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의 덕1:도회(韜晦)

효종의 덕1:도회(韜晦).

 

알려진 것처럼 효종은 애초에 왕위에 오를 왕은 아니었다. 둘째 아들인 효종 위로 장형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가 누구던가?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16세(1627, 인조 5년)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소현세자는 24세(1625, 인조 3년) 정월에 왕세자로 봉해졌다. 2년 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 등과 함께 전주에 내려가 분조(分朝)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했고,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왔다.

34세(1635, 인조 13년)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르다가, 다음해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盛京,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 뒤 소현세자는 1640년과 1644년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를 빼고 9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서 명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점령하자, 그해 가을에는 북경으로 옮겨졌다. 마침내 44세(1645년, 인조 23) 음력 2월에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이 강화되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이런 와중에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북경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었다. 고양의 소경원(昭慶園)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염습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영의정 김류 등 대신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손인 이석철이 아니라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는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를 죽였다. 1647년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인 1656년(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에 효종이 대군으로 세자에 책봉되기 전 그의 사부인 윤선도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일례를 보여준다.

“임금(효종)이 일찍이 잠저에 있을 때, 사부인 윤선도(尹善道, 1587-1671)에게 처신하는 방도를 물었다. 윤선도가 아뢰기를, “‘공자와 왕손은 꽃다운 나무 밑이요, 맑은 노래 아름다운 춤은 지는 꽃 앞이로다.[公子王孫芳樹下 淸歌妙舞落花前]’ 하였으니, 이 어찌 천고의 명작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것은 도회(韜晦 세상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처세하는 것) 하라는 귀띔이었다. 임금이 늘 여러 부마들에게 이르기를, ‘그때 선도가 나를 아껴서 한 말인데 나를 깨우치는 데 도움이 많았다.’고 하였다.”

효종이 조심하고 삼가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잘 돌아봤을 것 같다. 훗날 효종 스스로 말하길, ‘내가 잠저에 있을 때에는 술을 즐겨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세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끊고 마시지 않았다’는 말도 의미심장하다.

국왕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봉건왕조시대에 군주가 신하의 생사여탈의 권한을 휘두르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 것은 분명하지만 신하들은 신하들대로 힘을 행사했다.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과 본보기를 보고 자란 명문가의 자제 출신의 신하이든, 한미한 가문이지만 능력이 출중하여 높은 성적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환로에 들어선 신하이든, 그들은 늘 임금과 협력과 긴장 관계를 조성하고 있었다. 임금 또한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도 자신의 국정 운영 방향을 고수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사견문>에 효종이 신하를 평가하는 글이 실려 있다.

“임금(효종)이 일찍이 현종에게 이르기를, ‘내가 형님인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신하와 백성들이 나에게 어진 덕이 있다고 잘못 알고 마음으로 따랐다. 내가 보니 여러 신하 가운데는 혹 마음속으로 (나를 친히 대하면 소현세자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여 스스로 나를 소원하는 자도 있었고 혹은 나에게 간곡히 하여 뒷날의 복을 기대하는 자도 있었다. 내가 그때는 비록 아부하는 것을 물리치지 못했지만 임금 자리에 오른 뒤로는 늘 그때 아부하지 않고 바르게 몸을 가지던 자들이 관직에 추천되는 것을 보면 번번이 가상히 여겨 낙점을 찍었다. 만일 오늘날 종실 중에 전날 나처럼 인망을 얻는 자가 있다면 지난날 나에게 아첨하던 자가 반드시 지난날 나에게 남몰래 후하게 했던 그 행동을 그 사람에게도 할 것이니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 몸가짐을 바르게 하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고 아첨으로 나의 환심을 사려던 자는 아무개 아무개이니 너는 모름지기 내가 사람을 쓰고 버리는 뜻을 알아두라 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에 약하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칭찬의 외피를 걷어내면 개인의 영달을 위한 아첨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을 수 있다. 아첨하는 사람은 오늘 갑에게 아첨하다가도 내일 갑을 해치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효종은 이 이치를 자신을 이어 재위에 오를 현종에게 알려주고 있다. 효종의 체험이 녹아든 말일 것이다.

<조야첨재>에 실린 이야기다.

“갑오년(1654) 봄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석강(夕講)할 때에 노기(盧杞)가 안진경(顔眞卿)을 죽이고 이규(李揆)를 내쫓는 일에 이르러서 임금(효종)이 이르기를, “소인은 대단히 간교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 술책을 쓰는데 노기가 덕종(德宗)을 어린아이같이 놀렸으나 덕종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그 어두움을 알 만하다. 역사를 읽는 자는 장차 이것을 보고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힘써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지금의 우리 보기를 오늘날에 우리가 덕종을 보는 것처럼 하지 말도록 하라 했다.”

간신의 뇌간을 꿰뚫어보는 효종의 위엄이 느껴진다. 세상에 재주와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처세하는 도회(韜晦)를 하면서도 정사(正邪)를 분명히 살펴야 한다는 말이다.

궁중의 암투는 치열하다. 효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사견문>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후궁 이씨는 본관이 경주인데 숙녕옹주를 낳았으나 임금이 생전에는 이씨 직위가 숙원(淑媛)에 그쳤고 생활비 공급도 호조에서 나오는 것 외에는 조금도 특별히 더 준 것이 없었다. 현종이 동궁에 있을 때 궁중의 남는 물자로 이씨의 생활비의 부족을 보태어 줄 것을 여러 번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네가 다른 날에 은혜를 베풀도록 남겨두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아마 임금이 그로 하여금 당대에는 위엄을 두려워하게 하고 후사에게는 은혜를 받도록 한 것일 것이다. 앞의 일을 염려하고 뒷일을 생각함이 이렇듯 깊었다. 숙종 때에 안빈(安嬪)으로 봉하였다.”

과연 효종이 이씨를 진정으로 아껴서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그리했는지, 아니면 숙종이 장희빈을 왕비로 삼을 정도로는 사랑하지 않아서 그리했는지는 모르겠다. 효종이 앞일을 준비하는 마음만은 분명히 살필 수 있다. 이 또한 도회(韜晦)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 자료

<두산백과: 소현세자(昭顯世子)>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