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징, 어머니 회갑 잔치로 몰락하다

김징, 어머니 회갑 잔치로 몰락하다 .

 

선시대는 효를 가장 중시한 사회다. 그런데 지나친 효도가 문제가 된 사건이 있다. 김징이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해서 귀양을 갔다.

현종11년 2월에 사간 이단석과 헌납 김석주가 모친의 회갑 잔치를 성대하게 한 김징을 논죄하였다.

“작년 가을에 전라 감사 김징이 그의 모친을 위해 회갑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 도의 재력을 고갈시켜 풍성하게 준비했고 두루 영남의 수령들에게까지 구걸하였으니 지위를 빙자하여 탐욕을 부린 짓을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잔치하는 날의 행사가 지극히 사치스러웠는데 또한 도내 수십 명의 수령들로 하여금 주렴을 향해 뜰에서 절하게 하였으니 관리들에게 치욕을 심하게 준 것입니다. 이처럼 흉년으로 재정이 고갈된 때를 만나 진상하는 풍정(豊呈)도 없앤 터에 지방 장관이 감히 방종하고 탐욕을 부려 무엄한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어버이 때문에 오명을 받았던 일과는 달라 조정에서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은전을 크게 저버린 것입니다. 그의 죄는 실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두 번째 아뢰니, 현종이 따랐다.

그해 3월에 좌참찬 송준길이 들어왔는데, 임금이 양심합에서 인견하였다. 송준길이 임금의 안부를 묻고 이어서 김징을 신구했다.

“신이 사는 곳이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어 그 곳의 여론을 모두 들어 알고 있는데, 김징의 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이 듣는 풍문은 으레 대부분 사실과 다른데, 이번 대간의 계사는 사실이 8, 9할이나 틀린 것입니다. 자고로 어미를 위해 수연을 베푼 일을 장률(贓律)로 처리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 같은 처리는 실로 효도에 손상되므로 식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김징이 베푼 잔치는 원두표, 이경여, 이태연 등에게 비교할 것 같으면 훨씬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로써 죄를 받게 되었으므로 마음이 공평한 자는 모두 한심하게 여깁니다. 지금의 의논하는 자들이 야박하니 지금 만약 상께서 먼저 마음을 결정하시기를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이 어째서 장죄가 되는가?’ 하신다면, 경박한 의논들이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매우 시끄러운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지 않았다.”

김징(金澄, 1623-1676)은 아버지가 공조정랑 김극형이다. 어릴 때 이식에게 글을 배웠고 그 뒤 송준길의 문인이 되었다. 김징이 모친의 수연을 베푼 것으로 탄핵을 받았을 때 송준길이 적극적으로 변론한 데에는 사제의 정분이 있었다.

28세(1650, 효종 1년)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30세(165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 주서,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하면서 과감하게 언론을 행사하여 높은 관리들에게 미움을 받아 어천찰방으로 전임되었다. 34세(1656)때 홍관(虹貫)의 변으로 만언의 봉사책(封事策)을 상소하였고, 관서지방의 적폐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38세(1660, 현종 1년)때 강진현감으로 재직할 때에는 향리를 단속하고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 데 힘썼으며, 1661년 병조에서 황해도사, 1666년 정언·장령(掌令)·헌납(獻納) 등 언관을 다시 역임하였다. 45세(1667)때 정월 헌납에 있으면서 장령 신명규 등 여섯 명과 함께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의 죄를 논핵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벽동에 유배되었다.

46세(1668)때 직강(直講)이 되고, 시강원문학, 사간·동부승지를 거쳐 48세(1670)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베풀면서 수령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는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배천에 유배되었다. 그뒤 50세(1672)때 유배에서 풀려나 강음(江陰)·광주(廣州) 등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김징이 대각에 있을 적에 과감하게 언론을 행사했다는 일화다. <인계록(因繼錄)>에 실려 있다.

“김징이 대각에 오래 있었는데 홍중보(洪重普, 1612-1671)는 정승이 되기 전에 여러 번 김징의 탄핵을 받았었다. 송준길이 이들을 조정하려고 두 사람을 청했다. 김징이 홍중보에게 말하기를, ‘공이 벗을 취하는 데 나 같은 자를 몇 사람 추린다면 공은 완벽한 사람이 될 것이로다.’ 하니, 공이 크게 웃으면서, ‘그대가 나를 옥처럼 만들어 줌이 많으니 진실로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로다. 그러나 속담에 말하기를, 비록 좋은 노래라도 늘 부르면 듣기 싫다 하니, 그대가 나를 탄핵하는 것도 역시 그만하고 끝낼 일이로다.’ 하니, 김징도 크게 웃었다.”

김징의 언론이 확실히 준엄한 바가 있다는 느낌을 준다. 홍중보가 말하듯 좋은 노래라도 늘 부르면 듣기 싫다 한 말은 인지상정이다. 김징이 모친을 위한 회갑 잔치가 빌미가 되어 탄핵을 받은 데에는 필시 김징의 준엄한 언론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연려실기술>에 실린 내용이다.

“김징이 일찍이 대각에 있으면서 부정한 일을 들추어 낼 때 권세 있고 귀한 사람들도 사정보지 않았는데 전후에 50여 명이나 논핵하였다. 이에 감정을 품은 여러 사람이 이 연회 베푼 일을 기회로 보복을 취하려고 김징을 잡아서 국문하면서 그 연회에 쓴 음식과 돈 비단을 받은 일을 조사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작 조사한 장계를 보니 사치가 분수에 넘쳐서 큰 죄를 받을 만한 것은 없었지만 논하는 자들이 김징을 공격하여 익겸(益兼)이 “전의 조사는 잘못된 것이 많다.” 하면서 다시 조사하기를 청하는 한편 관리들을 잡아 가두고 온갖 방법으로 추궁 힐문하면서 한 푼의 은이나 한 자의 천을 가지고서도 죄목을 만들어서 장물죄로 처리하려 하였다.”

그중에는 일이 잘못되기는 했지만 효심이 발동한 일이니 그 모친이 생존한 바를 참작하여 특별히 감해 줄 것을 논한 이들이 많았다. 이경석의 변론이다.

“이경석이 김징이 어머니를 위하여 헌수하는 술자리를 베풀었으니 죄가 용서받을 만하다 하였는데, 형장으로 심문하라는 임금의 명이 내리자 다시 글을 올려서 말했다. ‘김징의 소행은 참으로 분수에 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전하께서 처음에 중죄로 다스리지 않은 것은 그의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당초에 사실을 바른대로 고하지 않고, 또 재차 심문할 때에는 말을 조심하지 않았으니 역시 심히 망령된 일입니다만 전하께서 넓으신 도량으로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그 죄를 감하여 주신다면 김징이 어찌 형벌을 받은 후에라야만 그 죄를 알겠습니까? 했다.”

<청야만집>에 지금 우리가 새겨들을 말이 실려 있다.

“김징이 전라 감사가 되었을 때에 함릉 이해(李澥, 김징은 해의 종손서)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이해가 말하기를 ‘너의 집이 사천에 있으면서 나무를 팔아 생계를 삼을 때 너의 모친이 지내던 형편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네가 지금 벼슬을 하여 전라 감영으로 모시고 가면 날마다 수연(壽宴)아닌 날이 없을 것이니, 아예 수연을 차릴 생각을 말라.’ 하면서 재삼 주의시켰었는데, 그 후에 김징이 그 말을 좇지 못하고 마침내 수연을 벌인 일로 실패하여 거의 죽을 뻔했으며, 그 후에 한평생을 불우하게 마쳤다. 최석정이 항상 이 사실을 들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함릉의 이 말은 뒷날의 일을 눈으로 직접 보고서 말한 것 같다. 예전 사람들은 비록 점치는 술법은 없어도 선견지명이 이 같음이 있었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은가.’ 했다.”

효심의 발로라 할지라도 지나치면 결국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준다.

김징이 어머니 수연 때문에 몰락하기는 했지만 효심의 발로였던 것을 하늘이 가상히 여겼을 터인가? 김징은 현달한(세상에 나아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여 자신의 이름을 드높인) 아들을 두었다. <숙종실록> 30년 12월조에 김징의 아들 김구의 졸기가 실려 있다.

“전 우의정 김구(金構)가 졸하였다. 김구는 관찰사 김징의 아들로 젊을 때부터 문한이 넉넉하고 민첩하였으며,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자질과 성품이 명철하고, 재지가 더욱 뛰어나 누차 바쁘고 번거로운 직임을 맡았으나 재결에 지체함이 없었으며, 임관(任官)이 직무에 적합함이 많았다. 또 말주변이 능숙하여 임금과 면대해 아뢸 때에는 간곡하고 자상하니 임금이 경청하였다. 상신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내간상(內艱喪)을 당해서는 상을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병세의 위독함을 듣고 심지어 중사(中使)를 보내어 육식을 권했으니, 융숭한 총권(寵眷)이 이와 같았다. 졸할 때 56세요 뒤에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