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총, 역사의 진실은?

심총, 역사의 진실은?.

 

총(沈棇)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실록>에 실린 심총 기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총이 전라도에도 대동법 실시를 상소한 일이다.

심총은 효종 4년(1653) 11월에 정언으로 발탁되었다가 그해 12월에는 장령이 된다. 효종 5년(1654년) 5월에 심총이 상소를 올려, 양호(兩湖)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사대부의 자제로서 부역이 없는 사람은 해마다 베 1필씩을 징수할 것을 청했다.

소가 올라오자 효종은 비국의 여러 대신들과 의견을 나눈다. 영의정 정태화는 심총이 올린 상소 중 양호(兩湖)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자는 말은 비록 균역(均役)의 뜻에서 나왔지만 만일 형세가 곤란하다면 애당초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의견을 올린다. 좌의정 김육은 “신이 호서(湖西)의 대동법 때문에 많은 훼방이 몸에 집중되었으므로 감히 말참견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소견으로는 여러 도에 균일하게 시행하는 것이 사체상 대단히 좋을 성싶습니다.”라고 한다.

한편 대사간 이행진은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라.’고 하였으니 지금 난리를 겪은 백성들을 가지고서는 새로운 법을 창립하는 것이 부당합니다. 그런데 심총이 도리어 감히 세상에 아부하여 스스로 재능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됨이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총명한 척 행동하기를 좋아하니, 체차하소서.” 하자 김육이 아뢰기를, “이행진이 이른바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총명한 척 행동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바로 신을 지적한 것입니다. 심총 자신이 간관의 지위에 있으면서 다만 생각한 바를 개진하였을 뿐인데 체차를 청함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와 같고서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로부터 마땅히 물러나겠습니다.” 했다. 이행진은 대신이 불안해 한다는 이유로 인혐하고서 물러났다.

하나는 심총이 관물을 남용했다는 고소다. 효종 6년(1655년) 12월조 사관의 기록이다.

“처음에 광주 부윤(廣州府尹) 심총(沈棇)이 관미(官米) 1천 8백 석을 남용했는데,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심총이 체포되어 청나라 사신을 역참에서 대접하는 비용으로 썼다고 대답하는 한편 또 계원을 무함하였다. 상이 심총의 말을 곧이듣지 않고 금부에 조사할 것을 명하니 금부가 그의 법을 지키지 아니한 상황을 조사해내어 아뢰자, 하교하였다. ‘간교한 관원의 교활한 수단이 이와 같이 낭자하니, 엄하게 국문하여 밝히라.’ 했다.”

현종 2년 11월조 사관의 기록은 이렇다. “금부가 장리(贓吏) 심총을 석방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처음에 심총이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으면서 불법으로 재물을 탐한 사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자 감사 조계원(趙啓遠)이 조사하여 치계하였다. 이에 심총이 몇 년 동안 갇혀 있다가 변읍(邊邑)에 유배되었는데 그 뒤에는 중도(中道)로 옮겨졌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원자(元子)가 탄생한 경사를 맞이하여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오니, 물정이 불쾌하게 여겼다.”

<실록>의 기록을 보자면 심총이 장리임이 거의 확실하다.
<연려실기술>은 <실록>과 대비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적시한다.

심총이 광주 부윤에 어떻게 임명되었던가? “갑오년(1654) 5월에 대신이 심총의 뛰어난 재주는 장수의 직분을 맡길 만하니, 우선 한번 맡겨 보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발탁하여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임명하였다.”

대신이 심총을 두고 장수의 재주가 있다는 말은 병자호란에서 보인 그의 무용담과 관련이 있다.

“지난번 병자호란 때 심총이 자여 찰방으로서 감사 심연의 군사를 따라 여주에 이르렀다. 심연이 쌍령에서 패전하여 여러 도의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려 했다.”

“심총이 말하기를, ‘인근 여러 진이 한꺼번에 무너지고 남한산성이 한 시각에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었으니 지금이 바로 신하가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원컨대 남은 군사를 인솔하여 오랑캐 군사에게 달려가게 해 주시오.’ 했으나 심연이 허락하지 않았다. 심총이 울면서 6일이나 청하자 비로소 군사 수백 명을 주었다. 심총이 따로 모집했던 군사 백여 명과 아울러 남한산성을 향하여 전진해서 누차 접전하여 적을 섬멸하고 포로가 된 수천 명을 탈환하고서 납서로 급히 임금에게 아뢰었다. 심연이 여러 번 돌아오라고 재촉하였으나, 심총이 장수와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지금 장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그러나 우리들이 만약 전사한다면 누구에게 죄를 줄 것인가. 죽지 않는다면 반드시 공을 이룰 것이니, 또 어떻게 죄를 주겠는가.’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든 살든 오직 공만 따르겠습니다.’ 했다. 강화하였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심총은 의병과 함께 통곡하고 헤어졌다.”

“인조가 가상히 여겨 불러서 공로를 칭찬하고 벼슬을 높여 주었으며 조정에서는 그를 중용하기를 의논하여 여러 차례 큰 진영의 장수로 천거하였으나, 세력 있는 재상 한 사람이 심총의 글재주를 아깝게 여겨 과거를 보아 출세시키려고 극력 막았다.”

심총이 애국충정이 남다르고 장수의 기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간원으로 있다가 광주 부윤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심총이 관미를 남용했다니 무슨 말인가? 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까? <연려실기술>의 변호를 들어보자.

“신묘년 겨울에 경산 현령으로서 문과에 올라 병랑과 장령을 역임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전적으로 광주 부윤에 발탁되었다. 그때 변방의 보고가 불안스러웠으므로 임금이 그에게 밀지를 내려서 ‘군사 준비를 조석으로 변란을 기다리는 것같이 하라.’ 하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수비할 준비를 하였다. 군량이 전부터 축난 것이 수만 석인데 조정에 있는 사람들 중에도 군량을 갖다 먹고 갚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심총이 모두 징수를 독촉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조계원이 경기 감사가 되자 심총이 관직을 버리고 돌아갔다. 수어사 임금에게 아뢰어 다시 임용시켰으나 조계원이 또 아뢰어 파면되었다. 마침 신의화가 심계원에게 말하기를, ‘심총이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어 항상 남에게 말한다.’ 하였으므로, 심계원이 노하여 새로 부임한 광주 부윤 정지화를 시켜 심총을 탄핵하게 하였으나, 정지화가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조계원이 광주 서리를 체포하고 심총의 장죄(贓罪)를 조사하여 조정에 아뢰었다.”

“을미년 8월에 심총을 체포하여 가두었다. 의금부 당상관 허적이 조사를 맡았는데 관물남용죄(官物濫用罪)를 적용시켰다. 이때는 임금이 한창 장죄를 엄히 다스리던 때였는데 판의금부사 원두표가 극력으로 구원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사간 조한영이 심총의 죄를 탄핵하자 임금이 이를 믿었다. 그 후 심총의 억울함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총의 세 아들이 그 원통한 사정을 써서 호소하였으나, 여러 재상과 신하들이 모두 임금의 진노가 한창 대단하다고 하며 내쫓았다.”

“정축년에 심총의 부하 황사성과 이득배 등이 소를 올려 그의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임금이 살펴보지 않았으며, 장남 약하가 세 번이나 징을 치고 호소하므로 의금부에서 다시 조사하기를 누차 청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이에 허적이 후회하고 일찍이 경연에서의 자기의 조사가 잘못되었음을 아뢰었더니 임금이 노한 안색으로 이르기를 ‘경은 말하지 말라. 그는 정지화를 은인이라 한다니 나는 어떤 사람이라 하겠는가.’ 하니, 허적이 두려워하며 물러나오게 되었으니 이는 아마 심총에 대한 어떤 유언비어가 임금에게 전하여졌기 때문이었다.”

“정유년 여름에 심한 가뭄이 들자 영의정 정태화가 임금에게 아뢰어 심총이 옥에서 나와 웅천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가 옥문을 나오자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으므로 신민들이 모두 말하기를, ‘심 영감이 석방되었으니 하늘이 어찌 모르리오.’ 하였다. 무술년 9월에 참작하여 청도(淸道)로 옮기게 하였다.”

“기해년에 경연에서 임금의 말이 심총의 일에 미치자, 홍명하가 ‘심총과 조계원은 서로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계원의 말을 공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수어사 이시방이 ‘국고의 곡식은 한 되도 쓰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송시열이 아뢰기를 ‘심총은 비록 죄가 있지만 병자년의 난을 구한 충의는 자랑할 만하오니, 마땅히 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였으나, 조한영은 ‘공과 죄는 상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신축년 여름에 가뭄이 들자 참작하여 충주로 옮겼다가 10월에 용서받고 돌아왔다. 경연에 있는 신하가 죄를 얽어서 다시 귀양 갔다가 임인년 봄에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왔다.”

<연려실기술>의 변호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늘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것처럼 심총이 강직한 성품 때문에 모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심총의 <행장> 한 대목이다.

“심총의 자는 자첨(子瞻)이요, 호는 무기자(戊己子)라 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장래가 기대되었다. 기억력이 뛰어나 한 번 보면 외고 산천의 길에 대한 거리와 과세액, 군사와 백성의 수효 등 두루 외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처음 광주 부윤에 임명되자 특별한 은혜에 감격하여 정성껏 보답하고자 하여 부족한 군량을 독촉하고 징수하는 동시에 도망가고 죽은 군사를 보충하였으며, 기구를 수리하고 정비하여 시설한 것이 매우 많았다. 청탁하는 이가 있어도 일체 들어주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원망을 들을 각오로 자못 위엄과 형벌을 썼으므로 원망하는 비방이 많이 일어나더니 마침내 화를 입었다. 사람들이 매우 애석히 여겼다.”

심총은 병으로 62세로 죽었는데, 그가 지은 절명시가 이렇다.

평생에 스스로 기특한 남아로 자처하였으나 / 平生自許奇男子
늙어지니 마침내 비루한 장부가 되었구나 / 投老終成陋丈夫
깊은 수치를 씻지 못한 채 헛되이 땅 속에 묻히니 / 未雪深羞空入地
응당 원통한 기운이 하늘 가운데에 뻗치리라 / 寃氣應射半天墟

심총은 장리(贓吏, 탐관오리)인가, 기남자(奇男子, 기특한 남자)인가? 역사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역사의 진실과 왜곡은 비단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현대에도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