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사관에게 밉보인 정혹, 잘보인 이귀


『광해군일기』: 사관에게 밉보인 정혹, 잘보인 이귀.

 

광해군일기』 광해 2년(1608년) 2월 8일자 기사에 「정각, 이귀 등에게 관직을 제수(임명)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광해군일기』에 ‘정각(鄭殼)’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정각’의 정확한 이름은 정혹(鄭㷤, 1559∼1617)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의 「정혹」참조)
우선 그에 대한 임명 내용을 기사는 “정혹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임명하였다.”라고 적었다. 평산은 황해도에 속한 곳이다. 이러한 기사 뒤에 사관은 정혹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혹은 임인년(1602년, 선조 35년)에 대간이 되어(殼壬寅年間爲臺諫) 힘을 다해서 성혼(成渾)을 공격하고(攻成渾甚力) 당파를 모아 들인다고 지적하였는데(指以嘯聚黨類) 자기편 사람 중에서도 그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자가 있자(自中亦有非之者) 글이 짧아 실언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혐(避嫌, 탄핵을 받은 관리가 그 혐의가 풀릴 때까지 사직을 청하고 맡은 업무를 보지 않는 것)하였다.(乃以文短失語避嫌)”

정혹이 성혼을 공격한 사실과 그로 인하여 피혐을 한 사실에 대해서 적었다. 위 문장만 보면 성혼을 공격한 일이 잘못되어 자기편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위와 같은 글을 지은 사관이 그렇게 유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읽는 우리가 잘못이 아니라 사관이 잘못한 것이다. 즉 사관이 교묘하게 왜곡한 것이다.
정혹은 자가 회보(晦甫)‧회이(晦爾)이고, 호는 송포(松浦)이다. 본관은 초계(草溪,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이다. 그는 1589년(선조 22) 증광시에서 생원과 진사에 합격하였다. 1594년(선조 27)에는 정시에서 병과 6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이후 정언, 부수찬, 우부승지, 이조정랑, 지평 등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1605년(선조 38)에는 절충장군(折衡將軍) 행용양위호군(行龍讓衛護軍)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강원감사(江原監司)‧병조참의(兵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정혹은 1602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었을 때, 부제학 이정형(李廷馨), 부교리 박진원(朴震元) 등과 함께 성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 바 있었다.(『선조실록』146권 선조 35년 2월 8일자 기사) 위의 『광해군일기』기사에서 정혹이 성혼에 대해 힘을 다해 공격했다는 말의 근거가 되는 자료다.

“최영경(기축옥사때 정여립과 연루되어 옥중 사망한 인물-필자)은 맑은 명성과 곧은 절조로 평소에 뭇 소인에게 미움을 받아 소인들이 뜬 말로 체포하고, 국문하여 공초하였는데, 위에서 억울함을 통촉하시고 석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철이 기어이 사지(死地)에 밀어 넣고자 하여 친근한 사람을 사주하여 감히 재차 국문하기를 청해 마침내 옥중에서 죽게 하였으니, 말하자니 마음이 아픕니다. 만일 전하께서 통렬히 밝혀내 포상과 주벌의 법전을 크게 행하지 않았더라면 먼 후세에 처사를 죽였다는 이름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즉 이 말은 임금이 잘 판단하여 정철에게 벌을 줌으로써 임금이 책임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뜻임-필자주)
성혼은 정철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로 최영경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면서도 가만히 보기만하고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에 또한 ‘성혼이 만일 힘써 구제하였더라면 최영경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구제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죄가 있으나, 얽어 죽인 것에 비한다면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묘년에 공론이 격발하여 정철이 이미 형벌을 받았고, 그때 재차 국문하기를 다시 청한 신하들도 탄핵을 받았으나 성혼에게 미치지 아니한 것은 대개 죄가 경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초야에서 소를 올려, 최영경의 죽음이 정철 때문만이 아니고 성혼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그렇습니다.”
이러한 건의는 정혹 혼자 했던 것이 아니고 홍문관 차원에서 여러 관리들이 함께 올린 것이다. 그리고 ‘성혼을 공격하는데 매우 힘껏(攻成渾甚力)’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표현이 매우 완곡하다. 직접적으로 성혼을 강력하게 공격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당파 운운한 것도 근거가 없다. 결국 사관이 서인 쪽 입장에 너무 치우쳐서 성혼을 두둔하는 입장에서 정혹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혹은 1602년 3월 28일에 스스로 파직을 신청했다. 위에 소개한 『광해군일기』를 보면 정혹은 성혼을 공격한 일이 잘못되어 자기편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스스로 사직을 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은 정혹의 사임 요청은 성혼의 일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그날 정혹이 올린 사직 요청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이 지금 대사헌 정인홍의 상소문을 보니,(이때 정인홍은 관직을 사임하고 재야에 있었는데, 선조가 그를 매우 신임하고 있었다.-필자) 오늘날 사대부의 폐습을 형용한 것이 이 시대의 병폐를 정확히 맞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신(정인홍 자신)이 일찍이 정철·성혼(서인)과 서로 잘 지내지 못했고 또 유성룡(남인)과 흔쾌하게 지내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도당들은 못 다 푼 분이 해소되지 않아 풍색(風色)이 좋지 못한 까닭에 논핵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지난날의 소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고 한 것은, 혹 정인홍 자신이 이귀(이이와 성혼의 제자)에게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 글씨는 필자의 주석임)

여기서 성혼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정인홍이 스스로 한 말이다. 정혹이 성혼을 언급한 말은 아니다. 그리고 정혹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그중에 ‘(정인홍의 말에) 논핵(허물을 따지는 일)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의심하고 시기하여 지난날의 소요를 초래하였던 것이다.’는 등의 말은, 아마도 지난 날 윤승훈(尹承勳)을 논핵하였던 일을 지적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신이 사간으로서 윤승훈을 논핵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고 대신을 가볍게 논핵할 수 없다고 여겨서였는데, 이는 조정을 중하게 여긴 뜻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언어의 실수를 가지고 대신을 논핵하는 것은 중도를 얻는 것이 아닌데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가 모두 논핵을 하기까지 한다면 더욱 미안한 일이었으니, 신의 말은 진실로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편벽된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윤승훈은 1573년(선조 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인물로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1581년), 대사헌 이이(李珥), 장령 정인홍(鄭仁弘) 등과 함께 심의겸(沈義謙, 서인의 영수)을 탄핵하였다. 그 때 정철(鄭澈)의 탄핵문제까지 함께 거론되자 이에 대하여서는 이이가 반대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이를 논죄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한 윤승훈에 대해서 정혹은 비판하지 않았는데 그 일을 선조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보면 『광해군일기』의 광해 2년 2월 8일자 「정혹, 이귀 등에게 관직을 제수(임명)하였다」는 기사의 정혹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본다. 사관은 이귀(李貴)를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임명하였다는 말 뒤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썼다.

“이귀는 뜻이 크고 말이 곧았으며 성질이 우직했다. 이이와 성혼을 스승으로 높이고 이 두 사람이 무함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글을 올려 논변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이귀가 소를 올려 정인홍의 잘못과 악행을 곧바로 지적하여 조금도 돌아보는 바 없이 하니 사람들이 그를 소마(疏魔, 상소 마귀)로 지목하였다. 또 나라 일을 담당하면서 견해가 있으면 바로 말을 하였으며, 공무를 수행할 때는 법을 받들어 흔들리지 않았고 이해를 돌아보지 않았으며, 강포한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돌하고 과감하며 순서를 기다리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비방을 사서 가는 곳마다 낭패를 보았다.”

이귀는 위의 인용문에서도 말하였듯이 이이와 성혼의 제자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뒤 160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안산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8년(1618년)에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풀려났다.
그로부터 5년 뒤, 1623년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러한 이귀에 대해서 사관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북인인 정인홍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 기록이 인조반정 뒤에 추가되었거나 그 전 기록이라면 사관이 서인의 입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