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과 현종

예송과 현종.

 

종(顯宗, 1641-1674)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왕은 아니다. 태종, 태조, 세조처럼 흥밋거리가 많은 왕도 아니고, 세종, 정조처럼 위대한 업적을 이룬 왕도 아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선조나 인조처럼 국난에 맞선 왕도 아니었다.

현종 때에 두 번의 예송(기해예송,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본 예송은 조선유학사, 정치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예송은 극소수의 전문가를 제외하고 사건 전말을 숙지하기 어렵다. 일반인들이 현종이 낯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비는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김우명이 국구로서 송시열과 대립각을 세우는 장면이 <실록>에 자주 보인다.

현종은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瀋陽)에 있을 때 심관(瀋館)에서 출생하였다. 조선에서 태어나지 않고 중국에서 태어났다. 출생이 특별하다.

9세(1649, 인조 27년) 왕세손에 책봉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로 진봉(進封)되었다. 앞서 1645년에 귀국한 소현세자가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갑자기 죽자 이어서 봉림대군이 세자에 오른다. 봉립대군이 바로 현종의 아버지인 효종이다. 19세(1659)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여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중요하게 다뤄지는 업적으로는 1662년(현종 3년) 호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였다. 1668년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어 천문관측과 역법(曆法) 연구에 이바지하였다. 지방관의 상피법(相避法)을 제정했고, 동성통혼(同姓通婚)을 금지시켰다.

현종은 효종대에 은밀히 계획해 놓은 청나라에 대한 보복정벌인 북벌을 국제관계와 국내 사정으로 중단하는 대신 군비(軍備)에 힘써 훈련별대(訓鍊別隊)를 창설하였다. 현실적인 국제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 실제적인 군사 행동을 준비하는 대신 명나라를 숭모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숭명활동은 다음의 숙종 때에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송이 현종의 즉위년 시작과 대미를 장식한다. 현종은 즉위하자 기해복제(己亥服制) 문제라는 예론에 부딪혔다.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趙氏)가 효종을 위해 무슨 복을 입어야 하는 문제였다. 이후 복제문제는 정쟁으로 번졌다. 당시 일반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家禮)>에 의한 사례(四禮)의 준칙을 따랐다. 그러나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정된 <오례의(五禮儀)>를 따르고 있었다.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효종이 인조의 맏아들로서 왕위에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책립되었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에 자의대비가 맏아들 복으로 삼년상을 이미 치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효종의 상을 당해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문제가 되었다.

서인측은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주동이 되어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인측의 윤휴(尹鑴)하와 허목(許穆) 등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고 해도 왕위를 이어받았으므로 삼년상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왕위를 계승한 왕으로의 권위와 둘째 아들이라는 인륜의 법도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할 것인지 문제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남인은 왕권을 높였다면 서인은 왕이라고 할지라도 인륜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후에 송시열을 두고 효종의 특별한 후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여 왕을 높이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맥락이다.

당시 정치계는 1575년(선조 8) 동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정치계에 되돌아온 서인과, 동인 계열이지만 북인·남인으로 갈라진 뒤 북인에게 배척되었다가 역시 인조 때 조정에 복귀한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도 인조·효종 때는 감정적인 대립이 적어서 특히 학문에서는 교섭이 원활하였다.

예론 과정에서 당론이 극단적 대립을 보이자 서인측의 주장대로 기년복이 조정에서 일단 결정되었다. 효종이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승중이기 때문에 장자로서의 권위를 가지지만 현실을 고려하여 기년복으로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렇지만 예론이 지방으로 번져 그 시비가 더욱 확대되었다. 1666년 조정에서 기년복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이에 항의하면 그 이유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할 것을 포고하기에 이르렀다.

1674년 왕대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문제가 재론되면서 예론이 또다시 거론되었다. 서인측의 대공설(9개월복)과 남인측의 기년설이 대립했다. 그 뒤 이 문제가 기년복으로 정착되면서 서인측의 주장이 좌절되었다.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이 때 서인측이 많이 배척되었다.

앞서 밝힌 것처럼 기해예송 당시 자의대비가 기년복을 입는 이유로는 자의대비가 이미 소현세자를 위해 삼년복을 입었다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효종이 둘째 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승중이기 때문에 장자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다만 현실상황을 고려하여 기년복으로 한다는 명분이었다. 여기에는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보는가의 문제가 표면화 되지 않고 기술적으로 넘어 갔다.

그러나 효종비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무슨 복을 입어야 하는가는 효종이 장자냐 서자냐 하는 문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자의대비는 소현세자비를 위해 복을 입지 않았고, <경제육전>에 장자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패한 데에는 왕권에 도전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인예송의 사건 전말을 조금 소상히 살펴보자.

“갑인년(1674) 2월에 인선왕대비(仁宣王大妃)를 성복하기 하루 전 날 예조 판서 조형(趙珩), 참판 김익경(金益炅), 참의 홍주국(洪柱國)이 아뢴다. ‘신 등이 어제 복제의 절목 중에서 인선왕대비의 시모인 대왕대비전께서 입으실 복을 기년으로 마련해서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가례복도(家禮服圖) 및 명나라의 제도에 자부(子婦)의 복에 큰며느리의 기년과 작은며느리의 대공(大功)의 차별이 있습니다. 기해년의 효종대왕 국상 때 대왕대비전께서 이미 작은아들 의복인 기년복을 입으셨습니다. 이를 보건대 지금의 이 복제는 대공이라는 것이 의심이 없거늘 급한 사이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고 이와 같이 경솔하게 기년으로 정하는 그릇된 실수가 있었으니 황공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고, 절목 중에 대공으로 고쳐서 표지를 붙여 드렸다.”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기는 했지만 현실을 고려하여 선택한 것이지, 결코 효종이 차자여서 기년복을 입은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 왕가의 견해였다. 그런데 서인측 신료들은 효종비를 위해 자의대비가 입을 복을 정하면서 대공복으로 하자고 하면서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은 점을 든다. 이는 자의대비가 기년복을 입은 것이 효종이 차자였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스스로 밝힌 셈이다.

“7월 6일에 대구(大丘)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소를 올렸다. ‘대왕대비께서 인선(仁宣)을 위하여 입으실 복을 기년으로써 정했는데 나중에 다시 대공으로 고쳤는데 이는 어떤 전례에 의거한 것입니까? 장자와 장부(長婦)의 복이 모두 기년이라는 제도는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실려 있습니다. 기해년의 국상 때에 대왕대비께서 효종대왕을 위하여 입으신 기년복 제도를 이미 장자 기년(長子朞年)이라는 국가의 제도로써 거행하였는데, 이제 국가의 제도가 아닌 대공이라는 복제가 갑자기 나왔으니 기해년에는 효종을 장자 복으로 기년을 입고 이번의 효종 비에 대해서는 작은며느리 복을 대공으로 입는 일이 어찌 그 전후가 각각 다릅니까?’ 했다.”

‘장자 기년’은 기해복제에 대한 왕가의 입장이자 당시 기년복을 관철시킨 서인의 명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효종비를 위해서는 대공을 입는다니 그렇다면 효종은 차자라는 말인가? 하고 도신징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도신징이 소를 올린 지 13일 만에 현종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고 소를 내어 보이면서 말했다. ‘기해년의 복제는 대개 시왕(時王)의 제도를 쓴 것인데 이번 9월의 복제가 기해년과 닮고 같은 여부를 아울러 캐내게 하되 원임 대신과 육경 판윤ㆍ정부 동서벽ㆍ삼사 장관을 곧 불러서 회의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현종은 도신징이 소에서 밝힌 것처럼 기해년의 상례가 ‘장자 기년’에 근거한 것이 틀림없으므로 자의대비가 효종비를 위해 대공복을 입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판단하고 이를 다시 상의하도록 하명했다. 여기서 현종의 의사가 무엇인지 이미 명확해진다.

“영의정 김수흥, 판중추부사 김수항,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형조 판서 이은상, 판윤 김우형(金宇亨), 예조 판서 조형,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耈), 참의 이규령(李奎齡), 부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 등이 빈청에 모인 후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 등이 기해년의 대왕대비 복제를 의논하여 정할 때에 전후 문서를 상고하여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예조의 아룀으로 인해서 대신들이 수의하여 시왕(時王)의 제도로써 시행했습니다. 경자년에 허목이 소를 올려 3년 제도를 행하자고 청하므로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여 《실록》을 가지고 상고해 보았습니다. ……”

“신 등이 이제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보니, <대전(大典)>의 복제조(服制條)에는 다만 ‘아들 복은 기년이다.’고만 썼을 뿐이요 따로 장자와 중자(衆子)의 구별이 없습니다. 기해년 국상을 처음 의논하여 정할 때에도 대신과 유신들이 헌의한 중에는 역시 시왕의 제도라고만 일컬었지 장자와 중자를 논변한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3년의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비로소 장자와 차장자(次長子)의 설이 생겨서 논의가 분분하니 여러 번 수의하여 마침내 기년복으로 정해서 시행했던 것입니다.”

“최후에 여러 신하가 헌의한 중에 비록 3년 제도라는 말은 했으나 장(長)과 중(衆)의 한 조목은 모두 들어서 의논하지 않았으니 이는 장자를 위해서는 참최복을 입고 중자에게는 기년을 입는 것은 즉 고례(古禮)요 장과 중을 분별하지 않고 모두 기년을 입는 것은 이것이 국가의 제도인 것입니다. 당초에 비록 국가의 제도를 쓰기로 정하였으나 그 후에 고례를 주장하는 여러 신하들이 다투었기 때문에 기년의 제도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3년을 행하지 않고 기년을 행한 것은 고례의 중자복을 입는 제도에서 나왔다.’ 하였고 이번 복제를 개정하는 날에 예조에서 상고해 올린 것도 역시 여기에서 나온 것이며, 그 밖에는 다른 상고할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신들의 답변은 교묘하다. 애초 서인측이 주장한 기년복은 <대전>에 있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는 제도에 근거했다. 후에 남인측이 고례에 근거를 두고 장자를 위해서는 삼년복을, 중자를 위해서는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며 삼년복을 주장했다. 결국 기년복으로 낙착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남인측 인사들이 효종을 중자로 봤기 때문에 기년복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서인측은 당초의 국가의 제도를 따라 장자와 중자의 구분을 두지 않고 기년복을 주장했다는 말이다.

그러면 효종비를 위해서는 자의대비가 대공복을 입어야 하는가, 기년복을 입어야 하는가 했을 때, 서인측은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었기 때문에 대공복을 입자는 것이지 효종이 장자니 중자니 구분을 둔 것은 아니라는 변명이다.

말이 참 교묘하다. 현종이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임금이 다시 전교하기를, ‘아뢴 말이 분명치 못하여 대왕대비전께서 마땅히 기년을 입어야 할 것인지, 대공(大功)을 입어야 할 것인지 한 가지로 결정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이냐.’ 하였다.”

현종이 ‘말이 분명하지 않다’고 비답을 내렸다. 상의할 여지를 둔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이 생각과는 다르므로 이렇게 말한다.

“임금(현종)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오늘 대신 이하로 하여금 회의를 하게 한 것은 기해년 복제에 관하여 수의할 때에 결정한 문자를 상고해서 오늘 대왕대비가 입을 복을 마땅히 기년으로 할 것인지 대공으로 할 것인지의 두 조목에서 정할 따름이었는데 종이에 가득히 쓰인 것이 다만 기해년 <등록(謄錄)>에서 상고해 낸 말뿐으로서 이 밖에는 달리 상고할 일이 없다는 말로 결론을 맺었으니, 등록을 고출하는 일이라면 한 해방 승지의 직책이라 어찌 대신과 육경과 삼사들로 하여금 와서 모이게 했겠는가.”

현종의 불만이 드러난다. 대공복인지 기년복인지 분명하게 말하면 될 것을 왜 빙빙 돌리느냐는 것이다. 하긴 대신들의 처사도 이해가 간다. 현종이 기년복을 원하는 것을 모를 리 없으나, 애초 서인측 대신들이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 것은 효종이 차자라는 의리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지금 효종비를 위해 자의대비가 기년복을 입는다면 자신들이 기해예송에서 내세운 의리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연유로 말을 돌리며 상황을 관망한 것이다.

“나(현종)는 기해년 복제를 국가의 제도를 쓴 것으로 보는데 여러 신하들은 고례를 쓴 것이라고 대답하는 자가 많구나. 기해년 복제를 의논하여 정할 때 대신과 유신들이 모두 국가의 제도라고 주장을 했는데, 경자년 이후에 비로소 삼년이란 의논이 나왔으니 말이 심히 번거로웠으나 모두 피차의 의견을 진술한 것이지 국가에서 정한 제도에는 상관이 없으므로 당시의 <수의등록(收議謄錄>》과 <승정원일기>를 상고하여 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제 현종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힌다.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해 기년복을 입은 것은 ‘장자 기년’이다. 기년복을 입기는 했지만 효종은 엄연히 장자다.

현종이 자신의 심사를 총정리한다.

“이제 빈청에서 상고해 낸 것을 보면 그때 시왕의 제도를 쓴 것이 심히 분명한데 아뢴 말의 결론에 쓰기를, ‘비록 국가의 제도대로 하여 장자에 대한 기년복을 썼으나 중외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중자(衆子)의 복으로 기년을 입는 고례를 썼다 하므로 예관이 상고하여 아뢴 것도 역시 이에서 나온 말이다.’ 하였다.”

“이는 국가에서 한 일은 가볍게 여기고 신하들이 다투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 예조에서 상고하여 아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니 이 무슨 도리이며 대공이 옳다고 하는 자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가.”

“기해년 복제는 이미 시왕의 제도를 썼고 장(長)과 중(衆)의 구별이 있지 않았던 것인데 기해년에 있지 않았던 예가 오늘에 와서 비로소 나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일찍이 대왕대비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내인 강(姜)씨에게 장부(長婦)의 복을 입지 않았으니 장부에 대한 기년복은 돌아갈 데가 없다는 말인가? 장과 중의 설은 기해년의 복제를 의논할 때에는 없었던 것인데 삼년의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소장에 비로소 이 의논이 있었으나 국가에서 이것을 채용하지 않았거늘 이제 와서 예를 의논하는데 어찌 감히 중서(衆庶)의 말로써 공공연하게 떠들어대는가.”

“복제를 비록 국가의 제도대로 하였으나 장과 중의 구별은 국가의 제도에 이미 증거가 없으니 이는 국가 제도의 미비한 바라 어찌 고례를 참고로 하지 않는단 말인가. 회의한 지 이틀이 되었는데도 아뢰는 바가 이와 같으니 내 심히 타당치 않게 여기며 어제 불러 보았을 때 역시 대공은 온당치 않다는 뜻을 나타내었는데 기어코 대공의 복제를 고수하려 하는 자는 또한 무슨 뜻이며, 또한 무엇이 마음에 유쾌하단 말인가.’ 하였다.”

현종이 서인측 인사에 대한 매서운 탄핵을 시작한다.

예송으로 얼룩진 현종 재위는 현종이 죽은 뒤에 찬수된 <현종실록>도 반영된다. <현종실록>은 숙종 1년(1675)에 편찬에 들어갔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숙종의 독촉을 받고 1677년에 겨우 완성되었다. 이 <현종실록> 편찬에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 득세한 남인측이 많이 참여했으므로 서인측은 불만이 많았다.

1680년 경신대출척을 계기로 서인이 다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뒤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였다. 1683년에 28권의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 완성되었다.

조선시대의 수정 실록(修正實錄)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고, 개수실록은 이 <현종실록>이다. 이 모두 당쟁의 결과 부득이 개수 또는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의 성격과 당시의 당쟁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현종(顯宗)>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