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덕2: 경세의 역량

효종의 덕2: 경세의 역량 .

 

종의 재위 기간은 길지 않다. 딱 10년이다. 십 년의 재위 기간 효종조 국시가 북벌이었다. 송시열이 <지문>에 쓴 것처럼, “임금은 총명하고 슬기로운 성품으로써 위태로운 국운을 구제할 뜻이 있어 왕위에 있은 지 10년 동안에 하루도 게으르게 지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나라 백성들이 바야흐로 공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정되는 날을 발돋움하고 목을 빼고서 기다렸으나 갑자기 승하하셨다. 아! 천명이로다. 참으로 그야말로 ‘왕업을 창시하여 절반도 못 이루고 중도에서 돌아가다’는 옛말과도 같으니 천명이로다.”

효종이 정사를 어떻게 했는지 <연려실기술>에 실려 있는 내용을 토대로 소개한다. 총명하고 슬기로운 성품을 지닌 효종이 위태로운 국운을 구제하기 위해 재위 10년 동안 하루도 게으르지 않고 국정을 행한 기록의 대강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효종조의 국시는 북벌이다. 강한 군대는 필수다. 강한 군대를 지향한 효종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글이 <조야첨재>에 나온다.

“임금(효종)이 경연에서 탄식하며 이르기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대체로 겁이 많다고 말한다. 정축년의 일을 볼 것 같으면, 패인은 정예의 군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훌륭한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옛날 이광(李廣)은 군중(軍中)에서는 조두(刁斗, 시간을 알리는 꽹과리)를 치지 않고 척후병을 멀리 보내 적의 정세를 정탐했다 한다. 병자년의 난리에 장수된 자가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여 신경원(申景瑗)은 싸우지도 못하고 또한 달아나지도 못했으니 우리나라 장수로서 이웃 나라 사람에게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문관은 문(文)을 숭상하여야 하고, 무관은 무(武)를 숭상하여야 국가가 취하는 바가 어긋나지 않는 것인데, 오늘날은 그렇지 못하여 문관이 무관처럼 생긴 사람은 으레 경멸함을 받고 무관은 서생처럼 되어야 세상에 용납을 받게 되었다. 만일 무관이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광망하고 패악하다고 지목하니 이와 같은 습관은 참으로 부끄럽다. 옛날 양호와 두예 같은 사람처럼 가벼운 갖옷과 느슨한 띠를 다시 볼 수 없고 지금의 무관은 선비와 같으니 어찌 싸움터에서 힘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장수가 출중해야 한다. 효종은 용명한 장수가 나오지 못하는 당시 조선의 문화를 한탄했다.

유학에서 말하는 훌륭한 정치는 현인을 등용하여 정사를 맡기는 것이다. 효종이 대신을 우대하려고 노력했다는 일화들이 있다.

“임금(효종)이 즉위할 때,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 전 참의 권시(權諰)ㆍ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崔蘊) 등이 맨 먼저 부름을 받고 왔다. 그들의 객지 생활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주었다. 송시열과 이유태의 어머니가 늙고 병이 있음을 듣고 감사를 시켜 쌀과 반찬과 약을 주게 하고, 그들을 불러올릴 적에 가마를 타고 오게 하였다. 장령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때에는 털옷을 주어 덮게 하였고 그가 죽자 호조 낭관에게 명하여 그 상을 보살피게 하고 날마다 내시를 보내어 상을 감독하였다. 모든 이름이 있는 선비는 찾아서 등용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정성을 다해 높임이 시종 한결같았다.”

대신을 우대한 모습이 보인다. 물론 효종만이 이렇게 했다는 것은 아니다. 조선의 왕들은 늘 어진 신하를 우대하려고 했다. 물론 어제의 어진 신하가 오늘은 무엄한 신하로 전락해서 종종 그 사랑이 채 식기도 전에 싸늘한 유배형에 처해지곤 했지만 말이다.

효종이 어진 신하를 우대하고 그들에게 정사를 물으려고 했던 효종 스스로의 깨달음을 토로한 말이 <조야첨재>에 전한다.

“을미년(1655) 봄에 주강에서 명나라의 일에 말이 미치니 임금(효종)이 말했다. ‘숭정황제가 망할 적에 조정의 신하 중에 하나도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자가 없었고 따라 죽은 자는 단지 한 내관(內官)뿐이었으니 진실로 부끄럽도다. 내가 명나라의 제도를 보건대 사람들로 하여금 병기를 가지고 모시게 하고, 여러 신하가 일을 아뢸 때에 임금의 뜻에 맞지 아니하면 쳐 죽였고, 또 동서창(東西廠)을 설치하고 환관들을 시켜 다스리게 하여 천하의 일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 한 짓을 본다면 나라가 망한 것이 너무 늦었다.’ 했다.”

신하를 무시한 종국이 어떻다는 것을 효종이 잘 알고 있다는 예화다. 현종이 김수항에게 내린 비답에서 효종이 송시열을 대접하기를 ‘마치 은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대접하고, 주나라 문왕(文王)이 여상(呂尙, 이른바 강태공)을 대접하고, 한나라 소열(昭烈, 이른바 유비)이 공명(孔明, 제갈공명)을 대접하고, 당나라 태종이 위징(魏徵)을 대접한 것과 같다’ 한 연유가 될 것이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다. 백성은 의식주를 하늘로 삼는다. 바른 정치는 의식주를 해결한 후에 나온다. 맹자가 왕도정치를 말하면서 의식주를 말한 후에 교화를 논한 것이 이런 이치다. 공자가 부유하게 한 후에 가르쳐야 한다고 한 이치도 역시 마찬가지다.

“정유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심양으로 가는 길에 농사일을 자세히 보니 관개하는 일은 수차만한 것이 없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를 전혀 알지 못하니 빨리 조정에 이것을 의논하게 하여 그것이 편리한지 아닌지를 살펴서 지방에 전파하여 농사를 권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 했다. 이는 한인(漢人)의 제도이다. 그때 공주 목사 신속(申洬)이 <농서(農書)>를 편찬 인쇄하여 올리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칭찬하고 예조에 명하여 많이 인쇄하고 널리 반포하여 민폐를 덜게 하였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다. 벼농사에 절대적으로 의존한 조선에서 수확 증대를 위한 다양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효종의 지시대로 수차를 제대로 보급했는지 모르겠지만 효종이 농사법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직접 제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도 일종의 선진 기술 도입 측면이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굳이 ‘한인의 제도’라고 밝히는 데에서 또한 당시 시대상을 읽어낼 수도 있어서 흥미롭다.

다음의 기록은 효종의 세심한 마음이 드러난다. 이 또한 인정을 베푸는 근간이 되는 마음자세다.

“형조에서 삼복(三覆)을 거쳐 확정된 죄인들을 법에 의하여 처단하려고 할 때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겨울인데 따뜻한 일기가 봄날과 같고, 장맛비가 그치지 않으며, 짙은 안개가 사방을 막았으니 내 마음이 두렵고 놀랍도다. 10여 명의 사형수를 모두 오늘 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삼복을 거쳤으나 아직도 미진할까 염려되니, 다시 여러 경들에게 묻는다.’ 하고, 다시 판결하여 특별히 2명의 사형수는 감형했다.”

조선시대는 지속적인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량의 증대를 달성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백성들이 매일 두 끼를 해결하기 쉽지 않았다. 한정된 재화를 아껴 쓰는 검소함은 당시의 중요한 미덕이었다. 오늘날 소비를 미덕으로 삼는 시대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난다.

조선의 왕들은 내핍을 강조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는 두 말이 필요 없고 효종도 검소한 생활을 늘 강조했다. <공사경문>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동평위(東平尉)가 일찍이 모시고 점심을 먹는데 밥을 물에 말았으나 다 먹지 못했다. 임금(효종)이 이를 꾸짖기를, ‘먼저 다 먹을 수 있는 양을 헤아려 보고 물에 말아서 남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다. 물에 말아 남긴 밥을 혹 새나 짐승에게 먹이면 아주 버리는 것은 아니지마는 무지한 천인들이 곡식을 귀중히 여기는 도리를 전혀 모르게 된다. 땅에 음식을 버리면 하늘이 주신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다. 이는 밥을 먹는 사람의 잘못이니 복을 아끼는 도리가 아니다.’ 했다.

물에 말은 밥을 남긴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반인도 아니고 왕과 부마의 점심에서 나온 대화다. 근검의 정신을 새삼 느낀다. 당시의 경제 사정이 어떠했는지도 덤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숙휘공주(淑徽公主)가 일찍이 수놓은 치마 한 벌을 해달라고 청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검소함을 솔선하고자 하는데 어찌 너로 하여금 수놓은 치마를 입게 하겠느냐. 내가 죽은 후 너의 모친이 대비가 된 뒤에는 네가 그것을 입더라도 사람들이 심히 허물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 다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군사력이 있어야 하고,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다. 왕이 이 모든 조직의 정점에 위치한다. 사회의 모든 조직은 왕이라는 꼭지점을 향해 피라미드처럼 위계를 이룬다. 마치 여왕벌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꿀벌사회다.

정점에 있는 왕의 리더십은 절대적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말한 철인이 왕이 되는 정치가 필요하다. 리더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리더의 영향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리더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생사가 달렸다는 말이다.

정치는 시세를 읽는 눈이 필요하다. 법가에서 말하는 세(勢)에 해당한다. 효종이 시세를 읽어내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임진년(1652) 겨울 10월 주강(晝講)에서 임금(효종)이 말했다. ‘옛사람의 나라가 망하는 데는 한 가지 길이 아니다.’ 이 말은 참으로 이치가 있다. 명나라가 망한 것을 볼 것 같으면 숭정황제(崇禎皇帝)가 밖으로는 사냥하고 놀러 다니는 오락이 없없다. 안으로는 정원이나 화초나 동물 등의 즐김도 없었다. 나라를 망하게 할 일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은 ‘명찰(明察)’ 두 글자의 도리를 극진히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다른 나라의 흥망은 논할 것이 없거니와 오늘날에 와서 나라 일이 이와 같아서 끝내는 어찌 될지 알지 못하겠으니 내 마음이 타는 것 같도다.’ 했다.”

‘명찰’ 두 글자가 시세를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효종이 갑작스레 승하하기 몇 해 전에 군비와 관련하여 대신들과 나눈 이야기가 <공사견문>에 있다.

“병신년(1656)에 임금이 장렬(莊烈) 조대비(趙大妃)를 위하여 만수전(萬壽殿)을 지을 때 도제조 정태화(鄭太和)와 제조 원두표(元斗杓), 정유성(鄭維城), 허적(許積) 등이 전(殿)의 터를 살펴보러 들어가면서 후원을 경유했다. 임금이 지나는 길의 별당에서 기다렸는데 공들이 사관과 같이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하여 사양하였으나, 임금이 서서 재촉하여 들어가 뵈었다. 임금이 손수 술잔을 들어 권하며 국가 대사를 의논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수명이 촉박한 것을 알고 슬픈 말씀이 많은지라 공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지금 군비(軍備)에 유의하여 조치하는 일이 많으나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제작하는 것은 나라에 나이 든 임금이 있을 때에 할 일이고 나이 어린 임금을 받든 이들은 할 일이 못된다.’ 했다. 갑인년 이후로 신하들 가운데 병사(兵事)로 화를 당한 이가 대단히 많았으니, 임금의 말씀이 과연 맞았다.”

본 기록에는 여러 복선이 깔려 있는 것으로 사료되지만, 효종이 대신들과 나눈 대화는 날조가 아닐 것이다. 효종의 이 말은 또한 효종이 시세를 살핀 결과다. 복수설치를 위해 북벌을 국시로 내세우며 10년 재위 기간 하루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효종이지만 이 대목은 시세의 엄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효종의 심정이 손에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