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이경석2

송시열과 이경석2.

 

경석을 송시열과 그 문하의 인사들이 비판한 명목은 삼전도 비문을 작성한 일이다. 인조의 간곡한 부탁에 의해 어쩔 수 없어서 작성했다고는 하지만 글을 보면 실상 결코 손발이 묶여서 어쩔 수 없이 쓴 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삼전도 비문 작성 후에 송시열이 이경석과 연분을 끊고 내왕하지 않는 것이 상황에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송시열이 이경석을 공격한 것은 다른 상황이 개입되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송시열이 이경석을 공격한 의도가 불순해질 수도 있다.

이경석의 손자인 이하성(李厦成)이 그 조부를 위하여 무함임을 변명하는 소를 숙종에게 올렸다. 먼저 이경석이 신도비를 작성하게 된 연유를 밝힌다.

“아아, 정축년의 일이야 무엇이라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 인조대왕께서 몸을 굽히고 욕을 참으신 것은 종묘사직을 위하고 만백성을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저들 청인이 의심하고 성냄이 점점 심했기 때문에 먼저 기회를 만들어 가지고 우리 편에서 어떻게 하는가를 보려고 비(碑)를 세우게 하고 비문을 지어 바치라는 독촉이 심하니 이것이 그해 12월이었습니다. 인조께서 처음에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장유(張維)ㆍ전 부사 조희일(趙希逸) 및 신의 조부에게 함께 의논하여 하룻밤 사이에 지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때 대제학은 결원이었으며 신의 조부가 마침 예문관 제학의 직위에 있었는데 소를 올려서 끝까지 사양하였지만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지어서 바쳤던 것입니다.”

“세 사람의 글을 청국으로 들여보냈더니 마침 명나라 학사로서 청국에 항복한 자가 있다가 글을 보고서 신풍의 글에서 인용한, ‘정백이 양을 이끌었다.’는 말은 원래가 제후들이 서로 침공하는 일을 말한 것으로서 이 비문에는 적당하지 않다고 하며, 또 신의 조부가 지은 것은 매우 소략하고 전혀 포장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청인들이 더욱 의심하고 노하여 고쳐 짓기를 독촉하였으며 으르렁거림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조정에서 걱정하고 무서워하여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때에 신풍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전하께서 신의 조부만을 불러다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입장을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의하여 판가름 나는 것이다.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신첩(臣妾) 노릇을 하다가도 끝내는 오나라를 멸하는 공을 이루었다. 후일에 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으며 오늘의 할 일은 다만 문자에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도록 하여 사세가 더욱 격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했다. 신의 조부가 생각하기를 임금의 욕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한 몸을 돌아볼 수 없다 하여 꾹 참고 명을 받들었습니다. 이것이 정축년에 신의 조부가 비문을 짓게 된 실상입니다.”

신도비를 작성한 일이 인조의 극진한 부탁에 의한 애국충정의 발로임을 변론했다.
이어서 그는 송시열과의 인연을 이렇게 적는다.

“신의 조부가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항상 산림에 숨어 있는 어진 선비를 끌어서 등용하는 데에 힘썼습니다. 송시열은 이때 전 참봉으로서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추천하여 좋은 벼슬을 시켰습니다. 그 후로 글을 올리거나 경연에 나오면 항상 송시열을 불러 올려 예로써 대우하시라는 뜻으로 아뢰었습니다. 효종대왕께서 왕위를 이으시고 신의 조부가 영상이 되었을 때도 송시열과 당시의 명사들을 등용하여 새 정치를 힘을 모아 돕도록 하였습니다. 송시열 역시 신의 조부를 주인으로 섬겨 서울에 들어오면 예고 없이 베옷과 짚신으로 신의 집을 찾았습니다. 신의 조부 역시 대등하게 대우하여 선비에게 자신을 낮추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그 후 신의 조부는 청국의 압력으로 벼슬에서 떠났기 때문에 조정에서 같이 일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두터운 정의는 오래도록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송시열이 사퇴한다는 말을 들으면 신의 조부는 곧 전하께 글을 올려서 만류하기를 청하였으며 반드시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서 조정에 머물러 있기를 권고하며 선대왕의 은혜를 갚기를 의리로써 책망하였습니다. 송시열이 명망과 지위가 높아진 다음에도 신의 조부에 대하여 공경하고 존중히 여겼음을 평소의 말이나 기색과 서신 속에서 언제나 찾아볼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주공 구역이란 말을 인용하여 칭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경석이 환로에 영달하여 고관대작에 있으면서 송시열을 후진으로 적극 추천하였다는 내용이다. 이경석이 송시열의 학문과 도덕을 높이 샀고 송시열 또한 이경석이 후진들에게 겸허하게 대하는 정성에 감복을 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그러면 언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는가? 이하성은 두 가지를 들고 있다.

“기해년에 상례를 의논할 때에 신의 조부는 시왕의 제도를 주장하고 송시열은 <의례>에 있는 네 가지의 설을 주장하여 비로소 의견이 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축년 여름에 억울한 죄인들을 심리할 때에 선정신 송준길이 윤선도의 위리안치를 너그럽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신의 조부가 아뢰기를, ‘봄 하늘의 우로는 초목의 아름답고 악함을 가리지 않는 것이니 위에서는 마땅히 유신(송준길)의 말을 들어서 죽을 나이가 다 된 사람을 먼 곳의 귀신이 되지 않게 하여야 한다.’고 하니 그렇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 송시열이 이 소식을 듣고서 분하게 여겼습니다.”

“또 그 아들을 보내어 혼인하기를 청하였으나 일이 성취되지 않으니 송시열은 그것이 신의 조부가 자기에게 불만이 있어서 그런 것인 줄 잘못 알고 편지에까지 그런 말을 나타내고 또한 편지를 친한 사람에게 보내어서 뚜렷이 유감과 원망의 뜻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조부는 송시열을 대접하기를 처음과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기해예송에서 윤선도를 풀어주는 것과 관련한 것이오, 하나는 사돈을 맺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 된 일이다. 송시열이 이경석과 사돈의 연을 맺고자 했다는 내용은 흥미롭다. 이 두 가지 일은 공적인 의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로 송시열이 이경석에게 감정을 갖게 되었다면 송시열의 처사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제 소는 본격적인 변론으로 접어든다. 과연 송시열이 이경석이 쓴 삼전도 비문만을 문제 삼아서 그렇게 한 것인지 말이다.

“무신년에 선대왕(현종)께서 신의 조부를 원로라고 하여 궤장을 내려 주실 때에 신의 조부가 전하의 은혜를 빛내게 하는 글을 당대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요청하였는데 송시열에게도 청했습니다. 송시열이 사양하지 않고 지었습니다. 거기에는 ‘공이 조정에 있어서의 모든 것은 임금의 교서 중에서 모두 말하였지만 경인년 2월의 일만은 은미하게 하여 드러내지 않으셨다. 이때는 나라의 존망이 당장에 결정지어지게 되었지만 이해 판단이 빠른 자들이 팔짱을 끼고 물러서서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 듯했다. 오직 공이 홀로 사생을 돌보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동요하지도 않아 청인들과 담판하여 국가가 결국 무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임금의 알아주심이 더욱 융숭하고 선비들의 마음이 더욱 따랐다.’ 했습니다. 또 이어서 ‘하늘의 보우를 받아서 수하고 강녕하여 끝내 임금의 은혜로 대우하심을 받았으니 어찌 다만 우연한 일이리오. 아아, 여기서 임금과 신하 사이의 깊은 정리를 볼 수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송시열의 글에서 말한 경인년의 일이란 곧 신의 조부가 청인들에게 항쟁하여 담판한 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금 그 글을 보면 신의 조부의 충절을 칭송한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으나 그 편말(篇末)의 한 구절, ‘수하고 강녕하여……’라는 말을 인용하여 견준 것이 애매하여 자못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 뒤 기유년 봄에 선대왕께서는 온천에 행차하시고 신의 조부가 명을 받아 서울을 지키고 있던 중에 차자를 행재소에 올려서 먼저 군왕으로서 재화를 만나 수신하고 반성하는 도리를 말하고 뒤이어서 말하기를, ‘평소 조정에서는 납리(納履, 신을 신음)하는 기색이 서로 잇달았는데 오늘날 행재소에는 달려가서 문안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불행하게도 병환이 있어 멀리 임시 처소에 나가 계시는데 만일 늙고 병들고 사고가 있는 자가 아니면 신하된 직분과 의리상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기강과 의리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신이 매우 염려하는 일입니다.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스스로 잘난 척하는 기색은 사람을 천 리 밖에서 거절한다 하였는데 오늘의 일이 역시 그것에 가까운 듯합니다. 따라서 이 일은 전하께서 깊이 깨쳐 생각하고 처리하여야 할 일인가 하옵니다.’ 했습니다.”

“이때 송시열이 마침 병이 나서 시골집에 있으면서 미처 행재소에 나아가서 문후하지 못하였다가 신의 조부의 차자를 보고서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오인하고 곧 한 장의 소를 올렸습니다. 그 첫머리에는 공손히 사죄하는 말을 하고 나중에는 ‘옛날 손종신(孫從臣)과 같이 수하고 강녕하여 비록 크게 당대의 높이는 바가 되었지만 그가 의리를 알고 기강을 진작시켰다고 일컬어지지 않아서 혹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매우 용렬하고 비루한 자가 있어서 그 처신이 보잘것없는데 도리어 그 사람에게서 비난을 받았다면 여러 사람이 낮춰 보고 비웃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신이 당한 경우가 불행하게도 그와 비슷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의 조부는 다시 짧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에 ‘신이 망령되이 말씀드린 차자로써 송시열이 자기를 논란 배척한 것으로 잘못 인식한 모양이지만 신의 본심은 결코 그렇게 할 의사가 없었음을 천지신명에게 증명하더라도 부끄럽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유감인 것은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보통 처지도 아니었는데 뜻밖에도 신이 믿음을 받지 못하여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마음으로 매우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설령 배척할 만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자의 교제는 서로 의(義)로써 권면하는 것인데 어찌 차마 전일에 좋아하던 사이를 배반하고 심하게 배척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하였습니다.”

“아아, 여기서 송시열이 신의 조부를 공격한 것과 신의 조부가 송시열을 대우한 것만 보아도 또한 송시열의 분노하는 기색과 신의 조부의 화평스러운 말을 한번에 환하게 분간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의 조부와 시열이 교제한 모든 내막입니다.”

이하성의 글은 삼전도 비문은 설령 송시열이 유감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공개적으로 이경석을 비판할 논란거리로는 애초에 삼지 않았는데, 행재소 차자 건으로 송시열이 터트렸다는 논조다.

이하성이 본 소를 올린 계기가 되는 홍계적 등이 올린 소를 조목으로 변론하면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홍계적 등은 또 말하기를, ‘송시열이 손적의 일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풍자하고 비방한 것은 송시열의 사사로운 뜻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실은 주자의 끼친 뜻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송시열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지은 그때에 벌써 비평과 논란을 하고 서로 사귀어 놀지 않았다면 비록 신의 조부를 비방한 그것이 정확한 의논은 못 되더라도 산림처사로서의 고결한 의논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수년 후에 신의 조부의 천거를 받고 서로 사모하고 좋아하였으며 더구나 그가 자기의 몸을 얼마나 신중히 하였으면서도 몸소 베옷 입은 선비의 차림으로 대신의 집을 찾아 왕래가 잦은 것이 어떻게 도를 즐겨하여 남의 세력을 잊고 선배를 스스로 따른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또 이때 송시열이 신의 조부에 대하여 높여서 예의로 대우하는 의사와 칭찬하는 말이 또 저러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본래 심복되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의 명망과 지위가 신의 조부와 서로 같게 되고 기세가 더욱 성하여지게 되니 서로 논란할 때에 감정이 생기고 서로 알력 하는 곳에서 틈이 일어나 점점 의심하고 갈려지게 되었으며 투기하고 미워하게까지 되었습니다.”

“신의 조부의 한평생 명예와 절조는 한 점의 더러움도 들어서 말할 것이 없었는데 흠을 30년 전에서 찾으려 하여 처음에는 가만히 옛말을 인용하여 신의 조부를 칭송하고 찬미하는 글에서 비추었다가 나중에는 드러내 놓고 욕설과 비방을 하며 위에 올리는 소장(疏章)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송시열이 신의 조부를 높여서 사모한 것이 신의 조부가 〈삼전도 비문〉을 짓기 전이 아니었습니다. 또 송시열이 신의 조부를 욕하고 비방한 것이 역시 그 글을 지은 사실을 들은 날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한 사람인데 전에는 존모하고 경복하여 주공(周公)에 비하기까지 하였으며 나중에는 업신여기고 꾸짖고 욕하여 그만 손적에게 비하였으니 아아,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마음가짐이겠습니까.”

이하성의 변론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