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율곡과 퇴계


『광해군일기』 : 선조의 행장에 보이는 율곡과 퇴계.

 

해군 즉위년(1608년) 2월 21일, 전 임금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의 행장(行狀)이 실렸다. 이 ‘행장’이란 ‘행동(行)의 모양(狀)’ 즉 행동거지를 뜻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사망한 사람의 행실을 정리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전기(傳記)’ 보다는 더 짧은 글로 고인의 성명, 생존월일, 자호, 관작, 가족 관계 및 언행 등을 서술한 것이다.
선조의 행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국왕의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휘(諱)인데 공희왕(恭僖王)의 손자이고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정씨는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인데 가정(嘉靖) 임자년 11월 11일 한성 인달방(仁達坊, 지금의 서울 사직동 부근)에서 왕을 낳았다. 왕은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났으므로 항상 예법을 따르기를 좋아하였다. 어릴 적에 공헌왕(恭憲王, 명종. 재위 1545∼1567)이 일찍이 두 형과 아울러 함께 불러들여서 자신이 쓰고 있던 관(冠)을 벗어 차례로 쓰게 하여 하는 행동을 살펴보았다. 차례가 왕에게 이르자 왕이 꿇어앉아 사양하고, ‘군왕께서 쓰시던 것을 신하가 어떻게 감히 머리에 얹어 쓸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공헌왕이 매우 감탄하고 ‘그렇다. 마땅히 이 관을 너에게 주겠다.’ 하였다. 또 임금과 아버지가 누가 더 중하냐고 묻고 글자로 써서 대답하게 하니, ‘임금과 아버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공헌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명종은 아들이 일찍 죽고 없었다. 그래서 후계자로 이복 조카를 선임하였는데 그가 선조였다. 이 과정이 행장의 첫머리에 그려져 있다. 선조는 1567년부터 1608년 까지 약 40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의 중요사건을 연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함
1575년 유학자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짐
1589년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일어남
1592년 왜군이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남
1597년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공함(정유재란)
1598년 노량해전이 일어남. 이순신 전사
1608년 선조 사망. 광해군 즉위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전국의 유학자들, 즉 사림(士林)이 동인과 서인의 두 파로 나누어져 서로 각축을 벌였으며, 일본이 침략하였다. 1592년의 임진왜란과 1597년의 정유재란이 그의 집권 기간 중에 일어났으며, 그는 일시적으로 중국의 국경 바로 앞까지 피난을 가는 수모를 당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100%로 그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은 최고 통치자로서 그가 초래한 것이었다.
그는 유교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의 행장에는 그가 유교를 위해서 이룬 업적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헌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으나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에 대해서는 전해온 것이 드물었다. 그런데 고려의 정몽주가 처음으로 끊어진 학문을 창도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본조(本朝, 조선왕조)에 이르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 등이 서로 계속하여 일어나 도의(道義, 도리와 의리)를 밝히고 경전이 전하는 뜻을 잘 발휘하였다. 왕은 이들이 사도(斯道, 유교)에 큰 공이 있다는 것으로 제일 먼저 명하여 제사를 지내주고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또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게 하는 한편, 유신(儒臣) 유희춘(柳希春)에게 명하여 그들의 행적을 편찬하게 하고 이를 『유선록(儒先錄)』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어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 등을 간행하게 하였으며, 또 『하씨소학(何氏小學)』이 명물(名物, 명목이나 사물)과 도수(度數, 법식이나 수량)를 가장 상세하고 세밀하게 기록하였으므로 초학자에게 편리하다는 점과, 조정에서 편찬한 『삼강행실(三綱行實)』은 윤리와 기강을 세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선조가 재위하였을 당시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퇴계와 율곡이 생존해있던 시기로 주목할 만하다. 또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사림(士林)이 두 파로 나뉘기 시작하였다는 점도 중요하다.(이러한 현상은 선조시기에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렇게 고착화된 것이다.) 사림이 중앙정계에서 이렇게 힘을 갖기 시작한 것은 선조시대 부터였다.
그 전에는 훈구파(조선 건국 공신들과 세조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세력)가 득세를 하였다. 훈구파의 공격으로 사림은 무오사화, 갑자사회, 기묘사회, 을사사화 등을 겪었으나 선조시대에 들어서는 그런 훈구파의 세력을 완전히 꺾고 사림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최고통치자인 선조의 지지가 있었다. 선조는 사림 출신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고, 또 그들을 통해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다.
선조가 즉위하면서 중앙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학자들은 당시 관리들의 임용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직위를 두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과,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으로 나뉘어 경쟁하기 시작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 정철, 윤두수 등이었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 이산해 등이었다. 서인들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따랐고, 동인들은 조식과 이황의 학문을 지지하는 경향을 띠었다. 서인들은 서울의 서쪽에 주로 살고 있고 동인들은 서울의 동쪽에 주로 살고 있었다. 지역적으로 보면 서인들은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즉 기호지역 출신들이 많다. 정치적 성향을 보면 서인들은 신하들의 권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동인들은 왕권의 강화를 강조하였다.

율곡이 사망한 직후에는 동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1589년에 정여립의 역모사건(기축옥사)을 계기로 서인들이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1591년(선조 24년)에는 건저 문제(建儲問題, 왕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논란)로 서인 쪽 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그 뒤 다시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하게 대응하자는 남인(南人)과 강경하게 대응해야한다(사형 주장)는 북인(北人)이 나뉘었다.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 많았고, 북인은 조식의 제자들이 많았다.
선조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남인의 편을 들어주어, 선조 시대 집권 후반기에는 류성룡 등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국난기를 거치면서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북인 중에서는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대거 등장하여 발언권이 강하게 되었다. 선조 시대에 집권세력의 교체를 보면 대체적으로 서인→ 동인 → 남인 → 서인 → 북인으로 흘러갔다. 사실 이렇게 바뀌게 된 근본 원인은 선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측근세력을 바꿈으로서 왕권의 강화를 꾀하고 자신이 편한 정치를 행하려고 한 것이다.
다시 선조 행장으로 돌아가 율곡 이이에 대해서 논한 부분을 살펴본다.

“일찍이 유신(儒臣, 유학을 공부하는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의 『지남록(指南錄)』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비분강개하여 참고 끝까지 다 읽을 수가 없었다. 대개 문산은 백이(伯夷)·숙제(叔齊) 이후 한 사람으로 만세 신하의 표상인데, 우리나라 정몽주의 절의와 문장이 문산과 그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수 있으니, 그(정몽주)의 문집도 속히 출간하여 반포하라.’하고, 이어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합하여 지칭하는 말) 노수신(盧守愼)에게 서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유신(儒臣) 이이(李珥)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찬술하여 올리니, 왕이 매우 가상히 여겨 포상하고 즉시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문천상(文天祥, 1236년∼1283년)’은 남송 시대 정치가로 몽고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회유도 뿌리치고 사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문천상의 문집을 본받아 정몽주의 문집도 출간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그 뒤에 율곡이 『성학집요』를 올렸다는 간단한 문장이 보인다.
이러한 율곡에 대한 언급 외에 선조 행장에는 퇴계 이황에 대한 서술이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왕이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직후에 마음을 가다듬고 잘 다스려지기를 도모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날마다 경연에 나아가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면서 밤중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당시의 명유(名儒) 이황(李滉)이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에 돌아가 학생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했는데 전왕(前王) 때부터 누차 불렀으나 오지 않았었다. 왕이 정성과 예물을 극진히 하여 나오도록 힘껏 부탁하였고 발탁하여 이공(貳公,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아래의 직책인 좌우 찬성贊成을 말함. 이황은 우찬성)에 임명하였다.
이황이 자신을 알아준 데 대해 감격하여 소장을 올려 치도(治道, 정치의 도리)에 대한 여섯 가지 조항을 진달하고 나서 또 『성학십도(聖學十圖)』·『서명고증(西銘考證)』을 찬술하고 정자(程子)의 『사물잠(四勿箴)』을 손수 써서 올렸는데, 왕은 겸허한 마음으로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고 모두 베껴 써서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두게 한 다음 아침저녁으로 바라보고 성찰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불러 대면하고 조용히 다스리는 도에 대해 강론하는 등 예우가 융숭하였으므로 지치(至治, 지극히 잘 다스리는 정치)를 이룰 것을 기약했었다. 그러다가 이황이 사망하기에 이르러서는 마음 아프게 애도하여 마지않으면서 ‘이황이 남긴 글자 하나 말 한 마디도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수집하여 간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퇴계에 대해서 상세한 언급을 하였다. 율곡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매우 자세하다. 퇴계를 관직에 임명하였는데 오지 않았다는 점과 『성학십도』 등 저서를 올린 일, 그리고 사망한 뒤 선조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생각해보면 그렇게 특기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 율곡도 선조가 관직을 권유했을 때, 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성학집요』를 올렸으며, 일찍 사망하여 선조가 그 슬픔을 표한 일도 있었다.

이황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도 보인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또 소장을 올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을 문묘(文廟)에 종제(從祭,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다)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답하기를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겨서 감히 경솔히 허락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 일이 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절로 논의하여 결정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섯 신하를 높임에 있어서는 그들의 학문을 높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이다. 여러 학생들은 모두 영재(英才)를 지니고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들이니 의당 수시로 부지런히 힘써 서로 익히고 닦으면서 다함께 대유(大儒)가 되어 나의 부족한 점을 힘을 다해 보좌해 주는 것이 바로 내가 기대하는 것이다.’ 하였다.”

선조가 사망할 당시 율곡이나 퇴계는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율곡은 퇴계에 비하면 그 학문이나 명성에서 퇴계에 훨씬 미치지 못하여 퇴계에 대한 언급이 율곡보다 많았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선조시대 조정의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선조실록』을 살펴보면 율곡의 이야기가 퇴계보다 더 많이 나온다. ‘이이(李珥)’로 『선조실록』을 검색해보면 모두 203건이 검색된다. ‘이황’으로 검색하면 그 1/2정도인 106건이 검색된다.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이이’는 245건, ‘이황’은 73건만 검색이 된다. 퇴계에 대한 언급이 율곡의 1/3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보더라도 율곡에 대한 언급이 퇴계에 대한 언급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율곡은 실지로 선조와 머리를 맞대고 정치를 논의한 경우가 퇴계보다 월등히 더 많았다. 율곡은 사망하기 직전에도 병조판서(1582년), 돈녕부판서(1583년), 이조판서(1583년) 등에 임명되어 선조의 자문에 대응하고 있었다. 율곡이 사망하던 날 선조수정실록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선조의 슬픔을 전하고 있다.

“이조 판서 이이(李珥)가 졸하였다.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인하여 병이 생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었으므로 임금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이때 서익(徐益)이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임금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율곡의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라고 하고,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사망하였다. 향년 49세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도 놀라서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3일 동안 소선(素膳, 생선이나 육류가 들어 있지 않은 간소한 반찬)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을 더 후하게 내렸다.”

퇴계 이황(李滉, 1502년∼1571년)이 사망하였을 때도 선조는 슬픔을 표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당시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고 조정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선조와 함께 정치를 논하던 상황은 아니었다. 슬픔의 강도가 율곡 보다는 미치지 못함을 그의 졸기에서 읽어볼 수 있다.(『선조수정실록』4권, 선조 3년 12월 1일 숭정 대부 판중추부사 이황의 졸기)

“주상(임금 선조)이 집무를 시작하면서 조야(朝野)가 모두 부푼 기대에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 신성한 덕치)을 성취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임금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하지만 이황은 이미 늙었고 재지(才智)가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하며, 또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도 야박하여 위아래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유학자가 무엇을 하기에는 어렵겠다고 여겨 총록(寵祿, 총애하는 자에게 내리는 봉록)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고야 말았었다. 상은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여 증직(贈職)과 제례(祭禮)를 더욱 후하게 내렸다.”

위 졸기를 잘 읽어보면 선조는 퇴계의 부고를 듣고 슬픔을 표하기는 하였으나 퇴계에 대한 선조의 서운함이 묻어 있다. 『선조실록』 3권(선조 2년 12월 미상)에 실린 「우찬성 이황의 졸기」는 더욱 ‘노골적’이다.

“우찬성 이황(李滉)이 졸하였다. 자는 경호(景浩), 수(壽)는 70이었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순(文純)이라 시호하였다. 학자들이 퇴계 선생(退溪先生)이라 일컬었다. 그의 학문과 사업은 문집에 실려 세상에 전해진다.”

모두 합해서 겨우 3줄 정도의 졸기가 실려 있다.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정은 어찌되었든 퇴계에 대한 선조의 인상은 율곡 만큼 깊지도 않았으며 율곡 만큼 애증이 점철된 관계는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나이 차이도 많았고(퇴계는 선조보다 50살이나 위였다.)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자신이 펼치고자 하는 정치에 대해서 그렇게 ‘무관심’했던 퇴계 보다는 율곡에 더 선조의 관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율곡은 선조보다 15살 위였다.)

그렇다면 왜 선조의 행장은 율곡보다 퇴계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였을까? 선조의 행장을 집필한 사람은 당시 호조판서 이정귀(李廷龜, 1564년∼1635년)였다. 그는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조선시대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본관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이다.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지역적으로 보나 스승 윤근수로 보나 그는 서인에 속한다. 그의 아들은 대제학을 지낸 이명한(李明漢)이며 그 아래로 부수찬, 인천부사를 지낸 손자 이단상(李端相, 1628∼1669)이 있다. 이단상은 제자로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서인의 주류 학자들이다.
이정귀의 스승 윤근수(尹根壽, 1537년∼1616년)는 영의정 윤두수의 동생으로 시인이며 화가이다. 그는 1575년 동인 서인이 서로 갈릴 때, 퇴계 이황의 제자이지만 같은 동문인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따르지 않고 서쪽의 심의겸을 지지하여 서인에 가담한 인물이다. 서인이지만 이황의 제자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남아 있어, 그것이 제자 이정귀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판단해볼 수 있다.
그렇기는 해도 퇴계와 율곡에 대한 균형 맞지 않는 서술은 아무래도 궁금하다. 선조 행장을 집필하던 때는 광해군이 막 집권을 시작하던 시기이며 이때는 서인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인 동인의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인인 이정귀로서는 문장을 잘 써서 선조의 행장을 짓게 되었지만 그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율곡은 조금 약하게, 퇴계는 조금 강하게 서술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이정귀는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고, 이후 병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또 정권이 바뀌어 인조반정으로 서인들과 남인이 집권을 하였을 때도 인조를 가까이서 모시고 벼슬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