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이준경과 이황의 종묘 배향이 부러운 사관


『광해군일기』: 이준경과 이황의 종묘 배향이 부러운

사관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7일자에 「이준경과 이황을 선조묘의 배향 공신으로 삼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정초본>에도 실려있다.

이날 대신들과 여섯 관청의 관리들이 빈청(賓廳, 궁중의 회의실)에 모여 선조묘(宣祖廟, 선조 임금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배향할 명신(名臣, 휼륭하여 이름이 난 신하)을 의논, 결정하였다. 그 대상은 첫 번째 후보로 이준경(李浚慶)과 이황(李滉)이며, 두 번째 후보로 노수신(盧守愼)과 유성룡(柳成龍)이었다. 이를 보고하니 임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수신과 유성룡은 지난 조정에서 처음과 끝을 잘 보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묘정(廟庭, 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부족할 듯하다. 다른 상신(相臣, 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들도 적지 않은데 하필 그들로 하는가? 부득이하다면 이준경과 이황만을 배향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임금의 생각에 대신들은 모두 찬성하고 그 결론을 따랐다. 사관은 이러한 기사 뒤에 자신의 의견을 이렇게 적었다.

“노수신의 만절(晩節, 늙은 시절)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며, 유성룡의 문장과 학문이 훌륭한 면은 있으나 도량이 작고 식견이 얕았다. 그는 10년 간 정승으로 지내면서 오직 남의 비위 맞추기를 일삼고 사사로움에 이끌려 파당을 심고 오로지 자기와 뜻이 같으면 좋아하고 다르면 싫어하였으니 정승으로서 칭찬할 만한 업적이 아무 것도 없었으며 ‘또 능히 처음과 끝을 잘 보전하지 못했다.’”

노수신(1515년∼1590년)은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전라도 광주이다. 이언적(李彦迪)의 제자이며 154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시강원사서(1544년)에 임명되었으며 인종 즉위시에 정언이 되었다가 1545년(명종 즉위년)에 윤원형(尹元衡)의 을사사화로 이조좌랑 직위에서 파직되어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진도로 유배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 기간 중에 노수신은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등과 서신을 교환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사림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복권되어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이후 우의정(1573, 선조 6년), 좌의정(1578), 영의정(1585년)영의정에 이르렀다. 1589년 10월에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을 추천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임금(광해군)이 그에 대해서 처음과 끝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뜻은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뜻이다. 특히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된 점을 들어 종묘에 배향하기가 어렵다고 본 것이다.

유성룡(1542년∼1607년)은 이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豊山, 지금의 안동)이다. 이황의 제자이며 김성일과 동문이다. 1566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대교(1568년), 공조좌랑(1569년), 병조좌랑, 응교 등을 거쳐 사간(1578년)이 되었다. 그리고 부제학(1580년),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 대사헌(1582년)에 올랐다. 1589년에 병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해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스스로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선조의 신임을 받아, 우의정(1590년), 이조판서, 좌의정(1591)등에 임명되었다.

왕세자 책봉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는 동인의 온건파인 남인(南人)에 속해, 같은 동인의 강경파인 북인(北人)의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한 적이 있었다. 이즈음부터 동인이 유성룡을 중심으로한 남인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란에 대비해 미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추천하여 의주목사와 전라도좌수사에 임명되도록 한 공이 있었으나 영의정 신분으로 임금을 수행하여 평양으로 피난가면서 그곳에서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복권되어 영의정에 올라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1598년에는 명나라 장수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거짓 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북인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명나라에 가서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것을 빌미로 유성룡을 탄핵하였는데, 선조는 이 의견에 따라 유성룡의 관작을 박탈했다. 선조는 1600년에 그를 조정으로 다시 불렀으나 그는 다시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이러한 그의 경력을 염두에 두고 광해군은 그가 처음과 끝이 일정하지 않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준경과 이황에 대해서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이준경의 경우는 고명(顧命, 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함)의 원로로서 정승이 되어 대신의 체통을 지켰고, 이황은 우리나라 종유(宗儒, 우두머리가 되는 유학자)로서 선왕(先王, 선조)의 초기에 보필하는 도움을 많이 주었으니, 이 두 사람을 묘정(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겠다.【이이(李珥)도 사실 배향하기에 합당한데 대신들이 여론을 두려워하여 한마디도 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영의정 박순(朴淳)과 좌찬성 이이도 또한 의논하는 속에 들어 있었으나 당시 재상 중에 저지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추천하여 올리지 않으니 공론이 애석하게 여겼다.】” (【】안의 내용은 일기에 추기된 사항임)

이준경(1499년∼1572년)은 경기도 광주(廣州)가 본관이며 서울 출신으로 대사헌,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는 어릴 때 상서원판관을 지낸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에게서 글을 배우고 황효헌(黃孝獻)과 이연경(李延慶)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531년(중종 26)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장령·홍문관교리(1537년), 홍문관직제학, 승정원 승지(1541년), 한성부우윤, 성균관대사성, 형조참판 등에 임명되었다.

또 병조판서·한성부판윤·대사헌(1548년) 등에 임명되었고, 1550년에는 영의정 이기(李芑)의 모함으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어 지중추부사, 대사헌, 병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558년에는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567년는 하성군(河城君) 이균(李鈞, 선조)을 왕으로 세우고 원상(院相, 어린 왕이 즉위하여 섭정을 행할 때, 원로급 재상으로 승정원에 주재하여 국정 전반에 대하여 정책 결정에 자문으로 참여하도록 한 임시 관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다. 이 때 기묘사화로 죄를 받은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풀어주었고, 을사사화로 죄를 받은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억울하게 수십 년간 유배 생활을 한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등용하였다.

다만 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 등 신진 사대부들과는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571년(선조 4)에는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종 시에는 붕당이 있을 것이니 이를 타파해야 한다는 유언의 상소문을 올려 이이, 유성룡(柳成龍) 등 젊은 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황(1501년∼1570년)은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유학자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상복을 입었고, 1539년에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성균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성묘를 핑계로 귀향하였다. 당시 그는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년),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등 계속되는 사화를 통해서 죄 없는 유학자 관료들이 하루아침에 관직을 잃고 유배를 당하거나 사형을 당하는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년)가 일어나자 그는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호를 퇴계(退溪)라 정하고 독서에 전념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앙 조정에서는 그의 명성을 듣고 자꾸 관직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위험스러운 중앙의 관직을 사양하고 외직을 지망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에 임명되었다. 풍기군수에 재임할 때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紹修書院)이 조정의 지원을 받도록 건의하여 우리나라 사액서원(賜額書院, 조정에서 편액扁額, 서적書籍, 학전學田을 하사한 서원)의 시초가 되도록 하였다.

1552년에는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며, 1556년에는 홍문관부제학, 1558년에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였다. 1560년 이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7년간 기거하면서 수양과 저술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육성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제학, 지경연에 임명되었다. 이후 어린 국왕 선조에게 정이(程頤)의 「사잠(四箴)」, 『논어집주』, 『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을 강의하였으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올렸다.

위에 소개한 『광해군일기』의 기사 뒤에 추가 기입된 사항이 있다. 【】안의 내용인데 거기에는 율곡도 배향의 자격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추가된 내용 중에는 율곡에 대해서 당시 배향 논의가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배향 논의가 정말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러한 내용은 인조반정 직후 서인 학자들이 추가한 기록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