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간(李柬, 1677-1727)

이간(李柬)                                                                  PDF Download

이간은 본관은 예안(禮安)이고 자는 공거(公擧)요 호는 외암(巍巖)이다. 아버지는 부호군 이태형(李泰亨)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낙론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34세(1710, 숙종 36) 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7세(1713) 이유가 호서 사인(湖西士人) 이간 등 한두 사람을 등용할 만하다고 세자의 시강원으로 추천하니 숙종이 옳게 여겼다.

39세(1715) 이간을 자의(諮議)로 삼았다. 교리(校理) 홍석보(洪錫輔)가 상소 말미에 “자의 이간은 나이가 젊고 덕망을 쌓지 못했는데 갑자기 높이 의망하였으니 너무 갑작스럽다는 논의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했다.

40세(1716) 사간원에서 “자의 이간은 본디 범용한 사람으로 일찍이 학문이 있다는 일컬음이 없었는데 한갓 남의 장점을 추켜세우는 데에 힘쓴 덕분에 외람되게 시강의 줄에 흠을 내게 되었으므로 물정이 놀라하고 비웃은 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으니, 청컨대 개정하소서.” 청했지만 숙종이 따르지 않았다.

49세(1725, 영조 1년) 영조가 이간에게 “산림에서 독서하였으니, 반드시 학문하는 요점을 알 것인데, 내가 듣고자 한다.” 했다. 이간이 말하기를, “신은 듣건대, 학문하는 본말은 지와 행이라고 합니다. 지행 가운데 각기 큰 이치가 있고, 한 물건 한 일의 이치는 모두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나 심신에 일용하는 윤상과 기강 상에는 반드시 먼저 곧바로 결단하여 이해해야 하니 이것이 치지(致知)의 큰 이치입니다. 행(行)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선(善)과 하나의 행실을 진실로 마땅히 극진하게 해야 하나 수기(修己)에 나아가 말하면 천인(天人)과 이욕(理欲)의 나눔에서 곧바로 판단하여 구별해 내어야 하며, 치인(治人)에 나아가 말하자면 선을 선하게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겨 진실 되게 힘을 쓰면 이것이 역행(力行)의 큰 이치입니다. 학문을 하면서 그 큰 이치를 먼저 하지 않으면 학문하는 요점이 아닐까 싶으니 맹자가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워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영조가 “말을 어찌 많이 해야 되겠는가? 의리의 대체는 한 마디면 다 된다. 듣건대 노모가 있다 하니 지금은 우선 내보내나, 강학하는 사람을 얻기가 매우 쉽지 않다. 조만간 올라와 강론하여 내가 미치지 못한 점을 보완하도록 하라.” 했다.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50세(1726) 이간이 경연관으로 하명 받고 상소하길, “신은 생각건대, 옛사람은 순수하고 성실함이 남음이 있어서 질박을 이룸이 심후하고, 총명을 발휘하지 아니하여 수고롭고 겸손함이 여유 있으며, 지려(志慮)가 정밀하고 전일하여 힘을 내어 일하는 까닭에 성인의 말을 듣지 않아도 그 마음이 진실로 이미 정성스러웠습니다. 한 가지 말을 듣기에 미쳐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믿음이 참으로 어린애가 자애로운 어미를 만남과 같고, 충족을 구하는 성의가 참으로 기갈(飢渴)에 음식을 기다림과 같으며, 반드시 그렇게 될 기미가 참으로 나그네가 집으로 달려감과 같을 것이니, 대저 그렇게 하고 비록 군자가 되지 않고자 한들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방도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주자(周子)가 말하기를, ‘그 마음을 성실히 할 뿐이다.’하였으니, 마음이 성실하면 어진 인재가 돕고 어진 인재가 도우면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마음은 성실함이 요점이 된다.’고 하였으니, 아! 깊은 이치에 통달한 말이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절실하고 지극히 요약하며, 반드시 이루는 방도가 어찌 그다지도 지극히 간략하고 지극히 쉬운지요?” 했다.

51세(1727)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년 윤3월 기사에 졸기가 있다. “경연관 이간이 졸하였다. 임금이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초상과 장사에 쓸 것을 넉넉하게 제급하도록 하였다. 이간은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으로, 경학에 깊어 한원진과 명성이 비등하여 경연관으로 뽑혔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졸하므로, 임금이 듣고서 놀라 애도하여 이런 명이 있은 것이다. 경연관들이 증직하는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산림에 있는 사람에게 비록 경연관으로 초계하게 하기는 했지만, 작록으로 묶어 놓으려고 하지 않음은 대개 그의 소원이 아닌 것을 억지로 시키면 도리어 예대하는 도리에 어그러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지금 죽은 뒤에 증직한다면 생존과 사망에 따라 예로 대우하는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이 되니 증직할 것 없다.’ 하고 제술관에게 명하여 제문 내용에 오늘 내린 분부로 말을 만들어 제진(製進)하도록 하였다.”

이간 사후 1777년(정조 1년) 이조참판, 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1810년(순조 10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순조실록> 순조 10년 12월 기사에 시호를 내리는 내용과 더불어 평이 나온다. “이간의 호는 외암인데, 문순공 권상하를 사사하였고 학문을 많이 하고 행실이 돈독하여 큰 선비가 되었다. 영조조에 유일로써 자의를 제수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남당 한원진과 함께 동문수학하였는데,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대해 서신을 왕복하여 논변하다가 마침내 대립하기에 이르러 호학(湖學)과 낙학(洛學)이란 이름이 있게 되었다. 이간을 받드는 자를 낙학이라 하고 한원진을 받드는 자를 호학이라고 하였다.”

이간은 한원진과 더불어 호락논쟁의 맹장이다. 조선조 성리학은 중기를 고비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대립 이후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사단칠정 논변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변으로 이행됨으로써 성리학의 불꽃이 재연되었다. 그것은 주기적인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畿湖學派) 안에서 다시 주리와 주기로 대립하여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권상하의 문하에서 야기된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다.

논쟁은 처음에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오상편전론(五常偏全論)과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未發]의 상태,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미발심체순선론과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으로 대립이 생겼다. 본격적인 논쟁은 권상하 문하의 이간과 한원진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자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전국의 석학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 어유봉(魚有鳳) 등의 낙하(洛下: 서울)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本來善)이라 하여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 또는 낙학(洛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록 이간은 호서, 즉 충청도에 살았지만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낙하, 즉 경기도와 서울에 많이 있었으므로 낙학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원진의 설을 찬동하는 권상하, 윤봉구(尹鳳九), 최징후(崔徵厚), 채지홍(蔡之洪) 등의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락론자들은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철칙으로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한다. ‘이통(理通)’이란 이는 인(人)과 물(物)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氣局)’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理同)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俱同)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氣異)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하여 인기(因氣)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이간은 성(性)은 곧 이(理)이므로 인성과 물성은 모두 이로서의 태극(太極), 천명(天命)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덕(四德)을 본성으로 품수함으로 말미암아 오상의 본연(本然)을 구유하므로 그들 본성은 이통으로 동시오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인성과 물성이 상이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은 그들 기질의 국한성, 즉 차이에 따라서 상이하게 드러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과 물의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동시오상으로서 구동이요, 또 사람의 미발심체는 본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홍대용(洪大容) 등 북학파에게 이어져 전통적 화이론(華夷論)의 극복에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은 각기 그 기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상이한 것이며 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각기 인과 물의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물의 본성 즉 그 기질지성은 인기질(因氣質)로서 상이하다. 따라서 사람의 미발심체도 기질지성으로서 선과 악이 공재한다는 유선악론을 주장하였다.

이 호락논쟁은 이간 이후 오래도록 계속되었지만 끝내 귀결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이었고, 또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방법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 등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두산백과>

한원진(韓元震, 1682-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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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원진은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덕소(德昭)이고 호는 남당(南塘)이다.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덕랑 한유기(韓有箕)이며,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숭부(朴崇阜)의 딸이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문장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이 지나자 한번 본 문장은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조부의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36세(1717) 학행으로 천거 받아 영릉참봉으로 관직에 나갔다. 40세(172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44세(1725, 영조1년)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하여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앞서 정언(正言) 한덕전(韓德全)이 상소하여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를 초빙하시되, 직명(職名)의 유무를 막론하고 별유(別諭)로 부르시고, 직사(職事)를 강제로 맡기지 마시고, 경연에서 윤번으로 시강하게 하소서.” 하면서 “이간(李柬)의 통달하고 걸출함과 이이근(李頤根)의 조용하고 근신함과 윤봉구(尹鳳九)의 순박하고 온아함과 한원진(韓元震)의 해박하고 두루 아는 식견이 이번 선발에 참으로 합당합니다.” 했다.

45세(1726) 경연에서 영조가 호포(戶布), 결포(結布), 구전(口錢), 유포(遊布)의 이해와 편리 여부를 물었는데, 한원진이 네 가지 법 중에 호포(戶布)가 가장 시행할 만하다고 대답했다. 영조가 칭찬하여 좋게 여겼다. 한원진이 물러나가자, 시독관 김용경(金龍慶)이 말하기를, “산야에 있던 사람은 물러가기는 쉽게 여기고 나오기는 어렵게 여기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성심으로 머물러 있게 하여 자주 경연에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영조가 “마땅히 체념(體念)하겠다.” 했다.

50세(1731) 영조가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삼가 길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전하께서 경연에서 ‘명 태조가 맹자를 문묘에서 출향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셨다 합니다. 먼 외방에 떠도는 말이어서 비록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혹 털끝만큼이라도 그렇다면 거의 한 마디 말로써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맹자의 어짊은 한나라 이후로 매우 존상하였는데 명 태조가 갑자기 배척을 가하였고, 이로 인하여 여러 유현을 더욱 경멸하여 주자를 오활한 노유라고 지목했으며, 또 친히 논문을 저술하여 경설을 무너뜨렸습니다. 처음에 가르친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명나라의 세대가 마치기까지 도술이 밝혀지지 않았고 이단이 분분하게 일어났으며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고 습속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유자라고 이름 한 자들이 걸핏하면 정주에 대해 이론을 세우고 성현을 능가하여 세도가 무너지고 화란(禍亂)이 그 틈을 탔으니 그 혹심한 화가 거의 서진(西晉)의 청담보다 심했습니다. 이는 비록 명 태조가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으나 그 유폐의 원인이 되었으니 백세 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장이 들어가자, 영조는 노하여 “한원진은 황명 태조와 맹자를 서로 거론하여 감히 별도의 의리를 만들었으니 참람하고 망령됨이 심하다. 한원진은 산림에 있는 사람으로 역시 시상(時象) 가운데 들었으니 내가 매우 그르게 여긴다.” 하였다.

60세(1741) 김재로(金在魯)의 구명운동으로 복직하여 그 뒤 장령,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69세(1750) 판의금 원경하(元景夏)가 권상하가 먼 앞날을 기대하여 한원진은 산림의 경제인(經濟人)이라고 일컬었다고 하자, 영조가 “내가 일찍이 이 사람을 보았는데, 비단 학식이 고명(高明)할 뿐만 아니라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했다.

70세(1751) 졸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27년 2월 기사에 그의 졸기가 있다. “한원진의 자는 덕소로, 선정신 권상하의 문인이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뽑혀서 경연관이 되었는데, 한원진은 임금이 새로 대위(大位)를 계승하여 협조를 구하는 마음이 있으시니 초야의 선비가 한갓 고상한 뜻만 지키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하여 드디어 부름에 나아갔다. 그때 세변(世變)을 겪어 의리가 밝지 못하였는데, 한원진은 생각하기를, ‘성무(聖誣)를 분변하고 징토(懲討)를 엄정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급선무이다.’라고 여겨 들어가서는 고하고 나가서는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해 마지않았다. 임금이 본래 당론을 싫어하고 조제하려는 뜻이 있어 한원진이 진언할 때마다 비록 칭찬하고 권장하여 표시하였지만 실은 채용하지 않았으니, 한원진이 누차에 걸쳐 상소를 올려 돌아가기를 고하였다. 임금이 일찍이 명나라 태조가 맹자를 출향한 일을 언급하면서 맹자의 말로써 잘못되었다고 하였는데, 한원진이 상소하여 간함에 있어 말이 매우 절직하니, 임금의 노여움이 심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임금의 뜻을 엿보고는 잇달아 공격하여 마침내 파직을 당하였다. 얼마 안 있어 견서(甄敍)되었으나 권우(眷遇)는 더욱 쇠(衰)하였고 한원진도 또한 세상에 뜻이 없어 호해(湖海)의 물가에 숨어 살았다. 협소한 집은 소연(蕭然)하고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지만 대처(對處)하기를 유연(逌然) 하였고,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고 도를 밝히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저술로는 <경의기문록(經義記聞錄)>, <주서동이고(朱書同異攷)>, <의례보(儀禮補)> 등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70세였다.”

한원진 사후 정조 23년(1747)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순조 2년(1802) 문순(文純) 시호를 내렸다.

한원진은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명철하였으며, 『주역』, 『시경』, 『서경』 및 사서(四書), 『태극도설』, 『통서(通書)』, 『계몽(啓蒙)』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60세(1741) 완성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1689년(숙종 15)에 착수했지만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한 한국성리학의 대표적인 거작이다.

한원진은 후인들이 주자의 논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공자와 같은 성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도가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를 알기 위해서는 주자를 알아야 하고 주자를 모르고서는 공자를 알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므로 그 말의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만 주자는 배워서 아는 사람[學而知之者]이므로 초년설과 만년설이 다를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책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주자의 설에 대해 시간상의 선후와 의리(義理)라는 표준을 세우고 말은 비록 다르더라도 내용에 있어서는 뜻이 서로 통하는 것과 본래는 다름이 없는 것인데 학자들이 다르게 본 것 등으로 나누어 일일이 변정하였다. 특히 조선성리학의 핵심 문제들을 주희의 만년정론(晩年定論)으로 확정해 풀어나가는 것이 특색이다.

첫째는 기는 유위(有爲)로써 발동하는 것이고 리는 무위로서 발동하지 않는다 하여 퇴계학파의 이발(理發)을 부인한다.

둘째는 사단과 칠정에 대해 둘이 모두 본성의 작용[性之用]으로 정(情)이라는 이이의 설을 확인한다.

셋째는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서 주자가 인물성상이(人物性相異)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는 이기선후(理氣先後)에서 유행의 측면에서는 이기가 선후가 없고, 본체의 측면에서는 이선기후이며, 발생의 측면에서 보면 기선이후이지만 이기는 원래 선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섯째는 이동기이(理同氣異)에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을 기준으로 이일분수(理一分殊)를 확인한다.

정리하면 이이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호론(湖論)을 확인하려는 목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물성동이논쟁과 관련해서는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하는 낙론(洛論)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을 반대하고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대표했다. 한원진은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원진은 이와 같은 사고를 바탕으로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미발심체논쟁에서는 이간이 주장하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미발심체순선론(未發心體純善論)을 반대하고, 미발의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기질지성유선악론(未發氣質之性有善惡論)을 주장한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두산백과>

권상하(權尙夏, 1641-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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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하는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서울 출신이다.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 또는 한수재(寒水齋)이다. 아버지는 집의 권격(權格)이며 동생은 우참찬 권상유(權尙游)이다.

부친 권격(1620-1671)은 호가 육유당(六有堂)이다. 1650년 진사시를 거쳐 이듬해 정시문과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등용된 후 사간을 거쳐 집의에 오르고, 세자시강원에 오래 있었다. 1665년 당쟁을 일삼은 죄로 정주(定州)에 유배되었다. 1668년 집의로 재기용되었으나, 다시 쫓겨나 충청도 및 황해도의 도사, 고산도찰방, 강릉부사 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권격은 여가에는 서재를 깨끗이 청소하고 경서와 사서를 읽으면서 스스로 즐기었는데 특히 송나라 유자들의 저서를 가장 좋아하였다. 장재(張載)가 “말에는 교양이 있고 동작에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한 일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으며 잠깐 동안에도 마음에 둠이 있고 숨 쉬는 사이에도 본성의 수양함이 있어야 한다[言有敎動有法晝有爲宵有得瞬有存息有養]’이라는 말을 취하여 서당의 이름을 육유(六有)라 하였다. 후에 황강(黃江)의 위에다 은거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떠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권상하가 제자들을 기르며 강학한 곳이 바로 황강이다. 송시열과 권격의 집안은 삼대(三代)의 교분이 있었다.

20세(1660)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찍부터 송시열과 송준길 문하에서 유학했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31세(1671) 어버이 상을 당한 뒤로 시끄러운 세상을 영원히 단절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상복을 벗자 송시열을 따라 화양에서 사서, 역학계몽, 계사전, 홍범편 등을 강론했다.

35세(1675) 숙종 원년에 송시열이 북쪽으로 귀양 가자 여러 문인들과 같이 상소를 올려 변론하였으며, 가족을 이끌고 청풍(淸風)의 협곡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면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40세(1680) 송시열이 해도(海島)에서 돌아오자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그때부터 10년간 거의 절반은 화양의 문하에 있으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송시열이 사문(斯文)에 인재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여 선생의 거실에다 수암(遂菴)이라고 써서 붙였는데, 이는 설선(薛瑄)의 말을 취한 것이었다. 또 한수재(寒水齋)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주자 감흥시(感興詩)의 말을 사용하여 심법(心法)을 전수한 뜻을 보인 것이었다.

49세(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했다.

조정에서 송시열에게 사약이 내려오자,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드렸다. 송시열이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의 대의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전일에 결별을 고하는 편지에 쓴 ‘곧을 직(直)’ 자의 의의를 거듭 밝혀주었다.

훗날 숙종(肅宗)이 왕위에 오른 지 43년(1717년)에 병환이 나 온양(溫陽)의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할 때 권상하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받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하는 곳에 물러가 있지 못하여 괴산(槐山)의 시골집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상소를 올려놓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종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명하여 같이 오라고 명하였다. 숙종이 기어코 권상하를 부르고자 하여 관직의 사양을 허락하고 백의의 신분으로 들어와 보도록 하는 등 특별히 예우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에 따라 융복(戎服, 철릭과 주립으로 된 군복)을 입고 들어가 알현하였다.

숙종이 매우 기뻐하고 앞으로 가까이 오도록 하여 머물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뒤에 백성을 잘 다스리어 편안케 하는 방도에 관해 묻자, 대답하기를,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은 또한 ‘곧을 직(直)’ 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신의 스승 송시열이 임종할 때 또한 이것으로 문인들에게 훈계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송시열이 견지하였던 <춘추> 대의(大義)를 개진하면서 숙종에게 효종(孝宗)의 뜻을 계승할 것을 권면하였다.

75세(1715)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尹拯)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다.”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규(柳奎)를 비롯한 유생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의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처음에 윤증과 같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윤증이 그의 아버지 묘비문 사건으로 송시열과 갈라서면서 절교(絶交)하였다.

원류라는 것은 유시남(兪市南)이 편찬한 예서(禮書)로서 윤증으로 하여금 수정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 유시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그 책을 간행하려고 하자 윤증이 핑계를 대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책을 편찬할 때 윤증의 아버지도 일조를 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조정에서 간행하라고 하여 유상기가 정서된 원고를 달라고 요청하자 윤증이 내놓지 않고 “이는 우리 집의 책이다.”고 하였다. 후에 유상기가 초본(初本)으로 판각하고 권상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권상하가 서문을 지으면서 윤증의 죄를 매우 엄히 성토하고 “아버지처럼 섬길 분에게 옛 소진(蘇秦)과 의(張儀)의 솜씨를 부렸다.” 하고, “형칠(邢七)이 낭패를 당한 것은 본래의 기량(技倆)이다.” 했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경종수정실록> 경종 1년 9월 2일 기사에 권상하의 졸기가 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졸하였다. 권상하의 자는 치도(致道)로 견실하고 중후하였으며 학문 익히기를 매우 부지런하고 독실하게 했다. 권상하는 송시열을 사사하였는데, 송시열이 매우 존중하여 그가 거처하는 집을 한수재(寒水齋)라 했다. 송시열이 초산(楚山)에서 화를 입었을 때 세도를 권상하에게 부탁하고 옷과 책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옷은 바로 주자가 지은 야복(野服)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으며, 책은 이이가 손수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초본으로, 김장생이 송시열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 송시열이 일찍이 장식(張栻)의 우제사(虞帝祠) 의리에 따라 명나라 신종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다. 권상하가 비로소 청주의 화양동에 건립하고 만동묘라 이름하고 사변(四籩)과 사두(四豆)로 신종과 의종 두 황제를 제사하였다. 갑신년에 숙묘(肅廟)가 태세(太歲)가 군탄(涒灘)이라 하여 황조(皇朝)의 옛 은혜에 감격해 단선(壇墠)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려 하여 비밀히 권상하를 찾아 물으니, 권상하가 극력 찬동해서 드디어 대보단(大報壇)을 쌓았던 것이다. 정유년에 숙묘가 온천에 거둥하매 권상하가 비로소 소명을 받아 행궁에 입견하였다가 회란(回鑾) 함에 미쳐서 권상하도 또한 환산(還山) 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81세였다. 뒤에 시호를 문순(文純)으로 내렸다. 문인으로는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한수재집(寒水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송시열(宋時烈)                                                       PDF Download

송시열은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尤菴) 또는 우재(尤齋)이다.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이고 아버지는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송갑조(宋甲祚)이다.

충청도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 뒤로 회덕의 송촌 비래동 소제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훗날 윤증 사이에 일어난 갈등과 논쟁을 회니논쟁(懷尼논쟁)이라고 하는데, 회는 회덕을 지칭한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송준길 집안에서 세운 회덕 송촌에 자리 잡고 있던 옥류각에서 송시열은 송준길과 함께 어울려 강학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 <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게 되었다.

19세(1625)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약 1년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 낙향 기간 교유를 맺은 중요한 인물 중에 후에 사문난적으로 내몰려 사사 당한 윤휴(尹鑴)가 있다.

43세(1649)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으로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중 존주대의(尊周大義: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중화를 명나라로, 이적을 청나라로 구별하여 밝힘)와 복수설치(復讐雪恥: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송시열의 존주대의는 곧 존주론(尊周論)이요 복수설치는 곧 북벌론(北伐論)이다. 안정된 국제 질서를 무력으로 파괴한 청나라에게 심복할 수 없다는 국민 정서에 기초한 북벌론과, 주나라에서 일어난 중화문화(中華文化)를 계승 발전시킬 나라는 이제 조선뿐이라는 자의식에 기초한 존주론은 국민단합과 조선 문화 수호의 논리로 전개가 되고 마침내 조선중화주의로 발전을 한다.

효종대의 정책은 대외적으로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천명하고 대내적으로는 예치(禮治)를 표방하면서 전개되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새롭게 나라가 설립되는 은혜)을 입은 명나라에 끝까지 의리를 지키겠다는 대명의리론은 유교 이념을 공통분모로 하는 동아시아 국제 사회에서 조선의 명분을 강화했다. 또한 강제성을 가진 법과 자율성에 기초한 도덕의 중간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두 가지를 아우르는 예(禮)를 통치의 이념으로 내세운 예치는 무너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이었다. 대명의리를 지키고 복수설치를 위해 북벌을 하고 조선 중화(朝鮮中華)를 이룩하기 위해 예치를 한다는 것인데 효종대 정치 이념의 상징적 인물이 송시열이었다.

49세(1655)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52세(1658)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53세(1659)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기해예송(己亥禮訟)과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5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이 두 차례 예송은 모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와 관계가 되는 사건이다. 인조의 계비로 왕비가 되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자의대비 조씨는 생전에 전처 소생인 효종과 전처 소생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을 모두 맞게 된다. 1659년에 일어난 기해예송은 자의대비가 어머니로서 효종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갑인예송은 자의대비가 시어머니로서 효종비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문제로 각각 남인과 서인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다툰 사건이다.

기해예송은 효종이 승하하자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입어야 했는데,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은 기년(朞年, 1년)을 주장했고 허목으로 대표되는 남인은 3년을 주장했다.

애초 인질에서 풀려 귀국한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죽는다. 왕위 계승법으로 보면 소현세자의 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된다. 이때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는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아 죽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인조가 승하한 뒤 효종이 즉위했고, 제주도로 귀양간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장남과 차남은 현지에서 죽고 막내아들만 남게 된다.

허목을 중심으로 한 남인은 효종이 원래 차남이었다 하나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대우를 해야 하고, 따라서 조대비는 장남이 죽었으니 상복을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의 주장은 달랐다. ‘왕위를 계승했어도 장남이 아닌 경우에는 기년복(朞年服)이라’ 했으므로 조대비는 상복을 1년 동안만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3년과 기년, 이것은 어머니가 아들의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느냐의 단순한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아직도 제주도에 유배된 채 살아 있었던 것이다. 효종을 차남으로 인정하면 제주도에 살아 있는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왕실의 적통이라는 말이 되고 효종의 정통성에 타격을 준다. 효종의 총신인 송시열로서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다 죽은 효종에게 불리한 주장을 한 것이지만 예법에는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효종을 장남으로 봐야 한다는 남인의 입장은 왕권을 강화하자는 것이었고 아무리 왕이지만 효종은 차남이라고 보는 서인의 입장은 신권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사회 통합을 위하여 왕도 일반인과 똑같은 예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송은 예치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론의 차이로 벌어진 성리학 이념 논쟁이었고 이상적 정치 형태인 붕당 정치에서 파생한 정치 사건이었다.

83세(1689)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다.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후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 정읍, 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송시열은 전적으로 주자의 학설을 계승한 것으로 자부했으며,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조선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시켰다. 주자의 교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사업을 삼았다. 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였던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연구로 일생을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 저술을 남겼다.

송시열은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과 사회적 변용에 더 역점을 두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이념, 이이의 변통론(變通論), 김장생의 예학(禮學) 등 기호학파의 학문 전통이 기반으로 깔려있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정직[直]의 실천 문제였다. 형이상학적 학설 논쟁에만 몰두하지는 않아 송시열의 이기심성론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지만 당대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바가 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
<당의통략>
<송자대전>
<동유학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