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이귀의 상소문


『광해군일기』 : 이귀의 상소문.

 

해 즉위년(1608년) 2월 13일(음력, 이하 모두 음력임)의 기록(『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함흥 판관으로 있던 이귀(李貴)가 상소문을 올렸다.

“신은 일개 외관(外官, 지방관)으로서 마침 군무(軍務, 군대업무)에 관한 일 때문에 임명되어 서울에 갔다가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였습니다.(선조임금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는 뜻) 그리하여 궁궐로 달려가 관료들이 모여 통곡하는 뒷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한참 울부짖는 슬픔 가운데 삼가 살펴보니 미진한 상례(喪禮)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예관(禮官)이 두서를 바꿔서 행하고 관리들이 일을 태만하게 한 데 대해 옥당(홍문관)에서 논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여러 일 가운데 작은 것이었습니다.”

이귀(李貴, 1557년∼1633년)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옥여, 호는 묵재,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603년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안산 군수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 군수품 징발 등의 공을 세운 바 있다.
그는 선조가 사망 소식을 듣고 궁궐에 들어갔다가 관리들이 예절을 모르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을 목격하였는데 그 일을 상소문에 적은 것이다. 또 이렇게 지적하였다.

“임금이 승하하신 때를 당하여 대신(大臣)이 된 사람은 마땅히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모두 궁궐 앞 넓은 터로 나아가, 초상을 알리는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도 한번 곡을 한 뒤에 관리들이 곧바로 흩어져 모두 구석으로 들어 가버렸습니다. 심지어 대신들은 빈청(賓廳, 관료들이 모여 회의하는 곳)에 모여 앉아 모피 방석에 병풍을 치고서 평일처럼 태연하게 승전(承傳, 보고자)을 출입시키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전하(새로 임금이 된 광해군)께서 거적을 깔고 땅바닥에 거처하는 이러한 때에 신하가 된 입장에서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돌아가신 왕에 대한 효도로서 선왕이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게 해야할 것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일을 경계하도록 건의하였다.

“궁궐 출입을 엄격히 하여 연줄을 통하여 요행을 바라는 문을 막고 사사롭게 예물 바치는 일을 끊어 소인들이 아첨하는 풍조를 제거시키고 언로를 널리 열어 귀에 거스리는 충언(忠言, 충성된 말)이 나오게 하고 조정을 엄숙하고 맑게 하여 좋고 싫음을 공정하게 하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먼저 할 일이 없습니다.”

이귀는 이러한 상소문을 올리고 약 6년 뒤인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에 공신(衛聖原從功臣)으로 인정되어 등록되었다. 그러나 2년 뒤 그는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
이귀는 위의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훌륭한 사람들을 추천하기도 하고 관리들 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비판하기도 하였다.

“정창연(鄭昌衍)이 병이라고 핑계하고 출사하지 않고 있는데, 그의 숨겨진 뜻을 알 수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훌륭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정창연 부자(父子) 같은 사람들은 진실로 등용을 해야 합니다.
박건(朴楗)처럼 인망이 흡족하게 여겨지지 않는 자가 새 정부 제일의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는데, 이 역시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저의 이 말은 임금과 친척관계라는 것 때문에 인재를 죄다 폐기시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눈을 비비면서 새로운 정치와 변화를 기대하고 있는 때에 이런 사람들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정창연(1552∼1636)은 1579년(선조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인물이다. 이후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한 바 있다. 그는 이귀의 상소문 덕분인지는 모르나, 1614년(광해군 6)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이어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박건(朴楗)은 관료나 문신으로 이름이 크게 알려진 사람은 아니다. 광해군과 친척이 되는 인물이라고 하였는데, 한미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이귀가 상소문을 올린 바로 그 날 이귀의 상소문을 읽고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항변한 기록이 있다.(『광해군일기중초본』, 즉위년 2월 13일』)

“지금 함흥 판관 이귀의 소장을 살펴보건대 그 내용에 ‘한 장의 임명장에 임금의 친척에 관계된 이가 3인이다.’고 하면서 신의 성명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인망(人望)이 흡족하게 여겨지지 않는데도 또한 새 정부에서 제일 먼저 높은 직위에 임명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실로 헛된 말입니다. 다만, 외척(外戚)에 대한 한 조항에 관해서 신은 실로 무슨 이유로 그렇게 운운한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귀가 소장을 올려 남을 무함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아 신을 인척이라는 것으로 밀어내려 하니, 구차스럽게 무릅쓰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파직시켜 주십시요.”

박건의 이러한 건의에 임금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이귀의 말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나, 진실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임으로써 언로를 열어야 한다. 다만 그대는 선조(先朝, 앞선 조정)에서 대간과 시종을 역임하였으니, 안심하고 사퇴하지 말라.”

이귀는 자신의 상소문에서 또 조정에서 언로가 막힌 점에 대해 크게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언로가 막힌 것이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먼저 해야 할 일은 언로를 여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비록 시건방지고 망녕스러운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너그럽게 용납해야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죄를 가하여 발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조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언로를 터달라는 것은 요즘 말로는 ‘언론의 자유’를 뜻한다.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귀는 다음과 같이 정인홍의 예를 들어 국가의 언로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지금 정인홍이 죄를 받은 것은 실지로 봉장(封章, 임금에게 올린 글)을 올린 일에 연유된 것으로 내용은 다소 지나친 것이 있기는 합니다만 요점을 따져보면 역시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더구나 정인홍은 선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나이가 또 70세인데 지금 만리나 먼 유배지로 가다가 도로에서 죽는다면 이는 성세(聖世, 어진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한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왜병들과 싸운 인물이다. 자(字)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 서산(瑞山)이다.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이며, 남명학파의 지도자로 북인이었다. 서인인 이귀와는 완전히 대립된 위치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에 북인에 속하여 정권을 잡았으며 그 후 북인이 분열한 뒤에는 이산해와 함께 대북파의 영수가 되었다. 대사헌, 공조참판,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언적, 이황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유적(儒籍, 유학자 명단)에서 삭제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서인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능양군)를 옹립하고 정권을 잡으면서 참형을 당했다.
이귀는 상소문에서 정인홍에 대해서 계속 이렇게 말했다.

“정인홍은 타고난 성품이 편협하여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거의 경박한 무리들이 많고 이들이 왕래하면서 주고받는 말들을 경솔히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신의 스승인 성혼(成渾)을 배척하였으며 일본의 ‘히데요시(秀吉)’라고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망령스럽다는 것은 진실로 따져볼 것도 없는 사실입니다. 신이 정인홍에 대해서 평소 서로 용납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일인데도 지금 이렇게 운운하는 것은 정인홍을 비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은 국가의 언로를 위하여 하는 걱정인 것입니다.”

이귀의 이러한 말은 정인홍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기도 하였다. 『광해군일기 중초본』(광해 2년 4월 20일)에 이귀의 성품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나중에 정리된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귀는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모셨다】강개(慷慨, 불의에 대하여 의기가 복받쳐 원통하고 슬픔)하여 의논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자주 상소하여 시사를 말하였다. 일찍이 정인홍을 꾸짖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그의 죄를 논박하였는데,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이때에 이르러 숙천 부사가 되어 전임 부사 윤삼빙(尹三聘)이 뇌물을 받고 공물을 훔친 죄를 논핵(論劾, 허물을 캐묻고 따짐)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세력이 있던 윤삼빙이 마침내 대관(臺官,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을 사주하여 논박하게 한 것이다.”

이귀는 광해군 초년에 이 사람, 저 사람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아무래도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북인이나 북파와는 대립된 서인 출신이었으며, 성격적으로도 너무 강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 때 『광해군일기 중초본』을 집필한 사람들과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위와 같은 4월 20일자 기록이 사초에 끼어든 것이다. 이 기록은 나중에 정리된 『정초본』에서는 없어졌다.
이귀는 계속에서 상소문에서 자신이 상소문을 올리는 가장 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분연히 큰일을 하려는 뜻을 지니시고 신이 위에서 거론한 네 가지 사항, 즉 궁궐의 출입을 엄격히 하는 일, 개인적인 헌납을 끊는 일, 조정을 맑게 하는 일, 그리고 언로를 여는 일, 이 네 가지 일에 대해 깊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주역』에 ‘국가를 창건하여 계승해감에 있어 소인은 기용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송나라 신하 왕소(王素)가 ‘누구를 정승으로 삼아야 되겠는가?’ 하는 인종(仁宗)의 질문에 답하기를 ‘환관(宦官)과 궁첩(宮妾, 궁중에서 일을 보는 여자들)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선임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전하께서 신중히 해야 될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을 기용하는 한 가지 일에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정치를 하는 즈음에 제가 구구한 정성으로 거듭 기대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귀는 스스로 율곡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섬겼다고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자신의 상소문을 마무리 하였다.

“신은 젊어서부터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이 때문에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대해 대강 들었던 탓으로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 뿐 제 몸이 있다는 것은 모릅니다.(제 몸 생각보다는 항상 국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라는 뜻임-필자주) 그리하여 종전에는 품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대행 대왕(선조임금)께 진달하였는데 대행 대왕께서도 저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통촉하셨기 때문에 죄를 주지 않았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너그러이 용납하셔서 의원에 명하여 약을 하사하고 개나 말처럼 천한 제 몸의 질병을 치료하여 주셨으니, 그 은혜가 너무도 흡족하였습니다. 전하(광해군)께서 저위(儲位, 왕세자)에 계실 적에도 제가 누차 망령스런 말을 진달하였는데도 과분하게 가상히 여기셨습니다. 혹은 칭찬하시고 장려하시는 은총을 받았는가 하면 하사품을 받는 은혜도 있었습니다.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분수에 넘친 은혜를 받는단 말입니까. 항상 감격스러운 마음을 지니고서 단지 결초보은(結草報恩,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하기만 기약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하께서 사위(嗣位,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음)하신 때를 맞이하여 어리석고 망령된 말로 새로운 정치에 만에 하나라도 우러러 도움이 되게 할 것을 생각하며 감히 이렇게 상중(喪中)에 계신 전하께 번잡스레 아룁니다. 그지없이 죄송스럽습니다.”

이귀는 1619년(광해군 11년)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1620년 신경진과 김류가 광해군을 끌어내리는 반정을 모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그도 이서, 김자점, 최명길, 최내길, 구굉, 이괄 등과 함께 반란의 깃발을 올렸다.
1623년 3월 13일 밤 반란 세력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후의 인조)을 추대하는데 성공하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모두 53명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봉되었는데, 이귀는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나중에 이후 연평군(延平君)에 봉작되고 후에 부원군(府院君, 왕비의 아버지나 정일품 공신에게 주는 작위)이 되었다.
『광해군일기 중초본』에는 위에 소개한 이귀의 상소문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인조 10년경에 완성된 『광해군일기』<정초본>에는 그 상소문이 삭제되었다. 『광해군일기』는 결국 반정세력(서인)이 검토, 수정을 하였을 터인데, 반정을 일으킨 이귀가 자신의 상소문을 다시 읽었을 때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아마 자신의 글을 읽고 낮이 뜨거웠을 것이다. 광해군을 향하여 “죽은 뒤에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다”고 해놓고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