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하(權尙夏, 1641-1721)

권상하(權尙夏)                                                        PDF Download

 

권상하는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서울 출신이다. 자는 치도(致道)이고 호는 수암(遂菴) 또는 한수재(寒水齋)이다. 아버지는 집의 권격(權格)이며 동생은 우참찬 권상유(權尙游)이다.

부친 권격(1620-1671)은 호가 육유당(六有堂)이다. 1650년 진사시를 거쳐 이듬해 정시문과에 응시하여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에 등용된 후 사간을 거쳐 집의에 오르고, 세자시강원에 오래 있었다. 1665년 당쟁을 일삼은 죄로 정주(定州)에 유배되었다. 1668년 집의로 재기용되었으나, 다시 쫓겨나 충청도 및 황해도의 도사, 고산도찰방, 강릉부사 등 주로 외직에 있었다.

권격은 여가에는 서재를 깨끗이 청소하고 경서와 사서를 읽으면서 스스로 즐기었는데 특히 송나라 유자들의 저서를 가장 좋아하였다. 장재(張載)가 “말에는 교양이 있고 동작에 법도가 있으며 낮에는 한 일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으며 잠깐 동안에도 마음에 둠이 있고 숨 쉬는 사이에도 본성의 수양함이 있어야 한다[言有敎動有法晝有爲宵有得瞬有存息有養]’이라는 말을 취하여 서당의 이름을 육유(六有)라 하였다. 후에 황강(黃江)의 위에다 은거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떠난 지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권상하가 제자들을 기르며 강학한 곳이 바로 황강이다. 송시열과 권격의 집안은 삼대(三代)의 교분이 있었다.

20세(1660)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일찍부터 송시열과 송준길 문하에서 유학했다.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31세(1671) 어버이 상을 당한 뒤로 시끄러운 세상을 영원히 단절하고 자신을 위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상복을 벗자 송시열을 따라 화양에서 사서, 역학계몽, 계사전, 홍범편 등을 강론했다.

35세(1675) 숙종 원년에 송시열이 북쪽으로 귀양 가자 여러 문인들과 같이 상소를 올려 변론하였으며, 가족을 이끌고 청풍(淸風)의 협곡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면서 독서하고 사색하며 종신토록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40세(1680) 송시열이 해도(海島)에서 돌아오자 찾아가 문안을 드리고 그때부터 10년간 거의 절반은 화양의 문하에 있으면서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송시열이 사문(斯文)에 인재를 얻은 것을 매우 기뻐하여 선생의 거실에다 수암(遂菴)이라고 써서 붙였는데, 이는 설선(薛瑄)의 말을 취한 것이었다. 또 한수재(寒水齋)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주자 감흥시(感興詩)의 말을 사용하여 심법(心法)을 전수한 뜻을 보인 것이었다.

49세(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했다.

조정에서 송시열에게 사약이 내려오자, 들어가 결별의 인사를 드렸다. 송시열이 손을 붙잡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아침에 도(道)를 깨닫고 저녁에 죽기를 기대하였는데, 지금 끝내 도를 깨닫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앞으로는 오직 치도(致道)만 믿는다.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위주로 삼고 사업은 마땅히 효종의 대의를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전일에 결별을 고하는 편지에 쓴 ‘곧을 직(直)’ 자의 의의를 거듭 밝혀주었다.

훗날 숙종(肅宗)이 왕위에 오른 지 43년(1717년)에 병환이 나 온양(溫陽)의 온천(溫泉)에 가서 목욕할 때 권상하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하는 교지(敎旨)를 받고 감히 사사로이 거처하는 곳에 물러가 있지 못하여 괴산(槐山)의 시골집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상소를 올려놓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숙종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사관을 명하여 같이 오라고 명하였다. 숙종이 기어코 권상하를 부르고자 하여 관직의 사양을 허락하고 백의의 신분으로 들어와 보도록 하는 등 특별히 예우하였으므로 할 수 없이 ‘임금이 행궁(行宮)에 갈 때 호위하고 수행하는 의의’에 따라 융복(戎服, 철릭과 주립으로 된 군복)을 입고 들어가 알현하였다.

숙종이 매우 기뻐하고 앞으로 가까이 오도록 하여 머물러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한 뒤에 백성을 잘 다스리어 편안케 하는 방도에 관해 묻자, 대답하기를,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은 또한 ‘곧을 직(直)’ 자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신의 스승 송시열이 임종할 때 또한 이것으로 문인들에게 훈계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송시열이 견지하였던 <춘추> 대의(大義)를 개진하면서 숙종에게 효종(孝宗)의 뜻을 계승할 것을 권면하였다.

75세(1715)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尹拯)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다.”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규(柳奎)를 비롯한 유생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의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처음에 윤증과 같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윤증이 그의 아버지 묘비문 사건으로 송시열과 갈라서면서 절교(絶交)하였다.

원류라는 것은 유시남(兪市南)이 편찬한 예서(禮書)로서 윤증으로 하여금 수정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 유시남의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그 책을 간행하려고 하자 윤증이 핑계를 대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책을 편찬할 때 윤증의 아버지도 일조를 하였기 때문이다. 뒤에 조정에서 간행하라고 하여 유상기가 정서된 원고를 달라고 요청하자 윤증이 내놓지 않고 “이는 우리 집의 책이다.”고 하였다. 후에 유상기가 초본(初本)으로 판각하고 권상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 권상하가 서문을 지으면서 윤증의 죄를 매우 엄히 성토하고 “아버지처럼 섬길 분에게 옛 소진(蘇秦)과 의(張儀)의 솜씨를 부렸다.” 하고, “형칠(邢七)이 낭패를 당한 것은 본래의 기량(技倆)이다.” 했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 윤증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경종수정실록> 경종 1년 9월 2일 기사에 권상하의 졸기가 있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문순공(文純公) 권상하(權尙夏)가 졸하였다. 권상하의 자는 치도(致道)로 견실하고 중후하였으며 학문 익히기를 매우 부지런하고 독실하게 했다. 권상하는 송시열을 사사하였는데, 송시열이 매우 존중하여 그가 거처하는 집을 한수재(寒水齋)라 했다. 송시열이 초산(楚山)에서 화를 입었을 때 세도를 권상하에게 부탁하고 옷과 책을 그에게 물려주었다. 옷은 바로 주자가 지은 야복(野服)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으며, 책은 이이가 손수 쓴 <경연일기(經筵日記)> 초본으로, 김장생이 송시열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처음에 송시열이 일찍이 장식(張栻)의 우제사(虞帝祠) 의리에 따라 명나라 신종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루지 못하였다. 권상하가 비로소 청주의 화양동에 건립하고 만동묘라 이름하고 사변(四籩)과 사두(四豆)로 신종과 의종 두 황제를 제사하였다. 갑신년에 숙묘(肅廟)가 태세(太歲)가 군탄(涒灘)이라 하여 황조(皇朝)의 옛 은혜에 감격해 단선(壇墠)을 설치하고 제사지내려 하여 비밀히 권상하를 찾아 물으니, 권상하가 극력 찬동해서 드디어 대보단(大報壇)을 쌓았던 것이다. 정유년에 숙묘가 온천에 거둥하매 권상하가 비로소 소명을 받아 행궁에 입견하였다가 회란(回鑾) 함에 미쳐서 권상하도 또한 환산(還山) 하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81세였다. 뒤에 시호를 문순(文純)으로 내렸다. 문인으로는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이 가장 이름이 알려졌다.”

 

참고문헌
<국역 조선왕조실록>
<국역 국조인물고>
<한수재집(寒水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