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일기』 중초본과 정초본


『광해군 일기』 중초본과 정초본.

 

해군은 임금의 직위에서 폐위되었기 때문에 재위기간 중 국정 전반의 역사기록으로 ‘광해실록’이라는 이름을 갖지 못하고 ‘광해군 일기’가 된 것이다. 또 조선시대 국왕들의 실록 가운데는 유일하게 필사본으로 남아 있다. 이 『광해군일기』는 ‘중초본(中草本, 太白山本)’ 64책과 ‘정초본(正草本, 鼎足山本)’ 39책의 두 종류가 있다.

조선시대에 왕조실록을 만들 때는 몇 차례의 정리와 수정 과정을 거친다. 맨 처음 써진 기록을 ‘사본’(寫本, 손으로 쓴 책, 베껴 쓴 책)이라고 하는데 다른 이름으로 초본(鈔本)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맨 처음에 기초를 잡았다고 하여 초고본(初稿本) 또는 초초본(初草本)이라고 부른다.

그 다음에 고친 것을 재고본(再稿本) 또는 중초본(重草本)이라 한다. 왕조실록은 대개 초고를 한번 고친 뒤 중초본(重草本)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정초(正草, 바르게 씀)하여 완성한다. 중초본은 중간에 쓴 원고, 즉 두 번째로 쓴 원고라 하여 중초본(中草本)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므로 『광해군 일기』중 <중초본>은 먼저(두번째로) 기초를 잡은 원고를 말하고 <정초본(正草本)>은 마지막으로 완성한 원고를 말한다.

『광해군 일기』<중초본>은 붉거나 검은 먹으로 수정하거나 삭제하고 혹은 첨가한 부분이 많다.(이러한 부분을 여기서는 【】표시 안에 넣어서 표기하기로 한다.) 그리고 크고 작은 부전지가 매우 많이 붙어 있으며, 각 면의 위아래 빈 곳에 가필하거나 첨가한 부분이 많고 대부분 초서로 쓰여 있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주도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 대거 반영되어 있다.

정초본은 1634년에 등록관(謄錄官) 50명이 임명되어 정서를 하기 시작하여 그해 5월에 2부를 완성하여 보관하였다. 중초본에는 삭제하지 않은 내용들이 많아 모두 187권 64책으로 편철되어 있다. 정초본은 중초본의 내용들을 대거 산삭 정리하여 187권 40책이 되었다. 전체의 분량이 중초본에 비해 1/3 정도 축소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리된 정초본이 말하자면 광해군 시대의 공식적인 실록이다.

『광해군일기』(중초본)은 1624년(인조 2년)부터 1633년까지 11년 가까운 시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여러 차례의 수정과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먼저 광해군 시대의 ‘시정기(時政記, 춘추관에서 각 관서들의 업무 기록을 종합하여 편찬한 기록물)’를 수정하려고 하였다. 이는 실록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기록이 주로 반대파(대북파) 인물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1624년 1월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 춘추관을 포함하여 많은 관청이 불에 탔다. 이때 시정기를 비롯한 많은 사료들이 분실되었다. 1624년 6월에 춘추관에서 남아있는 시정기를 수정하지 않고, 『광해군일기』를 곧바로 편찬하기로 결정하고 ‘일기찬수청’을 남별궁에 설치하고 담당관을 임명하여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기초 사료들이 대부분 유실된 상태에서 각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던 일기나 소장(疏章), 조보(朝報), 문집(文集) 등을 수집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편찬 작업이 매우 느렸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에는 후금이 침입하여 문서 일부는 강화도로 옮기고 일부 자료는 남별궁에 임시로 묻어 두었으나, 묻어둔 자료가 대부분 손상되었다. 이 때까지 『광해군일기』중 130개월분이 중초본으로 완성되고 그 나머지 57개월분은 초고 상태로 남았다. 이후 1632년(인조 10년)에 다시 찬수청을 다시 설치하고 편수 관원을 임명하여 편찬을 계속하였다. 1633년(인조 11년) 12월에 최종적으로 187개월분의 <중초본>이 완성되었다.

 

<참고문헌>

차문섭, 「광해군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왕대별 해제 제15대 광해군일기」(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17세기 초엽 광해군 시대


17세기 초엽 광해군 시대.

 

해군(1575년∼1641년)은 조선후기의 제15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으나 궁정에서 발생한 구데타에 의해 끌어내려져 국왕의 칭호를 빼앗기고 왕자 때 받은 ‘광해군’이라 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어 북쪽으로 피난을 가버린 선조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가 국난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광해군이 집권한 뒤인 1616년에 후금(뒤의 청나라)이 건국되었다. 이에 그는 명나라와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였다. 또 대동법을 실시하고(1608년) 농지조사를 통해 경작지를 넓혀 재정을 충실히 하였으며(1611년), 창덕궁을 재건하고(1609년), 경희궁(1619년)과 인경궁(1621년)을 중건하는 등 정치적 업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서인과 남인이 주도한 반란에 의해서 국왕의 지위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1392년∼1897년) 600년은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14세기부터 16세기말까지 약 300년, 후기는 17세기부터 19세기말까지 약 300년이다.
율곡은 1537년부터 1584년까지 살았으니 전기의 말엽에 산 사람이다. 그는 당시 선조 임금을 향하여 줄곧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582년(선조 15년),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에 올린 상소문 중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지금 전하께서는 폐단이 오랫동안 쌓인 뒤에 나라를 이어받았으니 경장(更張, 낡은 제도 등을 새롭게 고침)할 대책을 강구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매번 제도를 개혁하는 일을 어렵게 여기시고 변통(變通, 형편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함)해야 한다는 말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비유하자면 오래 묵은 집의 재목이 썩어서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데도, 서까래 하나 갈지 않고 기둥 하나도 고치지 않고서 앉아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진시폐소(陳時弊疏)」, 『율곡전서』권7)

율곡은 당시 조선의 상황이 “폐단이 오랫동안 쌓인 뒤”이며,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데”, “앉아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선조가 개혁의 정치를 추진하려고 하지 않으니 다소 과장하여 이러한 건의를 하였겠지만, 사실은 당시 조선의 상황을 너무도 정확히 표현한 것이다. 바로 10년 뒤에 일본의 침략상황을 염두에 두면 그렇다.
일본의 침략이 오직 일본만의 책임일까? 침략을 하도록 수많은 허점을 조선은 이미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외국의 침략을 경계하지 않고 내부의 당파싸움에만 몰두하고, 군대의 정비나 개선은 멀리하고 국민들의 삶은 피폐한 채로 놔두고 외면하고 있지 않았는가? 조선은 건국된 이후 300여년 가까이 지나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이 율곡의 상소문에 절절히 드러나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비록 막대한 손실과 피해를 보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사실은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율곡의 건의처럼 철저하게 개혁하고 묵은 집을 다시 고칠 수 있는 기회였다. 만약 잘 개혁을 한다면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 즉 1600년대 초엽(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 뒤를 이어 인조(1623년∼1649년), 효종(1649년∼1659년), 현종(1659년∼1674년), 숙종(1674년∼1720년)이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들이 왕위에 있었을 때가 대략 17세기이며, 이 시기는 조선을 비롯하여 중국과 일본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역사의 긴 흐름을 염두에 두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18세기,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을 계기로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1618년∼1924년)로 정권이 바뀌었다. 쇠퇴한 명나라가 몰락하고 강력한 군대를 지닌 만주족의 청나라가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것이다. 일본은 중세시대(1192년∼1603년)에서 근세시대(1603년∼1868년)로 바뀌었다. 즉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기(1467년∼1603년)를 거쳐서 에도의 막부정권(1603년∼1868년)으로 전환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보면 17세기 초엽은 새로운 국가나 정권이 등장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발전을 꾀한 시기였다. 직접적으로 전쟁의 참화를 가장 심각하게 겪었던 조선 역시 그런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정권도 변하지 않았고 조선이라는 국가도 그대로였다. 그래도 시대적으로는 철저한 개혁을 통해서 국가 전체의 조직이나 제도를 재정비해 나가야하는 시기였다. 머지않아 서구에서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문명이 밀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시대(1608년∼1623년)는 그런 점에서 조선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중요한 시기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였으나 반대파 지식인들을 설득하지 못하였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사망한 1608년 2월부터 1623년 3월까지 약 15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재위한 시기에 유학자들 사이에 붕당(학문이나 정치적 입장을 함께하는 유학자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 매우 극심하였다. 선조 시기인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을 계기로 동인은 남인과 북인의 두 파로 나뉘었다. 광해군이 집권할 때는 이산해, 이발, 정인홍 등 반대파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강경파인 북인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초에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선조시기 말엽에 반란의 주모자로 몰린 정여립은 예조좌랑,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한 인물로 원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제자였다. 서인 측에 속했던 그는 나중에 동인이 권력을 잡자 율곡을 비판하고 동인 쪽에 섰다. 이러한 그를 임금이던 선조가 비판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나중에 그는 반란의 의심을 받다가 자살하였는데, 서인들의 고발과 정철의 과도한 수사로 그와 관계를 맺고 있던 동인들이 많이 희생이 되었다. 광해군 재위 초기에 동인 중 북인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그 반대쪽인 서인과 남인은 비주류였다.
광해군은 1612년에는 김직재(金直哉)에 대한 잘못된 고발을 빌미로 100여명의 소북파(북인의 일파)를 처단하였으며, 1613년에는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여 죽였다. 광해군은 서자, 즉 첩의 아들이었고, 영창대군은 선조의 본처인 인목왕후의 아들, 즉 적자였다. 1618년에는 자신의 작은 어머니이자, 영창대군의 친어머니 인목왕후(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 이러한 사건들은 대부분 대북파(북인의 일파)의 책동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1623년 서인세력이 남인의 지원을 받아 능양군(인조)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인조반정) 이후 그들은 광해군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유배형에 처했는데,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에 사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율곡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율곡.

 

율곡’이라는 키워드로 <조선왕조실록>(국역본)을 검색해보았다. (사이트 주소 : http://sillok.history.go.kr/, 검색일 : 2019년 11월 3일) 검색 결과는 총 63건이다. 이것은 조선의 전체시기에 해당한 기록이다.
율곡은 1537년에 태어나 1584년에 사망하였다. 즉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1488∼1544) 연간에 태어나 선조(1552∼1608) 연간에 사망하였다. 여기서는 선조 이후의 결과만, 즉 1600년대 이후를 살펴보기로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2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건
『인조실록』 3건
『효종실록』 1건
『현종개수』 2건
『숙종실록』 14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1건
이상 총 24건.

1700년대:
『경종실록』 2건
『영조실록』 6건
『정조실록』 8건
이상 총 16건.

1800년대:
『순조실록』 5건
『철종실록』 2건
『고종실록』 2건
이상 총 9건. 전체적으로 총 49건이다.

‘율곡’은 율곡 이이의 호(號)다. 이 호는 전통시대에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여 따로 지어 부른 이름이었다. ‘율곡’으로 검색하면 말하자면 율곡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담긴 문장만 검색된다. 그래서 율곡의 본명인 ‘李珥(이이)’라는 한자 이름으로 검색해보았다. 그랬더니 앞서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훨씬 더 많이 검색 되었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22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18건
(여기서 『광해군일기 중초본』이란 두 번째로 수정한 원고본라는 뜻이고 『정초본』이란 마지막으로 완성된 원고, 즉 최종본이란 뜻이다. )

『인조실록』 63건
『효종실록』 32건
『현종실록』 57건
『현종개수실록』 96건
(여기서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이란 『현종실록』을 다시 수정한 실록이라는 뜻이다.)

『숙종실록』 192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17건
(『숙종실록 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란 『숙종실록』의 일부를 수정하여 바로 잡은 실록이라는 뜻이다.)
이상 총 497건이다.

앞서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는 1600년대에 24건이었는데 ‘이이’로 검색한 결과는 497건이니 무려 20배 이상 더 많다. <왕조실록>에서는 호 보다는 본명으로 불리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00년대에 ‘이이’를 가장 많이 언급한 시기는 숙종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가 전체의 39%정도를 점하고 있다. 숙종시대에 율곡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1700년대:
『경종실록』 7건
『경종수정실록』 4건
『영조실록』 76건
『정조실록』 55건
이상 총 142건.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8배 이상 더 많다.

이 1700년대에는 영조, 정조시대에 ‘이이’가 압도적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특히 영조시대가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영조는 조선 사회를 개혁한 임금, 계몽군주, 혹은 조선의 후기 르네상스를 연 임금 등으로 불린다. 이런 영조의 이미지와 율곡의 개혁정신이 잘 어울린다. 아마도 이 시대에 율곡에 대한 언급은 사회 개혁과 관련될 것이다.

1800년대:
『순조실록』 23건
『헌종실록』 2건
『철종실록』 8건
『고종실록』 30건
『순종실록』 1건
이상 총 64건. 1600년부터 1800년대 까지 전체 총 703건이다.

이런 결과는 ‘율곡’으로 검색한 결과보다 7배 이상 더 많다.
1800년대 즉 19세기에 율곡은 고종 시대에 가장 많이 언급되었다. 고종 시대는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시대였다. 그만큼 위기의식이 특히 강한 시대였다. 율곡이 살아생전에 모시던 임금인 선조에게 호소하였던 위기의식이 고종시대에 다시 재음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에서 율곡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는데 1600년대는 497번, 1700년대는 142번, 1800년대는 64번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율곡에 대한 언급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곡 사상의 핵심은 개혁 정신이고 변혁의 정신이다. 조정에서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율곡의 이야기가 이렇게 줄었다는 것은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정신이 줄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조선 사회가 몰락해가면서, 1800년대에 이르면 ‘개혁’만 가지고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사회를 완전히 변혁시킬 ‘혁명’이 필요했으며, ‘동학 혁명’이라는 말이 그런 의미에서 더 가슴에 다가온다. ‘동학혁명’은 1800년대 말, 즉 19세기 말엽의 조선 사회의 절박함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동학혁명’이라는 단어는 당시 사람들의 표현이 아니고 그때는 ‘개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 ‘李滉(이황)’을 검색해보았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1600년대:
『광해군일기 중초본』 38건
『광해군일기 정초본』 35건
『인조실록』 24건
『효종실록』 22건
『현종실록』 19건
『현종개수』 34건
『숙종실록』 67건
『숙종실록 보궐정오』 6건
이상 총 245건.
율곡 이이에 대한 검색 결과가 총 497건이었으니 그것의 1/2정도에 불과하다.

1700년대:
『경종실록』 8건
『경종수정실록』 4건
『영조실록』 47건
『정조실록』 47건
이상 총 106건이다. 율곡의 경우는 총 142건이었다.

1800년대:
『순조실록』 12건
『철종실록』 3건
『고종실록』 15건
『순종실록』 1건
이상 총 31건이다. 율곡은 총 64건 이었다. 약 1/2정도이다.
전체적으로 1600년부터 1900년까지 율곡은 총 703건, 퇴계는 385이 언급되었다. 율곡이 2배정도 더 많이 논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의 사상은 율곡 사상과 비교해보면 정통 주자학에 더 가깝다. 개혁적이라기보다는 보수에 가까우며 변화보다는 전통 유지에 가깝다. 퇴계는 성리학 사상과 수양에 더욱 침잠하였기 때문에 이상주의자에 가깝고, 율곡은 거기에 비하면 현실주의자였다. 그래서 퇴계는 리(理, 이치 또는 원리)를 더 강조한 편이었고, 율곡은 기(氣, 기질 또는 현상)를 더 주목한 편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1502년부터 1571년까지 70년을 살고 사망하였다. 이에 비하면 율곡은 1537년부터 1584년까지 겨우 48년을 살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요절에 가까운 율곡의 짧은 생애를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는데 그런 마음이 율곡을 더욱 그리워하고 회상하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율곡은 또 조정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관리 생활을 오랫동안 하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사상이나 언행에 정치적인 것과 관련이 많았다. 그 점이 후대의 조정에서도 관리들의 입에 오르내릴 소재가 많았을 것이다. 퇴계의 경우는 일찍부터 관직을 단념하고(퇴계는 당시 빈번하게 발생한 사화士禍의 위험을 절감하고 있었다.) 고향에 내려가 산림에서 살면서, 학자로서의 삶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에 조정 사람들의 대화 주제에 거론되는 일이 율곡 보다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검색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광해군일기』부터 살펴보면서 <조선왕조실록>에 율곡이 어떻게 기억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말하자면 율곡에 대한 이미지의 변화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