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이경석1

송시열과 이경석1.

 

시열(宋時烈, 1607-1689)과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은 모진 인연이다. 당대를 대표하는 명유요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은 이들이지만 종국에는 각자 용납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이경석은 송시열보다 12살 연장으로 왕실의 종친이다.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德泉君)의 6대손이며 부친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한 이유간(李惟侃)이다. 어려서부터 형 이경직에게 학문을 익혔고 김장생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이경석이 먼저 환로에 나가 영달하고서 포의였던 송시열을 유학으로 우대했다. 이는 그가 김장생 문하의 동문이라는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경석은 19세(1613, 광해군 5년) 진사시에 23세(1617)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북인이 주도하는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다 취소되었다. 당시 과거에 합격하는 평균 연령에 비해 상당히 젊은 나이에 문과 급제를 했다. 29세(1623)때, 인조반정 후 알성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들어갔다.

30세(1624)때에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였고, 33세(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활약했다. 예문관 검열·봉교 등으로 진출하여 핵심 관직을 두루 거쳤다. 38세(1632) 가선대부에 올라 재신(宰臣)에 들었다.

42세(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주화파(主和波) 대신들을 배격하는 상황에서 도승지를 맡아 국왕을 섬겼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굴복하여 전쟁이 끝나자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승전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썼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이었지만 이일로 글을 배운 것을 한탄하였다. 삼전도비 작성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로 이경석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43세(1637) 예문관과 홍문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이조판서를 거쳐 47세(1641) 이사(貳師)가 되어 청나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이때 평안도에 명나라의 배가 왕래한 전말을 사실대로 밝히라는 청제(淸帝)의 명령을 어겼다 하여 청나라에 의해 등용이 금지되었다. 그뒤, 50세(1644)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좌의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56세(1650, 효종 1년)때, 김자점의 밀고로 조선의 반청정책(북벌정책)이 알려져 청나라에서 파견된 조사관이 국왕과 백관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모든 일은 영의정의 책임이라고 자임하고 나섰다. 효종이 청나라 조사관에게 간청하여 처형은 면했으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감금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59세(1653) 이후 중추부영사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74세(1668, 현종 9년)때, 특별한 존경과 신임의 표시인 궤장(几杖)을 현종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이경석은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노론의 영수 송시열 등에 의해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받았다. 그는 조선의 난국을 극복한 탁월한 재상이었으며 일생동안 검소하고 소박한 청백리의 삶을 살았다. 그의 이념과 정책은 숙종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연려실기술>에 송시열과 이경석이 틀어진 사건을 기록한다.

“기유년(1669, 현종 10년) 3월, 임금이 온천에 행차하였을 때에, 영부사 이경석이 차자(짧은 상소문)를 행재(行在)에 올려 빨리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차자에서 말하길, ‘신이 깊이 염려한 것은 평소에 조정에서 걸핏하면 신을 들메고[納覆] 가는 것이 서로 연달았지만, 오늘의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안하는 이가 있다는 기별은 들을 수 없는 일입니다. 대체로 그런 사실이 있었는데도 신이 듣지 못한 것인지요? 전하께서 병환으로 멀리 임시 처소에 가 계시니 사고가 있다든가 늙고 병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이나 의리로 보아서 이럴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라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니 신이 매우 걱정하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옛말에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지금 그와 근사한 것인지요. 이 점이 전하께서 조심하고 염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현종이 요양을 위해 온천에 왔는데 그에게 문안하지 않는 신하가 있다. 혹시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어서 찾아뵙지는 않은지 의심스럽다. 이경석은 그 신하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때 판부사 송시열이 마침 혐의되는 일이 있어서 감히 행재소에 나아가 뵈지 못하고, 다만 전의(全義)에 나가서 머물러 있다가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 곧 차자를 올려서 대죄하였다.”

이경석이 직접 인물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당시 송시열이 전의에 있다가 현종을 찾아뵙지 않은 바가 있어 차자를 올리고 대죄하였다. 현종조에 송시열은 산림의 영수로 사림의 중망을 받아 국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니 이경석이 ‘자기가 잘난 척하는 기색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거절한다.’는 말에 혐의를 두었을 것이다.

“송시열이 올린 상소 말미에 ‘삼가 생각하건대 옛날 손종신(孫從臣)같이 오래 살고 편안하여[壽而康] 크게 한 세상의 존중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하였다고 일컬음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너무도 용렬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어서 처신하는 것이 보잘것없었으므로 도리어 손종신 같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들이 얼마나 낮춰 보고 비웃었겠습니까. 지금 신의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와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송시열이 자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요, 나를 비난한 사람은 손종신이다. 손종신은 손적(孫覿, 1081-1169)을 일컫는다. 손적은 송나라 휘종 대관 3년 진사에 올라 한림학사가 되었는데 정강의 변으로 흠종이 금나라에 항복하는 표를 작성했던 인물이다. 오래 살고 편안하여 크게 한 세상의 존중을 받았지만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키지 못한 손종신은 누구인가? 바로 이경석이다. 송시열은 삼전도비문을 지은 이경석을 손적에 비유하여 경멸의 심사를 보여주었다.

앞서 1637년(인조 15년) 11월에 청나라가 (인조가 항복한) 삼전도에 ‘청태종 승첩비’를 세우라는 칙서를 보내 조선을 핍박하였다. 다급해진 인조는 글 잘 짓는 신하들을 불러 비문 쓰라고 청했다. 그러나 누가 기꺼이 나서겠는가? 병을 핑계대거나 일부러 거친 글로 피해 나갔다.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 등 두 사람의 글을 택해 청나라로 보냈다. 청나라는 ‘황제의 공덕을 더 서술하는’ 조건으로 이경석의 글을 낙점했다. 인조는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좀 고쳐 쓰라고 이경석을 다독거렸다. 이로써 삼전도비문이 완성됐다.

1668년(현종 9년) 송시열이 현종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은 이경석에게 “공(이경석)은 ‘수이강(壽而康: 오래 살고 편안히 지냄)’했다”는 축하글을 전했다. 당시는 아무도 몰랐지만 ‘수이강’, 이 세 단어는 가시를 품고 있었다. 송시열이 자신을 변호한 차자에 적은 것처럼 금나라에 멸망당한 뒤 과도한 내용의 항복문서를 지어 바친 북송의 손적이 ‘오래 편히 살았다[壽而康]’는 비아냥을 들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에 이경석이 차자를 올렸다.

“신이 망령되이 올린 차자를 가지고 송시열이 자기를 논란하고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입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송시열과는 전부터 보통 사이가 아니라고 지목을 받았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였고, 차자의 사연이 명백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습니다. 신이 차자 중에서 말한 ‘사고가 있거나, 늙고 병들고 멀리 떨어져 있는 자가 아니면 신의 직분과 의리로서 이렇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정말 송 판부사를 지목 배척한 말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그가 슬픔을 당하고 또 병환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니 혹시 곧 달려가 뵈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였고, 또 어떻게 그가 끝내 오지 않을 것으로 단정하고, 먼저 가서 배척하였겠습니까. 설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떻게 차마 전일에 서로 좋아하던 정의를 배반하고서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이야말로 불행이 심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경석의 차자는 자신이 송시열을 지적하지 않았다는 변론한다. 이 차자를 쓸 무렵에는 손종신이 자신을 지적한 내용인지를 숙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 차자에서 이경석은 송시열을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차자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취지의 변론에 멈추었다.

그런데 후에 송시열이 손종신을 거론한 바가 이경석 자신을 지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격노하게 된다. 훗날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그의 제자들과 당론에 대해 문답한 것을 제자 한홍조가 기록한 <강상문답>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옛날 백헌 정승(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었는데 그 비문에 말한 것은 실로 사람들의 마음에 부끄럽게 여길 만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또 경인년에 한 일의 한 가지가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당시에 청음(김상헌) 등 여러 어진 이들이 모두 그와 더불어 벗하고 잘 지냈다. 그런데 이때 우암의 상소 끝에, ‘손종신……’이라고 한 것이 있었는데, 백헌 정승은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의미의 말인지를 몰랐다가 나중에 허적이 그것은 이경석이 〈삼전도 비문〉을 지은 것을 옛날 손적의 사실에 비유한 것임을 알고서 백헌 정승에게 일러 주니 백헌 정승이 크게 노하여 이 우암의 소를 동춘(송준길)에게 보였다. 동춘이 놀랍고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하였다.’ 하였다.”

이제 송시열과 이경석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또 숙종조에 지은 <현종실록> 9년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교리 이규령(李奎齡)이 이경석을 위하여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거행하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옛 사례를 물으니 규령이 이원익(李元翼)에게 궤장을 하사하고 김상헌(金尙憲)에게 견여(肩輿)를 하사한 일로써 대답하였다.”

“임금이 또 대신에게 물으니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자기 나름대로 옛날 일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곤란하나 성인도 때에 따라 변통하여 바꾸었습니다. 옥당의 관원이 선대의 고사를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경석에 대한 전하의 관계가 원익에 대한 인조의 관계나 상헌에 대한 효종의 관계와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 헤아려서 처리하시는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했다.”

“임금이 이에 궤장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원익, 김상헌 양공은 모두 원로 숙덕(宿德)으로서 조야가 중히 여겼고 양 조정에서 예우함이 특별하여 이같이 남다른 은전이 있었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이경석이 이 같은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여겨 이와 같이 대답한 것이다.”

“이경석이 대궐에 나아가 사은하는 전(箋)을 올리고 또 그 일을 그림으로 그려 송시열에게 글을 구하자 송시열이 송나라 손적(孫覿)이 오래 살며 강건했던 일을 인용하여 히롱하니 식자들은 그르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경석이 여러 해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나 볼 만한 사업이 없는데다 일컬을 만한 건의도 없어 단지 대신의 숫자만 채웠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더라도 조정에서 남다른 예로서 대우하고 궤장을 하사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치다. 송시열이 임금 앞에서 대답한 말을 보면 이경석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의 뜻이 이와 같다면 임금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어야 할 것인데 단지 이원익과 김상헌의 일로 말뜻을 모호하게 하여 대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곧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더구나 이경석은 세상에서 드문 은전을 입고 송시열의 말 한 마디를 얻고자 하여 글을 구하였으니 송시열은 참으로 이경석을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면 그 구함에 응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그 기록한 글 가운데다 심지어 손적의 일을 인용하면서 그 성명은 쓰지 않고 단지 ‘오래 살며 강건했다[壽而康]’는 서너 자를 써서 기롱 폄하함으로써 이경석이 깨닫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어찌 정인 길사(正人吉士)의 마음 씀이겠는가.”

<현종실록>에서 사관은 이경석을 높이지 않으면서 송시열의 처신이 좋지 않았다고 평한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정감의 건의로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고 개수에 착수한다. 3년 전에 편찬된 <현종실록>이 왕의 독촉으로 불과 서너 달 만에 급급히 편찬되어 기사에 착란과 소략한 부분이 많고 또 남인 주도로 편찬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개수현종실록>이 세상에 나온 이유다. 앞서 인용한 사관의 기록도 서인의 눈에는 거슬리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삼전도비의 굴욕사(2014.11.04.)
<두산백과: 이경석(李景奭)>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