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노응탁이 조헌 사당의 사액을 신청하다


『광해군일기』: 노응탁이 조헌 사당의 사액을 신청하다.

 

충청도 유생 노응탁이 상소하여 조헌의 사당에 사액하기를 청하다」라는 기사가 『광해군일기』 1609년(광해 1년) 3월 23일자(음력)에 실려 있다. 이 문장은 <중초본>과 <정초본>에 모두 실려 있다. 여기서 ‘사액(賜額)’이란 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서 그것을 새긴 액자(편액 혹은 현판)를 내리는 일을 지칭한다.
사액을 신청한 노응탁(盧應晫, 1555∼1592)은 충청남도 공주 출신 의병으로 호조참판 겸(戶曹參判 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낸 노세득(盧世得, 1526∼1589)의 둘째아들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제자로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는 스승 조헌이 일으킨 의병을 따라 청주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어 금산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33세의 나이로 순절하였다고 알려졌으며, 후세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만경노씨 삼의사(三義士)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임선빈의 연구(「만경노씨 삼의사의 ‘역사적 실재’와 ‘기억된 역사’」, 『역사민속학』47, 2015.03)에 따르면 그를 포함한 삼의사는 임진왜란 때 사망하지 않았으며 그 후로도 수십년간 공주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노응탁은 선조 시대에 오현(五賢)의 문묘종사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광해군 즉위 후에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유생으로 조헌의 사당(표충사)이 사액을 받는 일에 참여하였다.
광해군 1년차에 쓴 이 상소문은 임진왜란 때 노응탁이 사망했다면 있을 수 없는 기록이다. 이렇게 상소문까지 올렸다는 것은 그가 전쟁 때 사망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지은 상소문은 『광해군일기』에 수록되지 않았다. 그가 상소문을 올린 일과 그 일에 대한 사관(史官)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충청도 유생 노응탁이 상소하여 조헌의 사당에도 고경명(高敬命)의 포충사(褒忠祠), 김천일(金千鎰)의 정열사(旌烈祠)의 사례에 따라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상소문을 살펴보니 충신을 드러내려는 선비들의 정성이 가상하다. 마땅히 의논해 처리하겠다.’하고, 이어 ‘해조(該曹, 해당 관청)에 명령을 내려 회계(回啓, 임금의 질문에 대하여 신하들이 심의하여 대답하는 일)하게 하라.’고 하였다.”

조헌(1544∼1592)은 본관이 배천(白川)이며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로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보은 현감, 전라도 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을 맞이하여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 의병 700명과 함께 사망하였다. 토정 이지함,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 등에게 배웠으며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이다.
고경명(髙敬命, 1533∼1592)은 본관이 전라도 장흥으로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1552년(명종 7)에 사마시에 수석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에서도 수석을 하였다. 이해에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고경명은 임재왜란 때 이미 60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1581년에 영암군수를 역임하고 김계휘(金繼輝, 1526∼1582)를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계휘는 1575년 사림들이 동서로 분당할 때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서인으로 지목된 인물이다.(그는 당파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당쟁의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뒤 서산 군수로 임명되었다가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였던 율곡의 추천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1583년에는 한성부서윤, 한산군수, 예조정랑 등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1591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파직되어 고향인 담양의 창평으로 돌아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은 전라도 지역에서 두 아들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를 데리고 각지에서 도망 온 관군을 모아 수원에서 왜적과 대항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올려보냈다. 그 뒤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6,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담양에 집결시켰다. 그는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임명되어 태인, 전주, 여산 등지로 북상하여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아들 고인후와 함께 전사하였다.
고경명은 정여립 모반사건(1589년)의 수사 책임자로 활동하다 많은 동인측 유생들을 희생하게 한 정철의 고향친구이기도 하다. 정철과 함께 임억령으로 부터 글을 배워 동문 사이이기도 하다.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은 나주 출신으로 이항(李恒, 1499년∼1576년)의 제자이다. 그는 1573년(선조 6)에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용안현감(龍安縣監), 강원도·경상도의 도사, 임실현감, 담양부사, 수원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송제민(宋濟民), 양산숙(梁山璹) 등과 함께 의병 300여명을 모아 북쪽으로 출병하였다.
수원의 독성산성(禿城山城)을 거점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금령전투(金嶺戰鬪)에서는 적군 15명을 참살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으며, 강화도로 올라갔다. 이 즈음에 조정에서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軍號)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통천(通川)·양천(陽川) 지역의 의병들까지 모아 강화도 연안의 적군을 공격하고, 양천·김포 등지의 왜군을 패주시켰으며, 양화도전투(楊花渡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3년에는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진격할 때 그들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서울이 수복되자 배로 쌀 1,000석을 공급하여 구휼하기도 하였다. 이해 4월에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하여 상주를 거쳐 함안, 진주에 이르렀다. 6월에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여 관군과 의병을 모았다. 최고 책임자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고, 10만에 가까운 왜군이 대공세를 감행해오자 분전했으나 진주성은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그는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조헌은 마음가짐이 고고하여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았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그들의 덕을 흠모하였다. 정여립【역적이다. – 사관의 기록임】 이 명성을 지고 있을 때 그를 흉악한 역적이라 지적하여 배척하였고, 섬 오랑캐가 길을 빌려달라고 할 때에는 그 왜놈 사신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집에 있어서는 효도가 지극하였고 난리에 임해서는 큰 절개를 지켰으니, 【그 이야기를 듣는 자는 누구인들 격앙되지 않겠는가.】또 단지 고경명·김천일과 같은 무리는 아니다.”

마지막에 사관은 조헌이 ‘고경명이나 김천일과 같은 부류는 아니다(非但高、金之倫也)’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조헌을 더 높이기 위한 평일 것이다. 고경명도 김천일도 조헌처럼 몸을 던져 왜병에 항거를 하고 순직한 인물들이다. 다만 조헌과 다른 것은 두 사람 다 율곡이나 성혼과 직접적인 사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지역적으로도 이들은 서울, 경기도에서 멀다. 고경명은 율곡보다 4살 더 많으며 김천일은 율곡과 나이가 같다.
이 기록에 의견을 덧붙인 사관은 서인 측 사관일 것이다. 정여립을 역적이라 칭하고 조헌, 이이, 성혼을 높여서 기록한 내용을 보면 그렇다. 이 기록을 통해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나중에는 성혼보다 더 높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그렇게 높게 인식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