다 국토가 작다는 인식이 잘못된 사실임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황신이 일본 사신행차를 통해 일본의 실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일본에 대한 시각 역시 사신행차 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변화가 있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황신은 1596년 8월 8일 일본으로 향했고, 11월 23일 부산으로 돌아왔다. 따라서 그가 일본에 머무른 기간은 130일 정도로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다. 그는 히데요시를 직접 만나지 못했던 만큼, 그가 입수한 대일정보의 대부분은 명나라 사신을 통해 입수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제공한 일본 정보는 비교적 사실에 가까운 것이었다. 황신은 전쟁 중 일본을 다녀왔고, 그가 제공한 정보는 조선이 일본과의 전쟁 수행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전후에도 일본과 관련된 정책 수립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면서 일본의 실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의 일본인식은 당시 사람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추포 황신의 대일인식」(방기철, 『한국사상과 문화』74, 한국사상문화학회, 2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인(魯認)


노인(魯認)                                                                PDF Download

1566년(명종 21)~1622년(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장수.
노인의 자는 공식(公識),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함풍(咸豐)이다. 전라남도 나주 출신. 아버지는 증이조참의 노사증(魯師曾)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이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외종숙부인 이나항(李羅恒)에게서 수학하였다. 7세에 아버지로부터 김인후(金麟厚)의 학행을 흠모하는 정을 갖게 되었다. 이에 김인후를 흠모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맑은 달이 쌓인 눈을 비치니
빛이 나의 창문에 비치는 도다.
누구와 이 광경을 함께 하리요
김가는 세상에 둘도 없도다.

14세 때에는 이정구(李廷龜)와 김광운(金光運)을 따르고 섬겼으며, 정개청(鄭介淸)을 스승으로 모셨다. 백광훈(白光勳)과 임억형(林億齡)과는 금성선사에서 함께 수학한 친구 간이었다. 그는 향리에서 고경명(高敬命)․기대승(奇大升)․나세찬(羅世纘)․나덕준(羅德峻) 등과 교유하였다. 당시 기대승에게 보낸 시가 전한다.

사람들이 모두 이익을 쫓아 힘쓰는데
고봉의 숨은 마음만 천성을 보전한다.
고요한 가을 강에 낚싯대 드리우고
싸늘한 촌락에서 십 년 공부를 쌓으니.

그는 명리를 쫓지 않는 기대승을 흠모하였고, 그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살고자 하였다. 17세에 진사에 급제하여 일찍부터 문명을 떨쳤다. 그는 진사에 급제한 뒤에 이이를 찾아가 가례(家禮)를 묻기도 하였다. 이때 이이에게 올린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낮은 사람을 사랑하는 이가 없는데
선생은 나를 멀리하지 않는다.
작은 자리에 앉아 글을 논하니
학업에 힘써 집안을 일으켜라 하신다.

20세 때 이정구를 만나 ‘도의지교(道義之交: 도의로써의 사귐)’를 맺고, 23세 되던 해에 이정구와 ‘성정체용(性情體用)의 설’을 주고받았다. 이로써 그가 성리학에 많은 공부를 할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노인은 당대의 이름 있는 이수광(李睟光)․이춘영(李春英)․이덕형(李德馨)․강항(姜沆) 등과 교유하였다. 노인은 1612년(선조 45) 그의 나이 47세 때에 사례집설(四禮集說)을 지어 조위한(趙緯韓)과 이를 토론하였고, 그리고 당대 예학의 최고 권위자인 김장생(金長生)에게 문의하여 수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유성룡은 노인을 평가하여 “명나라를 견문하고 주자서원에 있는 양현사(兩賢祠)에서 엄격히 학업을 닦았으며, 시서(詩書)에 능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후일 정조 때 이굉택(李宏宅)이 노인을 평하여 “문무를 겸비한 군자이다”라고 한 것과, 오시학(吳時學)의 “도학과 절의가 빛났다” 등의 기록은 비록 후인들의 추모라고 하더라도 노인의 사림정신과 학문정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성리학이나 논설 등의 글을 남기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무인으로 활동한 그 이면에는 그의 성리학적 의리와 심성론의 바탕이 깔려있어 그것이 가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노인이 활약한 청․장년기는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전란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노인도 임진왜란 의병의 선봉이 되어 국난 타개에 투신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 20여만이 바다를 건어와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경상도와 충청도를 유린하고 도성으로 진군하였다. 백성은 피난가기에 바빴다. 이때에 광주목사 권율(權慄)이 노인에게 “국가가 전란을 만났으니, 신하된 자는 마땅히 죽음으로 갚을지라. 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적을 토벌하는 것이 어떠하리요”라는 글을 보내 의병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노인은 임금과 신하가 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의리임을 설파하고, 의병에 동참하였다. 이때 노인의 나이가 27세였다. 노인이 권율의 진영으로 가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 세상에 당하여
월왕의 부끄러움을 늘 생각한다.
우주에 창칼이 가득하니
시서(詩書)의 뜻을 그만두려 하노라.

그는 약 100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권율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이에 권율은 모의(募義)라는 깃발을 만들어 노인에게 주었다. 노인은 권율의 휘하에서 남원성을 검문하고 방어하는 참모가 되었다. 1592년 7월 8일에 왜군이 진산(오늘날 금산) 지역으로 남하하자, 노인도 군대를 이끌고 진산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왜군 900명이 사살되었으며, 조선인 포로 50명을 구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진산대첩’이었다. 이 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함으로써 호남은 왜군의 진출이 저지되었고, 후방 병참기지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592년 12월 27일 왜군 5천명이 다시 진산을 침략하였다. 노인 부대도 대응하여 왜군을 크게 토벌하였다. 승전보를 전해들은 권율은 “노인이 있는 한 적이 두렵지 않다”라고 하였다. 그 후 노인의 이름은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날은 해상에서도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승리하였다. 이로써 전세가 조선에 유리하게 되었다. 조선이 승기를 잡은 것이다.
1593년 정월에 노인은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군졸을 인솔하여 권율과 합류하였다. 행주대첩에서 노인은 권율의 참모로 활약하였다. 노인은 선봉에 서서 싸워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내는 큰 공을 세웠다. 이때 일본군 사상자는 1만 여명에 이르렀다. 이후 권율이 선조에게 노인의 전공에 대해 포상을 건의하려하자, 그는 죽을힘을 다하는 것이 군자로서의 직분이라 하고 이를 사양하였다.
1593년(선조 26) 초 명나라와 일본 간의 화의(和議)가 진행되면서 4월경에 일본군대는 영남으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다시 상주․선산․안동․대구 등에 잔류하고 있다가, 그 외 울산․동래․거제․김해의 잔류 왜군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13만의 규모를 자랑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1593년 6월 22일부터 대접전이 시작되었으며, 29일 진주성이 함락되고 김시민 장군 이하 최경회 등 많은 병사들이 순절하였다. 1593년 6월 왜군이 진주성을 총공격할 때 노인은 모의사(募義使)가 되어 경상도 의령 방면으로 가서 잔류 왜군을 협공하였다. 이때 모의 깃발을 날리며 왜적들을 추적하자 “진산의 승전장이 또 왔다”라고 하며 왜군들이 도망하였다.
1595년(선조 28)이 되자, 노인은 정월 초하루 도원수 권율을 찾아가서 명나라 장군 진운학(陳雲鶴)과 함께 시국을 논하였다. 6월에 영남으로 왜군이 침투하여 부산이 함락되었다. 그해 3월 권율과 함께 순천진으로 옮기고 항시전투 중 선봉에 나섰으며, 권율의 참모로 협력하였다.
1597년(선조 30) 7월 7일 노인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하동 진지로 이동하였다. 그 후 각처에 왜군이 창궐하자, 양친을 피난시키기 위하여 권율의 진지를 나와 고향인 금성으로 돌아왔다. 1597년 7월 21일 부모양친을 모시고 연고가 있는 의령을 향해 출발하려고 금성산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왜군이 나타났다. 대검과 창을 든 왜적이 사면을 포위하였다. 노인은 손을 벌려 양친을 감싸 안았다. 이에 왜적들이 효성에 감동하여 ‘물해효자(勿害孝子)’, 즉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글을 써 놓고 물러갔다. 이 상황에서 두 아들을 노탄회(魯坦回)와 노참(魯參)을 잃어 행방을 알지 못하였다.
8월 10일 왜군들이 남원으로 이동한다고 하는 정보가 있자, 권율은 노인에게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원군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갔다. 그러나 왜군들은 남원성의 사면을 완전히 포위하고 15일 야간을 이용하여 성으로 올라왔다. 이에 남원성은 함락되었다. 이때 노인은 역전하며 왜적들을 무찌르고, 도원수 권율에게 보고하려 돌아가려 하였으나, 갑자기 수많은 복병을 만나 포위되고 말았다. 노인은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맞고 쓰러져 왜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 1597년 8월 15일이었다. 그는 순천의 왜군 진지로 이송되었다. 이로부터 노인은 약 19개월간의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1599년 3월 15일 일본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갔다. 이후 중국의 남쪽 복건성과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때가 1599년 12월이었다. 그의 나이 34세이었다.
그 후 노인은 1604년(선조 37) 당포(통영)해전에서 진용교위(進勇校尉)로 참전하게 되었다. 그는 왜구의 선단을 완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 해전의 통제사는 이경준(李慶濬)이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 이후 국지전이지만, 일본이 침략한데 따른 응전의 성격으로 조선이 큰 승리를 하였다. 선조는 이 해전의 승리를 기념할 수 있도록 ‘당포전양승첩지도(唐浦前洋勝捷之圖)’를 그리도록 하여 참전 장수 28명에게 하나씩 하사하였다.
1605년(선조 38) 겨울 노인은 『소오책(沼吳策)』이라고 하는 조선이 일본을 멸망시킬 계책을 적은 복수책을 선조에게 올렸다. ‘소오(沼吳)’는 복수의 뜻으로 궁전이 연못으로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오나라 오원(伍員)이 죽으면서 20년 뒤에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켜 오나라 궁터가 연못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월나라 왕인 구천(句賤)이 오나라 왕인 부차(夫差)에게 원수를 갚게 된다는 말이다. 이 고사와 같이 조선이 일본을 멸망시킬 계책을 말한 것이다.
이듬해 봄 선조는 이를 받아보고 “신하가 사직을 지키기 위한 특별한 계책”이라 하고, “마음과 몸가짐이 언제나 깨끗하고 근면한 생각을 가졌다”라고 치하하였다. 선조는 노인에게 수원부사를 제수하였다. 1607년 그는 황해수사 겸 옹진도호부사가 되었다. 노인은 군무를 잘 다스리고 청렴하게 근무하였다.
1608년(선조 41)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노인은 북인정권 하에서 홀대를 당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대북파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과의 마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이 명나라에서 귀국할 때 중국의 황제 신종(神宗)이 내린 소승마(小乘馬)가 있었다. 귀국 길에 타고 가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정인홍이 이 말을 사고자 하였고, 노인은 “이 말은 황제가 준 것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고 거절하였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정인홍은 노인을 군산의 만호(萬戶)로 좌천시켰다. 그래도 노인은 군무에 충실하게 일하였다. 그러다가 광해군 때의 정국이 점차 혼란해지자 병을 이유로 귀향하였다. 그리고 정유재란 때 행방불명된 두 아들 노탄회와 노참을 슬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1622년(광해군 14) 5월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금산의 금곡사(金谷祠)와 나주의 거평사(居平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錦溪集)』 6권 2책 외에, 일본에서 포로생활과 명나라 체류기간 동안 그가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남긴 『금계일기(錦溪日記』와 『간양록(看羊錄)』이 남아있다.

[참고문헌]: 「금계 노인 연구」(노기욱, 조선대학교 석사논문, 20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금계집』

윤방(尹昉)


윤방(尹昉)                                                           PDF Download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윤방의 자는 가회(可晦), 호는 치천(稚川) 또는 치천(穉川), 본관은 해평이다.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는 정철과 함께 서인(西人)의 영수로 활약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정승이 되어 서인을 위한 정책을 펴나갔다. 1591년(선조 24) ‘건저문제’로 억울하게 모함을 당한 정철과 윤두수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김장생을 조정에 초빙하여 이이․김장생․송시열로 이어지는 노론(老論)이 뿌리가 내리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건저문제’는 1591년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분쟁이다. 건저(建儲)는 ‘세자를 세운다’는 뜻이니, 세자 책봉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으로도 불린다. 왕위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동인과 서인 간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나타났던 사건이다.
윤방은 어릴 적에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방은 경전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고 종합한 것을 가지고 가끔씩 두 분 선생이 계시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물었는데, 그때마다 두 분 선생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며, 화려하면서도 질박한 표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전후로 명문 출신의 작품과 비교해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문장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시문학으로 남과 서로 주고받거나 담론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시문학을 잘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윤방은 1582년(선조 15)에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급제 후 승문원정자 등을 지냈다. 1591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과 예문관 봉교, 이후 예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거쳐 1591년 아버지 윤두수가 동인과의 정쟁으로 유배당하자 사직했다가 다시 복귀하여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윤두수가 다시 재상으로 기용되자, 예조정랑이 되어 아버지와 함께 선조 임금의 어가를 모시고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따라갔다. 병조판서 이양원(李陽元)의 인사 부정을 탄핵하다가 성균관전적으로 전임되었다. 이양원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것은 조식의 허리에 검명(劍銘)이 새겨진 칼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바로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敬)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義)이다.”(義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것이다.
이후 예조정랑․호조정랑․호조좌랑을 거쳐 병조정랑으로 있을 때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동생들과 함께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해 7월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선조 임금은 상중(喪中)이던 윤방을 특별히 벼슬에 나오게 하여 사헌부지평에 임명하였다.
어머니의 상과 관련하여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 윤방은 아버지와 함께 선조 임금을 호위하여 의주까지 모셨는데, 도중에 길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이때 이미 왜적이 사방에서 들끓고 있었으므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몰래 길을 달려가서 마침내 빈소에 이르러 소리를 내어 슬프게 울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가 어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몇 번이나 왜적을 만났지만, 다행히 몸을 피해서 빠져 나온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의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하였다.”

그 후 성균관직강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부교리를 거쳐 이조좌랑․형조판서․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다. 당시 왜적의 만행이 극심한 중에도 몰래 숨어서 어머니 빈소에 다녀오는 효성을 보였다. 그의 효성과 가족 사랑에 관한 일화를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집안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다. 항상 부모의 안색을 살펴가면서 어버이를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일찍이 어버이의 병환을 간호할 때에 거의 1년간 옷을 그대로 입고 허리띠를 풀지 않은 채 지냈다. 그의 집안은 형제들로부터 친척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번성하였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침 없이 두루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모두가 그에게 의지하였다.”

부인 청주 한씨는 판관 한의(韓漪)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윤이지(尹履之)는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을 지냈고, 차남 윤신지(尹新之)는 선조의 둘째 옹주 정혜옹주와 혼인하여 해숭위에 봉해졌다. 정혜옹주는 선조와 김인빈(金仁嬪) 사이에서 태어난 4남 5녀 중에서 둘째딸이다. 김인빈의 둘째 아들이 처음에 선조가 세자로 세우고자 하였던 신성군(信城君)이고, 셋째 아들이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이다. 정혜옹주는 인조의 고모였으므로, 인조는 윤방․윤신지와 특별한 인척관계였다.
또한 윤방은 의학에 대한 지식이 많아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를 겸직하였다. 내의원도제조는 의약에 밝고 고관 가운데 겸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궁중에서 임금의 약을 담당하는 내의원을 중요하게 여긴 탓이다. 내의원은 왕실의 의약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승정원일기』의 인조 연간 기록에는 한 명의 내의원도제조가 등장한다. 바로 문관이었던 윤방이다.
윤방은 영의정 윤두수의 아들이다. 윤두수는 1555년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에, 이조정랑․의정부검상․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사복시정 등을 역임했다. 이렇듯 높은 관직에 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학문에 정진하여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로 인조 때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의약에 대한 지식이 많았던 문관으로서 내의원도제조의 자리에서 최명길․이경석 등과 함께 의약을 논하였다.
특히 인조 연간에 내의원도제조를 하면서 인목대비의 폐상증(肺傷證: 폐가 손상된 증상), 두통, 담성해수흉번(痰盛咳嗽胸煩: 가래가 차올라 기침을 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등의 증상에 각종 처방을 투약한 기록들은 의학에 대한 그의 깊은 학식을 가늠하게 해준다. 그는 인목대비의 폐상증에 대하여 청금강화탕(淸金降火湯: 열로 인하여 생긴 기침에 쓰는 처방), 두통에 대하여 천궁다조산(川芎茶調散)을 처방하고 있다. 또한 인조의 한열왕래(寒熱往來: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는 증상)에 대하여 소시호탕가감방(小柴胡湯加減方)을 투약하고, 침구치료에 의해 생겨난 문제점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평소부터 인목대비와 인조가 지니고 있었던 질환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특히 차를 마시거나 침구를 시술받아 생겨난 문제점까지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처럼 문관 출신으로서 의학에 깊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윤방은 조선중기 유의(儒醫)의 전형이라 할만하다.
‘유의’는 유학자로서 의학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을 총괄하여 말한다. 그들 중에는 문과 출신으로서 고위관직에 있으면서 의료행정을 겸하였으며, 왕실에 질환이 있을 때에 다른 의관과 함께 들어가서 진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의원(內醫院)을 비롯한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고관의 권신들은 비록 의학에 대한 지식이 정통하더라도 실제로는 ‘유의’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한편 문과 출신이면서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전문적이 아닌 틈틈이 취미로 의학을 연구하여 그 지식을 가지고 의서의 편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서 선조 때의 좌랑을 지낸 정작(鄭碏)이 유의로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가하였다. 또 전의감․혜민서에서 의학 교수관이 되어 의학교육과 연구에만 힘쓸 뿐이고, 의술에는 직접 종사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니, 유의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이 계급에 속하였다.
1640년 초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 오음리(梧陰里)의 선영에 안장되어 있고, 이식(李植)이 지은 「신도비명」이 남아있다. 조익(趙翼)이 윤방의 시장(諡狀)을 썼는데, 그가 윤방을 지나치게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비난을 받고 파면되기도 하였다. 조익은 윤방의 아버지인 윤두수의 형 윤춘수(尹春壽)의 외손자였으며, 윤방의 장남 윤이지(尹履之)와 동갑이자 죽마고우였다.
여기에서 ‘시장’은 임금에게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살아있을 때의 그의 행적을 적은 글을 말한다. 『경국대전』에는 종친 및 문무관 실직 정2품 이상과 직위는 낮더라도 친공신에게 시호를 주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 밖에 대제학을 지낸 자는 종2품이라도 시호를 주었으며,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선비나 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로서 세상에 드러난 자는 정2품이 아니라도 특별히 시호를 주었다.
봉작(封爵)은 해창군(海昌君)이며,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문집에는 『치천집』이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윤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얼굴이 넓적하고 체구가 우람한 데다 온몸에서 후덕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인품이 중후하고 성품이 지극히 유순하고 근면하여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다. 또한 사람됨이 너그럽고 후하고 청렴하고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덕망이 있었다.”
또한 「윤방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윤방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일을 처리할 때 허심탄회하게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되 경계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준과 척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소리에 결코 현혹되는 법이 없었다. 그는 풍채가 중후하고 심원하였으며, 기뻐하고 성내는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신토록 그를 옆에서 모신 측근도 그가 급하게 말을 하거나 야비한 언사를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며, 비록 느닷없이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항상 평소와 같았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모두 그의 인품과 기량을 우러러 사모하였다.”

[참고문헌]: 『위키 실록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귀(李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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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이귀의 정묘호란 때에 후금과의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의 내용을 소개한다. 정묘호란은 1627년(인조 5)에 후금(後金)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이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지 10일도 지나지 않아서,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적 외교정책을 비판하고 모문룡(毛文龍)과 협력하여 후금을 칠 것을 약속한다. 모문룡은 후금의 요동 공격으로 인해 조선으로 도망쳐온 명나라 무장이다. 모문룡은 후금과 싸운다는 명분으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머무르며, 정묘호란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자이기도 한다.
후금과의 전면전을 두고, 이귀는 조선의 임금 인조(仁祖)와 보는 시각이 달랐다. 정묘호란이 있기 4년 전에 이귀는 서변정세의 급박함을 알고 매우 구체적인 방어책을 내놓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이것은 스승 율곡 이이가 임진왜란 9년 전 10만 양병설(養兵說)을 주장하지만 거부된 것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5년이 지난 후, 이귀가 눈앞에 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몸을 던져 외쳤으나 허사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이가 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10만 대군을 양성하자고 했으나, 정적이었던 유성룡이 반대해 무산되었다’는 말은 다들 한 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것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인데, 실제로 이이가 직접 쓴 글에서는 ‘십만 대군을 양성하자!’는 식의 주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유사한 기록으로는 「만언봉사」에 나와 있는, 즉 “지금 사회가 썩어 있어서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10년 뒤에 화가 미칠 것이다”라는 정도이다. 하지만 ‘사회를 개혁하지 않으면 10년 뒤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라는 주장은 당대에 김성일(金誠一)․이언적(李彦迪) 등도 이미 주장한 바가 있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의 출처는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율곡행장」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율곡행장」에는 “이이가 일전에 십만 양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라고만 나와 있을 뿐,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 신뢰도가 떨어진다.
또한 이귀는 정묘호란 이전에 다섯 차례에 걸쳐 호패법을 시행하여 환란에 대비할 것을 임금에게 상소한다. 이후 많은 논란 끝에 호패법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른다. 호패법은 조선시대 신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16세 이상의 남자에게 주어졌던 오늘날의 민증(주민등록증)에 해당한다. 호패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양반과 노비 모두에게 골고루 발행하는데, 이를 실시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인구수 조사와 병력 기피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호패로 인하여 국방의 의무를 강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정계의 원로였던 이원익(李元翼)과 산림의 영수인 김장생(金長生) 등은 호패법을 끝까지 반대하였는데, 반대한 이유로는 민심을 거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조 역시 처음에는 호패법을 거부하다가 윤방․신흠 등 대신이 거듭 청하고 장유․이식 등도 시행을 촉구하자, 마침내 호패법 시행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귀는 호패법의 시행으로 16세기 이래의 고질적인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여 군사력을 증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정묘호란이 반발한다. 정묘호란 당시 서로(西路)의 방어체제는 거의 힘을 쓰지 못하였으며, 상황은 이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방향으로 치달았다. 의주성과 안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곽산의 능한산성은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함락된다. 산성으로서 방어에 성공한 것은 의주의 용골산성뿐이었고, 그것도 의병에 의해서였다. 평안도 지역의 백성들이 조직한 의병에 의해 간헐적으로나마 후금 군대에 타격을 줄 뿐이었다. 평안감사와 황해병사는 이미 후금 군대를 피하여 각각 평양성과 황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후금의 침입 소식을 듣자, 조선의 임금 인조는 평안도는 지킬 수 없다고 보고 황해도에 병력을 동원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그러나 이귀는 황해도 역시 지킬 수 없다고 보고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청하지만, 인조로부터 ‘그런 논의는 천천히 하라’는 핀잔을 듣게 된다. 이때 후금의 군대가 황해도 중동부의 평산(平山)에 주둔하자, 강홍립 등은 후금 사신들과 강화(講和)를 맺어 전쟁을 완화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를 주장했다는 훗날의 비난을 피하려고 조정에 모인 대신들은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이때 후금과 싸울 것을 주장한 자들을 척화(斥和)라고 부르고, 후금과 화친을 해서 나라의 힘을 키우자고 주장한 자들을 주화(主和)라고 부른다. 척화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김상헌(金尙憲)이 있고, 주화파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최명길(崔鳴吉)이 있다.
그러나 이귀는 “일에는 권(權)과 경(經)이 있고, 때에는 완(緩)과 급(急)이 있다. 지금 나라를 보존하느냐 망하느냐의 절박한 형편이니 한갓 헛된 이름만 지키고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미책(覊縻策)을 써서 적의 칼날을 늦추는 것이 낫다”라고 하고서, 여러 대신들과 교린(交隣)의 의리로써 강화를 맺을 것을 약속한다.
기미책은 광해군이 여진족에 대하여 쓴 정책이기도 하고,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변방의 오랑캐를 다루기 위해 오래 전부터 써오던 정책이기도 하다. ‘기(羈)’는 말의 얼굴에 씌우는 굴레를 뜻하고, ‘미(縻)’는 소를 붙잡아 매는 고삐를 뜻한다. 그러므로 ‘기미’는 변변치 못한 오랑캐와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은 피하는 것이다. 또한 ‘교린’은 조선시대에 일본 및 여진에 대한 외교 정책이다. ‘적국항례(敵國抗禮)’, 즉 적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예를 행한다는 뜻으로써, 상대의 나라와 대등한 의례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조선 초기 교린의 대상으로는 일본․유구․여진․동남아시아 국가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사간 윤황(尹煌)은 이름만 화친(和親)이지 사실상 항복과 다름없다면서, 후금의 사신을 참하고, 주화를 주도하여 나라를 잘못되게 만드는 이귀와 최명길의 목을 벨 것과 패전한 장수를 참하여 군율을 진작할 것을 주장한다. 이때 71세의 이귀는 “오늘의 일은 광명정대하다”고 말한다.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자들은 도성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피난한 것, 임진강을 사수하지지 않은 것, 이서가 남한산성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것 등을 모두 주화론자들의 책임으로 돌렸다. 국가가 망하더라도 강화조약을 수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계속된다.
이귀는 화친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신하들에게 “일에는 권도(權道)가 있는데, 어찌 작은 절개에 구애될 것인가”라는 권도론을 내세운다. 이어 신하들이 군대의 일에 어두워서 척화를 주장한다고 한다면서 “어리석은 자들이 일을 망치는 것이다”라고 비난한다.
‘권도’는 경도(經道) 또는 정도(正道)를 불규칙한 상황에 임시로 맞추는 행위규범을 말한다. 권도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일정하고 불변적인 행위규범을 가지지 못하며, 그때마다 다른 행위양식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가진다. 유학에서 권도는 불변의 정도에 대해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의된다. 정도가 항상 지켜야 하는 것과 달리, 권도는 현실에 따라 응용하는 것을 말한다. 원칙을 지키되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 원칙만 찾지 말고 화급(火急)을 다투는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 불이 났는데 양반의 도리만 찾고 있어선 안 된다. 우선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 천하의 일이 그 본질은 같아도 형세는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형세에 따라 처신을 달리 해야 하는 것이다. 평화롭고 무사할 때에는 정도(經)를 지켜야 하지만, 위태롭고 다급할 때에는 권도(權)를 행해야 한다. 집중무권(執中無權)이란 말이 있다. 오직 중만 고집하고 권도를 모른다는 말이다.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정도만을 고집해서도 안되지만, 권도를 남용해서도 안된다. 상황에 따라 처신하고 행동해야 한다.상황에 따라 응용한다고 모두 권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권도는 정도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다. 변통론이다. 그 기준은 선(善)에 있다. 선을 따르는 변통이 곧 권도이다. 권도를 따르되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변통하되 악(惡)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악을 따르는 변통은 교활하고 사악함만 낳기 때문이다. 악을 따르는 변통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이고, 권도를 남용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유방(劉邦)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자방(張子房)이나 유비(劉備)의 책사인 제갈량(諸葛亮)은 권도를 행하면서도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전 세계가 경제위기에 빠진 지금이야말로 권도의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그런데 고집불통의 우리 국회는 거꾸로 위기극복 노력의 발목만 잡고 있어 많은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지금의 선택이 선(善)의 변통인지 악(惡)의 변통인지는 훗날의 역사가 말해줄 것이다. 과감하게 권도를 선택해 위기 타개에 앞장서는 큰 정치인의 모습이 그리운 오늘이다. 누가 이 나라의 장자방이나 제갈량이 되어 줄 것인가? 이귀는 국가를 위한 방도에 대하여 “국가를 도모하는 방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經)도 있고 권(權)도 있는데, 형세가 있는 곳에서는 권도가 변해서 정도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권(權)은 원래 저울질하는 것을 말한다. 저울질할 때 저울추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는 물건의 무게에 따라 늘 이동하는 것처럼,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상황에 맞게 임시변통할 수 있는 것이 권도이다. 맹자도 “남자와 여자가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에 건져주는 것은 권도이다”라고 말하였다. 남자와 여자가 손을 잡지 않아야 하지만(경도), 물에 빠진 것과 같은 위급한 상황에서는 손을 잡아 구해야 한다(권도)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귀는 척화를 주장하는 장유 등에게 “오로지 당당한 정론(正論)만을 고집할 뿐 변화에 대처하는 권도(權道)의 마땅함을 모른다”고 비판한다. 장유의 주장은 국가의 존망은 고려하지 않고, 사람들 듣기에 좋게만 큰 소리를 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귀는 강화가 국가의 존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어떻게 부모된 자로써 적군이 우리의 어린 자식들을 양떼를 몰고 다니듯이 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느냐”면서, 백성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이귀는 자신의 주화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이처럼 이귀의 주화론 사상은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하는 정치가로서의 책임의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주화론의 밑바탕은 이념보다 국가와 국민을 우선하는 사고라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묵재 이귀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기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귀(李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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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명종 12)~1633(인조 11).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이며, 호는 묵재(默齋)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아명은 영용(盈龍)이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조정에서는 연평(延平)이라는 호칭을 많이 썼는데, 이는 연평부원군이라는 그의 직책에서 나온 것이다. 1557년 3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영의정에 추증된 이정화(李廷華)인데, 아버지는 아들 이귀와 손자 이시백(李時白)의 영화롭고 높은 지위를 가짐에 따라 영의정에 증직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귀가 출생한 다음 해,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청송부사 권용(權鎔)의 딸이다. 4남 3녀를 낳았는데, 이귀가 막내아들이다.
이귀의 아명이 영룡인 것은 그의 어머니 태몽에 하얀 용이 물 항아리에 들어있는 것을 본 것에 따른다. 이귀가 2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전라도 익산으로 가게 된다. 이정귀(李廷龜)가 쓴 신도비문을 보면, 어머니 안동 권씨는 아버지를 잘 모르는 이귀에게 다음과 같이 아버지상을 기억시키려한 노력을 읽을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외할머니)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집은 원래 훌륭한 집안이다. 너의 할아버지 목사공이 기묘명인(기묘사화 때에 피해를 입은 사림들을 기묘명인이라 부른다)으로 매우 어지셨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이 다 바른 가르침을 삼가 지켜서 사람들이 ‘너의 집을 모범적 집안’으로 여겼다. 너의 아버지는 총명하여 보통 자식과 달랐으며,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여 할아버지 목사공께서 매우 소중히 대하시고, 너의 아버지 또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오직 판서 오상과 승지 유희림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처럼 이귀는 할아버지 양주목사와 아버지의 훌륭함을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익히 듣게 된다. 이것으로 보면, 이귀의 어머니 안동권씨는 상당히 총명하고 부덕이 높은 분으로써, 자녀들의 교육과 훈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14세에 이르자, 시골 익산에서 학업을 위하여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상경한다. 14세 소년으로 서울에 온 이후,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을 만나 같이 공부하며 평생을 같이하는 친구가 된다. 특히 이항복과는 밤새워 놀다가 이별을 아쉬워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된다. 그리하여 선조 말에서 광해군 때에 걸친 정치적 풍랑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는 동지적 관계를 유지한다. 또한 이덕형과는 어려서 윤우신(尹又新) 문하에서 같이 배우면서 절친하게 지내게 되는데, 이 또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사이가 된다. 이들과의 이러한 관계는 이귀가 스승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동인의 공격으로부터 옹호하는 상소를 올리다가 정치적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대로 유지된다.
여기에서 잠시 오성과 한음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을 소개한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돈독한 우정을 나눈 수많은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덕형의 문집인 『한음문고』와 그의 후손 이명교가 밝혔듯이, 둘은 과거장에서 처음 만났다. 특히 이덕형의 문집을 보면, 이덕형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가 총 110여 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이항복에게 보낸 편지만 무려 77통에 이른다. 특히 이덕형은 이항복을 ‘형’이라는 매우 격식 없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으며, “형도 내 마음 몰라요”라고 징징대는 편지도 남아 있다. 그런데 정작 이항복의 문집인 『백사집』에는 다만 이덕홍을 위해 지어준 시가 몇 수 남아있을 뿐, 이덕형에게 보낸 편지는 한 통도 실려 있지 않다. 20세가 되어 일생의 스승이 되는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이 된다. 당대의 대학자인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둔 것이다. 아마도 이귀의 넓고 해박한 지식과 지혜는 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박세채(朴世采)는 이귀를 이이의 고제자(高弟子)라고 말한다. 그는 초기에 과거시험보다 학문에 뜻을 둔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의 권고로 과거공부를 하여 26세 되던 해에 생원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당시의 문과시험에는 사마시(司馬試) 혹은 생진과(生進科)라고 하는 소과시험과 문과라고 하는 대과시험이 있다. 또한 생진과는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작문과 작시를 위주로 한 합격자는 진사(進仕)라고 하고, 경서 위주의 합격자는 생원(生員)이라 한다. 생원과 진사는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갖추게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하급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귀는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후에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던 도중에 다시 대과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1590년 34세에 강릉참봉으로 처음 벼슬길에 오른다. 강릉은 선조의 선왕인 명종의 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능의 제기 등 모든 기물을 묻고, 의병을 모집하여 평양 행재소로 달려간다. 그의 큰형 이보(李寶)는 400명의 익산 의병장으로 진산전투에서 순절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귀는 삼도소모관․삼도선유관․상서원직장․공조좌랑․유성룡의 종사관․장성현감․도총검찰관 등으로 맹활약한다. 왜란이 끝나고 김제군수․군기판관․체찰사소모관․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찰방․백천군수․함흥판관 등으로 선조 때에 18년간 벼슬한다. 특히 정인홍(鄭仁弘)의 죄 10조목을 선조에게 상소하여 정인홍의 대사헌 임명에 반대한다.
1608년 선조가 서거하고 광해군이 집권할 때에도 함흥판관 차사원으로 서울에 있었으며, 이어서 당상관으로 숙천부사에 임명된다. 1612년 모친상으로 경기도 고양 원당에서 3년간 여묘살이를 한다. 여묘는 부모가 죽은 후에 무덤 근처에 초막을 짓고 기거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여막을 지어 여묘하는 풍습은 중국의 장례제도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사회의 여막의 규모나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예고(禮考)」 <사상례조(私喪禮條)>를 보면,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미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도록 법제화하였다고 한다. 여막의 풍속은 고려 말부터 배출된 주자학자들의 생활에서 더욱 두드러져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는 사대부가에서 효행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묘살이를 한 자에게 특별히 정려표가 주어졌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일반 상민들은 물론 사대부가에서조차도 보편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닌 듯하다. 다만 부모나 남편의 죽음을 당하여 탈상하는 3년간 상복을 입은 채 일상음식을 피하면서 묘 옆의 초가에서 죽은 자의 무덤을 지키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효도를 다한다는 이상적 규범으로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귀는 경기도 고양 농가에서 3만자에 이르는 「갑인함사(甲寅緘辭)」라는 장문의 상소를 광해군한테 올린다. 「갑인함사」는 1614년(광해군 6)에 정인홍 등이 그를 죽이려고 이이첨(李爾瞻)․박재(朴梓) 등을 사주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자고 도모하였는데, 그에 대해 함사로써 임금에게 변명한 내용이다. ‘함사’는 조선시대 관아에 직접 출두할 수 없는 경우 서면으로 진술하는 문서를 말한다. 그러나 광해군은 듣지 않는다.
1616년 친구인 해주목사 최기(崔沂)가 모함을 받아 재판이 진행 중인데, 친구의 의리로 만난 것이 화근이 되어 강원도 이천에 유배된다. 1622년 유배와 연금에서 해제된 이귀는 평산부사겸 방어사로 임명된다. 또한 1623년 3월 12일 새벽 2시 홍제원에 집결한 1,000여명의 반란군은 ‘강상윤리를 밝힌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에 성공한다. 이것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김자점․이귀․이괄․심기원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 반란 후 이귀는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된다. 경성호위대장․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대사헌․개성유수․어영사․세자좌빈객․세자이사․지경연사․3차에 걸친 병조판서․이조판서․판의금부사․우찬성․좌찬성․연평부원군 등의 직책을 수행한다.
1633년 2월 후금 침략에 대비책을 논의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1633년 2월 5일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영의정에 증직되고 인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연평부원군 이귀의 졸기(卒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던 것이다.

“연평부원군 이귀가 졸하였다. 이귀는 강개한 성품에다 큰 뜻을 품어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자주 글을 올려 국사를 말하였는데, 그 말이 수천마디나 되었다. 광해군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김류(金瑬)․신경진(申景禛)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정사훈(靖社勳: 인조 때 반란을 평정한 공적) 1등에 포상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이르고, 충정(忠定)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귀는 조정에 있을 때 알고는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간혹 흥분하여 임금 바로 아래의 최고 대신들을 꾸짖다가 여러 차례 임금의 꾸지람을 받기도 하였으나 고치지 못하였다. 마침내 죽자, 임금이 비통해하며 특별히 하교하기를 ‘연평부원군 이귀는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도왔다. 그 충직함이 세상에 비할 데가 없으므로 내 몹시 애석하게 여긴다. 장례에 쓰이는 물건을 평소의 수량보다 특별히 더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묵재 이귀의 생애와 사상 연구」(이기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의정(金義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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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연산군 1)~1547(명종 2).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자는 공직(公直), 호는 잠암(潛庵) 또는 유경당(幽敬堂)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서울 장의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양진(金楊震)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허서(許瑞)의 딸이다.
22세(1516)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32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홍문관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쳤다. ‘청요직’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사헌부의 장령 1인, 홍문관 당하관 12인, 이조전랑 6인, 예문관 한림 8인을 지칭한다. 이들은 결코 품계가 높지는 않았으나 고위직 관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었다. 이 자부심의 배경에는 탐관오리의 자손이 후에 혹 사면을 받더라도 절대로 오를 수 없는 관직이라는 점도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2품(육조판서) 이상의 고위 관직에 오르지 못해도 청요직을 제대로 수행한 조상이 있다면, 그 가문은 명문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백성과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김안국(金安國), 이행(李荇)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때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김안로(金安老)와의 악연으로 인해 정치적 좌절을 겪었으며, 심정(沈貞)의 집안과 혼인한 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심정은 당시 신진사류들과 대립하던 훈구세력이었다. 심정이 1515년 이조판서에까지 승진하였으나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삼사’는 조선시대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합하여 부른 말로, 언론삼사(言論三司)라고도 한다. 또한 1518년에는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들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인 정국공신(靖國功臣)도 삭탈되었다.
이에 심정은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던 중 1519년 주초위왕(走肖爲王), 즉 ‘조씨(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말을 퍼트리며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키고 사류들을 숙청했다. 1527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으나, 복성군(福城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서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이항(李沆)․김극핍(金克)과 함께 신묘3간(辛卯三奸)으로 지목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김의정은 인종(仁宗)의 동궁 시절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지낸 것을 인연으로 인종이 즉위하자, 김인후(金麟厚)와 함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종이 즉위한지 7개월 만에 승하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여 스스로 ‘잠암’ 또는 ‘유경당’이라는 호를 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삶을 마쳤다. 경상도 예천군 광석산 선영에 묻혔다.
김의정은 조선 중기 뛰어난 문장과 의로운 삶의 행적으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훈고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해 네 차례의 사화(士禍)가 일어났던 혼란기였다. 사림들이 화를 당한 사건이라는 뜻으로 ‘사화’라고 부른다. 연산군 대부터 명종 대에 이르는 60여 년간의 기간은 사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기에 김의정은 『소학(小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의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학문에 힘썼으며, 평생 의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창작한 문학작품에는 이러한 그의 학문과 의리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김의정의 삶과 문학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남곤(南袞, 1471~1527)은 김의정의 뛰어난 재주를 후진 문학자들 가운데 제일로 꼽았으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김의정의 문장과 절의는 세상에 영원히 전해져야 할 것이라고 칭송하였으며,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은 김의정을 상서로운 세상에 높이 나는 봉황에 비유하였다. 아울러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김의정의 「천형부(踐形賦)」에 대해 문장과 논리가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였으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기강부(紀綱賦)」에 대해 작품의 논리가 매우 훌륭하니 평소 실천의 독실함을 볼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여기서는 김의정이 특히 부(賦)의 창작에 탁월했다는 평가에 근거하여, 그의 ‘부’ 작품을 소개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는 유가적 도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곳곳에 드러난다. 김의정의 부 작품에 나타나는 유가적 도리의 실천의지는 쉼 없는 공부를 통해 축적한 학문적 소양이 그의 작품 속에 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의정의 부를 ‘수신(修身)의 의지’라는 주제에 기초하여 살펴본다.
‘수신’은 유가적 실천항목 가운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고, 『대학』의 팔조목에 의하면 수신을 위해 이루어야 할 공부가 격물․치지․정의․정심이다. 『대학』은 사서(四書) 가운데 하나로, 그 내용은 크게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으로 나눌 수 있다. 삼강령은 밝은 덕을 밝히고(明明德), 백성을 친애하며(親民), 최고의 선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止於至善)을 말한다. 또한 팔조목은 사물에 나아가는 격물(格物), 지식을 이루는 치지(致知), 뜻을 진실하게 하는 성의(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 몸을 닦는 수신(修身),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평천하(平天下)를 말한다.
김의정은 이 항목들의 중요성과 실천의지에 대해 여러 작품에서 언급하였다. 「환우부(寰宇賦)」에서는 우주의 진실하고 쉼 없는 운행을 본받아 인간도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 자강불식의 자세로 마음을 수양하여 중화(中和)를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중화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써, 감정이나 성격 등이 지나치거나 치우치지 아니함을 말한다. 희로애락(喜怒哀樂), 즉 기쁜․성냄․슬픔․즐거움의 감정이 아직 사람의 행동에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며, ‘화’는 그러한 것이 이미 행동으로 나타나 절도에 맞음을 말한다. 이러한 중화의 덕이 지극히 이루어지면, 세상이 안정되고 만물이 모두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또한 「뇌전부(雷電賦)」에서는 번개나 우레와 같은 외부의 어떠한 변화에도 동요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에서 비롯함을 피력하였다. 「방예부(放麑賦)」에서는 선행을 베풂에 시비판단이 명확하게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격물․치지와 연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검각부(劒閣賦)」․「무광지자황부(務廣地者荒賦)」 등에서는 통치자가 수신을 이루어 덕치(德治)를 시행해야만 국가를 온전하게 통치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형부(踐形賦)」는 『맹자』「진심(盡心)」에 보이는 “사람이 지닌 형색(形色)은 천성(天性)이니, 오직 성인의 경지에 이른 뒤라야 형색을 실천할 수 있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可以踐形.)라는 말에 착안하여 창작한 것이다. 조광조의 논평을 참고하면,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그의 나이 19세 이전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하늘로부터 음양의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을 그대로 품부 받은 인간은 그 자체로 온전한 존재이지만, 각자 자신의 본래 모습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품부받은 대로 살아가지 못함을 개탄하며, 동시에 천형(踐形)을 실현할 것과 나아가 정심(正心) 공부를 통해 본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형색이 바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니,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각자의 형색을 발현하는 것이다. 우리 몸에 있는 눈․코․입․귀는 각각 나름의 기능이 있으니, 어느 하나 헛되이 있는 것은 없고, 그것 자체가 바로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도덕적 준칙이다. 그러므로 나의 형색을 제대로 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김의정은 맹자가 언급한 ‘천형’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천형’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을 바로 하여 본성을 보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스스로 법도를 다해야 하니, 어찌 꼭 형체를 실천할 필요가 있으랴? 진실로 나의 이 본성을 다한다면, 형체가 저절로 따라서 드러나리라. 형체는 드러나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이치는 묘하게 숨었으니 마음으로 터득해야 한다오. 마음에서 찾지 않고 형체에서 찾는다면 또한 덕을 다할 수 없다네. 천(踐)이라는 한 글자는 아무런 뜻이 없는 것이 아니네. 이것은 없는 것을 책하여 있기를 바라고, 고요한 것을 두드려 소리를 얻음과 같다오. 돌아보면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뜻이 더욱 깊다네. 실천하면 참다운 내가 있고, 실천하지 않으면 참다운 내가 없다네. 마음을 따라 사지(四肢)를 관장하여야 좌지우지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터럭 하나와 머리칼 한 올도 혼연하여 나의 마음을 막지 않으리니. 저 신령한 혼(魂)이 백(魄)을 떠나면 마음이 멋대로 날아가 방종하고, 오직 육체만이 홀로 남아서 마치 빈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같네. 비록 귀와 눈으로 보고 듣더라도 모든 이들은 그것이 빈껍데기 인줄 안다네. 나는 이를 슬퍼하고 두려워하여 이 가르침을 지켜 날마다 살피노라.”

사람이 타고난 형색(품성)을 실천하고 본성을 지극히 해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다.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보존한다면, 형색은 저절로 발현될 수 있다.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 형색은 방종하게 되고, 그것은 마치 텅 빈 산의 말라죽은 나무와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사람의 형체는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 실상은 한 덩어리 혈기로 이루어진 몸뚱이일 뿐이요, 물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바로 하지 못하여 본성을 보존하지 못하게 됨은 그 무엇보다 애통한 일이다. 때문에 김의정은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자신을 성찰할 것을 다짐하였던 것이다.
김의정의 부는 어려운 시어를 구사하지 않고, 경전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조광조는 이 작품의 문장과 논리를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한 것이다.

[참고문헌]: 「잠암 김의정 賦문학 연구-작품에 형상화된 주제 의상을 중심으로-」(김진경, 『우리어문연구』38, 우리어문학회, 201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발(李潑)


이발(李潑)                                                             PDF Download

1544(중종 39)~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이발의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이며,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 이중호(李仲虎)는 예조참판․전라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어머니 해남윤씨는 최산두(崔山斗)․유성춘(柳成春)과 더불어 호남 3걸이라고 불리는 윤구(尹衢)의 딸이다. 1544년(중종 39)에 해남의 백련동 외가에서 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윤의중(尹毅中)의 사위이며,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고모부이다. 이발의 처조카인 윤선도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연루되어 온 가족이 몰살되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정여립 옥사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도 부른다.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발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 여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1568년(선조 원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73년(선조 6) 9월에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호당은 독서당으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내기 위하여 건립한 전문 독서연구기구이다. 그 뒤 이조정랑․대사간․대사성․부제학 등을 역임한다. 경학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삼아 선비들의 여론을 주도하고, 임금이 공부하는 곳인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왕도정치를 제창하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한다.
왕도정치는 맹자(孟子)가 주장한 정치사상이다. 무력이나 강압과 같은 물리적 강제력으로 다스리는 패도정치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도덕적 교화를 중시하는 정치를 말한다. 맹자는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마음으로는 복종하지 않게 되고,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진심으로 따르게 되니, 덕에 의한 왕도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유가들이 가장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사상이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란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조광조가 추구한 이상적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치’란 『서경』「군진(君陳)」편 ‘지치형향 감우신명(至治馨香 感于神明)’에서 따온 것이다. 잘 다스려진 인간세계의 향기는 신명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지치’가 조광조에 의해 하늘의 뜻이 실현된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실천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유가에서의 이상사회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의 삼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지치주의란 이상적 정치이념으로써 당시의 백성들을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삼대의 백성들로 만들려는 이상정치의 현실적 실천운동이다. 『서경』은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이다. 사서삼경은 유교의 기본 경전인데, 사서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을 말하며, 삼경은 『시경』․『서경』․『주역』을 이른다.
이조전랑으로 있을 때에는 자파의 인물을 등용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으며, 동인의 거두로서 정철(鄭澈)의 처벌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주도하였다. 이 때문에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분이 점점 멀어져 서인의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발은 1589년(선조 22)에 기축옥사로 교외에서 ‘죄를 기다리던’ 중 잡혀서 두 차례 모진 고문을 받고, 그해 12월에 매에 맞아 죽었다. 동생 이급(李洁)도 연좌되어 죽었고, 그의 82세 노모와 10세의 아들도 이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이발과 이길의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이들의 죽음은 서인에 대한 동인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죄를 기다리는 것’은 보통 석고대죄(席藁待罪)라고 부른다. ‘석고대죄’는 죄지은 사람이 거적에 꿇어앉아 윗사람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처벌을 자청하는 것이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저놈에게 곤장 백 대를 쳐라.” 이런 처분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석고대죄는 보통 속옷 차림에 가깝도록 의관을 벗고 하는데, 몹시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큰 벌이다. 죄를 처분할 사람이 결단할 때까지 밤이 깊든, 눈비가 오든 그대로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 정조의 아버지이고, 회고록인 ‘한중록’을 남긴 혜경궁 홍씨의 남편이며, 아버지(영조)와의 갈등으로 뒤주에서 굶어죽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석고대죄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동생인 이길과 함께 죄가 면해지고 관작이 복원되었으며, 몰수한 재산은 되돌려졌다. 숙종 26년(1694)에는 이발과 이길의 절개와 행실을 기려 그 옛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정문’은 충신․효자․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다.

여기서는 이발의 학문경향을 동인과 서인의 분당, 나아가 남인과 북인의 분당을 둘러싼 논점을 통하여 소개하겠다. 즉 성종(成宗)대 이래 비교적 단일한 색채를 유지하던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다시 동인이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들의 학문경향과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분당의 원인은 야사(野史)에서 전해지듯, 단순히 서로 간의 사사로운 감정 대립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파와 학파 사이의 갈등과 투쟁이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각각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거나 또는 학문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16세기는 주자학에 입각한 유교적 가치관과 도덕규범이 보편화되는 시기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주자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경향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즉 주자학적 사유체계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사유체계의 모색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이 시기가 주자학의 강경한 논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사회․경제의 발전과 시대상황이 변동됨에 따라, 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비(非)주자학에 입각한 현실인식과 대응방법에 대한 지식인들 내부에 이견이 생기는데, 이것이 결국 정치입장과 정치이념의 차이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 학문의 공통분모는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이었다. 그러나 학자와 학파에 따라 이기설에 대한 해석과 이해를 달리하고, 궁극적으로 주자학과 비주자학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학문경향이 공존하며 갈등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서인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그 중심으로 하였으며, 동인은 이들에서 제외된 다양한 학파의 집합체였다. 동인 내부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그리고 서경덕(徐敬德)의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이들이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때문에 이황과 조식 또는 이황과 서경덕의 사상적 차이가 제자들에 이르러 표면화되고, 급기야 중앙정계에서 남인과 북인이라는 두 세력으로 갈라지게 된다.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인’의 동질성은 더 이상 부각되지 않게 된다.
북인의 학문적 연원이라 할 서경덕과 조식은 기적(氣的) 사유에 기초하여 정치․사회의 운영론을 모색한다. 서경덕은 성리학 이해에 있어서 주희의 입장보다는 소옹(邵雍)과 장재(張載) 등 북송 성리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여 세계의 시원과 운동의 원리를 ‘기’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기일원론적(氣一元論的) 세계관을 체계화한다. 이것은 당시 조선학계에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형태의 기적인 사유를 종합하고 체계화한 것으로서, 이선기후(理先氣後)․이본기말(理本氣末)에 입각하여 ‘리’를 사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자학(=이학)과는 그 근본에서부터 성격을 달리하는 사유이다. 이에 바탕하여 서경덕과 그의 후학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론적 사유를 수용하는데, 이들이 대부분 소옹의 상수학(象數學)에 밝으며, 노장사상이나 양명학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식의 학문도 서경덕의 학문과 유사한 면모를 지닌다. 그가 노장학을 숭상한다거나 양명학을 수용하였다는 세간의 평가는 ‘기’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사상적 면모를 부각시킨 것이라 하겠다.
북인은 대체로 서경덕과 조식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서울․호남과 경상우도 지역을 근거지로 학문 활동을 펼친다. 이들은 서경덕과 조식에게서 직접 배운 제자들이거나 혹은 재전 제자들이다.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던 이발은 모두 서경덕의 학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이발은 서경덕의 학문에 연원을 둔 김근공(金謹恭)․민순(閔純)의 문하에서 배웠고, 부친인 이중호 또한 민순에게서 배웠다. 이발의 친구이자 사돈인 홍가신(洪可臣) 또한 민순의 제자였다. 또한 이발은 조식의 고제인 최영경(崔永慶)과 가장 친하였으며, 직접 최영경과 정여립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한다.
이발과 사승관계나 친교를 맺는 인물 중 김근공․민순․홍가신은 서경덕 문인이며, 최영경․김우옹은 조식 문인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발은 비록 조식과 직접적인 사승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조식의 문인들과 학문적 교류가 왕성하다. 이렇듯 이발은 서경덕 문인과 조식 문인과 고르게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이발의 학문이 서경덕과 조식 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서인들이 정여립 역모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은 북인계의 주요 인물을 처벌하여 그들의 정치력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북인 내부에 존재하는 비주자학적 학문경향을 척결하는데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남인들은 서인의 옥사처리를 관망하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북인세력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발이 정여립을 이조전랑으로 추천하였을 때, 이황의 문인인 이경중(李敬中)은 정여립의 사람됨을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시킨 일이 그것이다. 예컨대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 역모에 대해, 유성룡 등 남인은 정여립이 일찍부터 ‘훌륭한 선비(善士)’가 아님을 알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반면 정여립을 ‘아름다운 선비(佳士)’로 추대했던 이발․정인홍․정언신․백유양 등 북인은 역모가 조작된 모함이라는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정여립을 둘러싼 학자들 간의 상반된 평가는 남인과 북인 붕당의 중요한 빌미가 된다. 서인들은 정여립을 역모 혐의와 별개로 사상적으로 주자학을 벗어난 이단(異端)적 인물로 평가한다. 또한 남인들도 정여립을 ‘훌륭한 선비’가 아닌 인물로 경시한다. 이처럼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친화적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마도 조식․서경덕 학파에 비해 이황학파가 이이․성혼학파의 주자학적 정치론을 공유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이렇게 볼 때, 북인과 서인, 북인과 남인이 서로 대립하는 중요한 계기 중의 하나는 정여립을 둘러싼 정치적․학문적 견해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지적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은 북인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상반된 입장은 단순히 정여립 개인에 대한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내포하는 북인의 학문이나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를 달리하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인은 학문방법, 정치론, 현실인식 등에서 서인은 물론 남인과도 서로 대비되는 모습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이로써 기축옥사는 북인과 서인뿐만 아니라, 북인과 남인 간의 정치적․학문적 특성을 명확히 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서경덕․조식의 기론적 사고에 근거한 정여립의 사상과 그 사상에 동조하는 북인은 이이학파의 서인이나 이황학파의 남인과는 달리, 주자학과는 다른 정치성향을 모색한다. 이발의 학문 또한 이러한 ‘기’를 중심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함으로써 주자학 이외의 다른 학문까지도 폭넓게 포용하는 비주자학적 학풍을 견지한 북인의 학문적 전통 속에서 조명해야 할 것이다. 이발은 서경덕․조식의 학풍 속에서 당시 시대적 과제를 고민하고 정국의 실천방안을 모색하였던 북인의 대표적인 학자요 관료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동암 이발의 학문경향과 정치활동-청신정치의 청산을 둘러싼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심으로-」(김정신, 『호남문화연구』46, 호남학연구원, 200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