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일기』 : 광해군의 역린을 건드린 허성


『광해군일기』 : 광해군의 역린을 건드린

허성.

 

광해군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직후에 이미 사망한 생모 공빈 김씨를 후궁에서 왕비로 승격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다. 능을 조성하고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였다. 광해군은 말하자면 선조의 적자가 아니라 서자였다. 광해군 위에는 친형으로 임해군이 있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일찍 여의고 외할아버지 김희철에 의지하여 살았다.

선조는 뒤늦게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영창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결국 서자인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궁중에서는 다양한 의견과 다툼이 있었으나 대북파의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의 지원을 받아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은 이들 대북파를 중용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대북파 외에도 남인인 영의정 이원익을 비롯하여 서인 측 인사들도 폭넓게 등용하기는 하였으나 대북파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허성(1548년∼1612년)은 문신으로 이조참의,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전라도안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산전(山前)으로 아버지는 허엽(許曄)이며, 허봉(許篈)과 허균(許筠)이 그의 배다른 동생들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오빠이기도 하다.

그는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으로, 당시 이름난 문장가였다. 1568년(선조 1)에 생원이 되었다가 그로부터 15년 뒤인 1583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0년에는 조선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의,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7년에는 선조의 유언을 받는 자리에 참석하여 소위 고명칠신(顧命七臣, 임금이 나라의 뒷일을 부탁한 일곱 대신)이라 불렸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6권, 광해 2년 3월 14일)에 「지돈녕부사 허성이 (임금의) 생모 추숭에 대해 반대를 건의하였으나 불허하다」라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정초본>에도 실려있다.

앞서 소개하였듯이 광해군은 국왕의 자리에 오르자 마자, 후궁의 신분으로 자신을 낳고 24살의 나이로 사망한 어머니 공빈김씨(1553년∼1577년)를 선조의 왕비로 승격시키고 거기에 어울리는 묘지를 조성하였다. 젊어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광해군의 조치에 대해서 허성은 ‘고명칠신(顧命七臣)’의 한사람으로서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당시 그는 지돈녕부사의 자리에 있었다. 이러한 직책이 있는 돈녕부는 왕과 왕비의 친인척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특히 당시 돈녕부는 왕의 외척이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먼 친척들을 대우하여 직함을 주기 위한 관부에 불과하였으며, 지돈녕부사 역시 직무가 거의 없는 한직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허성으로서는 광해군의 생모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상소문을 시작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공자가 이르기를 ‘살아 있는 사람은 예로써 섬기고 죽은 사람은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지내면 효도라고 할 수 있다.’하였습니다. 이렇듯 예란 인도(人道)의 큰 법이고 효도란 백가지 행동의 근원입니다. 예로 행하면 효도이고 예로 행하지 않으면 효도가 아닌 것이니 예를 잘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에 따라 효도와 불효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성은 예가 중요하지만 예를 잘 알고 법도에 맞게 예를 행해야한다는 뜻으로 이러한 말을 한 것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후궁이었던 생모를 왕비로 추증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이 추숭하는 은전(恩典,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특혜)으로 보아 성상(임금)의 뜻이 간절하심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엄한 (임금의) 전교가 한번 내려지자 대소 신하가 모두 감히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아 여기에 대하여 의논을 제기하지 못하고, 참으로 천리(天理)에 당연하고 예법에 마땅히 허락해야 되는 것처럼 여겨져 버렸습니다. 상(임금)께서도 다시 신중을 기하지 않고 한마디로 판결하고 의심치 않아 예(禮)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이 여기고 계십니다.”

잘못된 예로 생모를 추숭한 것에 대해 그 잘못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또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한 듯이 여기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비판하게 된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예에는 두 어른이 없고 가정에는 두 적처(嫡妻, 정식 아내 즉 적실嫡室)가 없습니다. 의인 왕후(懿仁王后, 선조임금의 정비正妃)는 이미 모후(母后)의 높은 이로 선왕(先王, 선조)의 배위(配位, 부부가 모두 죽은 경우, 그 아내를 지칭함)가 되어 왕후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우리 성상(광해군)은 선왕이 아들로 삼는다는 명을 받들어 임금의 적통(嫡統)에 올랐으니, 성모(聖母, 광해군의 생모)가 비록 낳아서 기른 은혜가 있으나 분수와 의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감히 왕후(의인 왕후)와 함께 적통을 견주지 못하는 것은 명백합니다. 또 적통(嫡統)을 계승하였으면 그 사친(私親, 서자의 생모)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예(禮)의 큰 법입니다. 사대부 집안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더구나 막중한 임금이겠습니까? 임금의 일신(一身)은 선조와 일체가 됩니다. 비록 자신을 가볍게 하고자 하더라도 종묘사직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어서 허성은 중국의 사례, 예를 들면 한나라 장제(章帝)의 사례를 들어 광해군의 생모 추숭이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지금 성상(광해군)께서는 인덕과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고명(高明)하니, 마땅히 훌륭한 시대에 예를 지키고 의리를 두려워하던 임금을 법으로 삼아야 합니다. 어찌 스스로 쇠퇴하고 무도한 말세에 비교하여 스스로 꺼려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모든 사람들이 서로 대할 때의 정(情)은 예로써 서로 공경하면 기뻐하여 편안하고, 예가 아닌 것으로 서로 대하면 수치스럽게 여겨 성을 냅니다. 인정이 이미 이와 같으니 신도(神道, 죽은 자의 도)가 어찌 다르겠습니까. 신은 이번에 거행하는 일이 예인지 예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신은 다만 예를 어기는 것이 성상의 효도에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성모(聖母, 광해군의 생모)의 마음도 또한 어두운 지하에서 부끄럽게 여길까 염려됩니다.”

이어서 그는 사람들이 송나라 인종의 사례를 들어서 광해군 생모의 추숭에 대해서 지지를 표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신이 조정의 의논을 듣건대 이신비(李宸妃, 송나라 인종의 생모) 의 일을 인용하여 말한 자가 있다고 하나,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송 인종(宋仁宗)은 단지 살아 있을 때 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길 줄만 알아 그런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첩모(妾母, 측실인 생모)를 높여 황후라 칭하였으니 (부족한 어머니를) 엄한 아버지와 짝을 만드는 것이 의리에 해가 되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춘추전』에 이르기를 ‘단지 생모(生母)를 높이려 한 것이고 그 아버지가 천(賤)하게 되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하였고, 또 ‘그 아버지를 낮추면 근본이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대로 하면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또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지막한 돌은 밟는 자도 낮아진다.’고 하였습니다. 나지막한 돌을 밟아 스스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시인(詩人)도 예를 잃은 것을 희롱하였는데, 자기 아버지를 낮추는 것으로 말하면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송나라 인종(仁宗)의 실덕(失德, 덕을 잃음)입니다. 경계할 일이지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은 못 됩니다.”

이렇게 신랄하게 송나라 인종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광해군의 행동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자신의 상소문을 마쳤다.

“신이 병이 난 이후로는 기력이 약해져 말채찍도 들지 못하는데 다른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오직 국가를 위하는 충성심은 아직 모두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때로는 광기어린 말을 하여도 너그럽게 용서하시니, 신은 참으로 무슨 마음이기에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임금을 해친다는 꾸지람을 앉아서 부르겠습니까? 신은 매우 절박한 마음을 견딜 수 없어 감히 아룁니다.’”

광해군은 이러한 상소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상소를 살펴서 잘 알았다. 생각한 바가 있으면 다 이야기하는 경의 뜻은 참으로 아름답다. 다만 내가 생모(生母)를 추숭하는 일은 역대의 제왕들이 융성한 예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오직 명나라 효종(孝宗)이 인정과 도리, 그리고 예와 관련된 문장을 참작하여 이미 중도(中道)에 맞는 예를 행하였으니, 나도 이것을 법으로 삼으려고 한다. (중략) 나의 소견이 이와 같으니 경은 잘 알도록 하라.”

광해군은 매우 격식을 차리고 답을 하였으나 사실은 자신의 생모에 대해서 가리지 않고 말을 쏟아내는 허성의 상소문에 대해서 매우 불쾌해 하였다. 이러한 광해군의 심정은 허성의 상소문 아래에 적은 사관의 글에 잘 드러나 있다.

사관은 먼저 다음과 같이 허성을 평가하였다.

“사신(史臣, 사관)은 논한다. 허성(許筬)은 허엽(許曄)의 아들이다. 허엽은 유학자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비록 식견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막혔으나 만년까지 지킨 절의는 법으로 삼을 만하다. 또 그의【도덕과 행위】【평생토록 다져온 학문은】 사림에 칭송하는 바가 되었다. 허성은 이름난 자의 자식으로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가풍(家風)이 있었는데 청렴하고 삼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힘쓰지 않고 청렴하지 못하다고 꾸짖음을 받았다.】【탐심이 많아 옳지 않은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하였다.】” (【】안의 글은 추가된 글임)

또 사관은 허성이 일본에 간 일, 그리고 허성의 형인 허봉이 율곡 이이를 질투하고 미워한 점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김성일(金誠一)에게 추하게 여김을 당하였고 일생동안 파당(派黨) 심기를 좋아하였다. 어질고 능한 이를 질투하고 【논의가 몹시 편벽되어】 그 무리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아우가 있는데 하나는 허봉(許篈)이고 또 하나는 허균(許筠)이다. 모두 문장에 능하였으나 경박하고 품행이 없었다. 허봉은 사적인 원망으로 제일 먼저 이이(李珥)를 공박하여 질투하고 미워하는 효시가 되었고, 허균은 간사하고 음탕하여 행동이 금수와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엽은 아들 셋이 있으나 실은 자식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사관의 허봉과 허균에 대한 평은 몹시 신랄하다. 그것은 광해군 초기에 정권을 잡은 그들이 서인과 대립한 북인 강경파였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버지 허엽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뉠 때 동인의 창당 멤버였다. 허성의 경우는 동인이었지만 서인의 편을 들기도 하였다.

1590년에 왜나라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서인 황윤길이 정사, 동인 김성일이 부사였다. 이 당시 허성은 서장관으로 차출되어 일본에 갔다가 1591년 1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일본의 동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의 의견에 동조하여 ‘일본이 침략해올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동생 허균과 함께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사관은 이어서 허성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허성은 능히 진언(進言)하는 의리를 잊지 않아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고 논하고 임금을 비판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이를 보면) 일에 따라 간하는 풍도가 다소 있으니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상소가 들어가자 왕은 비록 너그럽게 용서하였으나 이때부터 미움을 당하였다. 호사가 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10장의 초피(貂皮, 담비 가죽)가 그를 그르쳤다.’ 이전에 김치원(金致遠)이 귀양을 가게 되자 허성이 상소하여 변론하니, 왕이 크게 칭찬하여 초피 10 장을 주었는데, 허성이 한강 가에 정자를 세우고 현판을 십초(十貂)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관의 말 뒤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추가되어 있다.

“【허성은 한평생 조정에 있으면서 바른말로 임금을 촉발시킨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풍기가 있어 병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비로소 비분강개하여 국가의 일을 말하였다. 김치원이 귀양을 가게 되자 상소하여 구원해 주면서 논하여 임금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이 때 10장의 초피(貂皮)를 하사받았는데, 허성은 강가에 정자를 짓고 십초(十貂)라 이름 하여 자랑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왕은 ‘나지막한 돌은 밟는 자도 낮아진다.’는 말을 몹시 싫어하였다. 그가 여러 번 이 말을 드러내니 당시 사람들은 자못 강직하다고 하였다.】”

사관들은 처음에는 허성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행동에 대해서 엄하게 논박하는 허성에 대해서 은근히 칭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성은 위와 같은 상소문을 남기고 2년 뒤에 만 64세로 사망하였다. 그 2년 뒤인 1614년(광해군 6년)에 그는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수행한 공로를 인정받아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으로 기록되었다. 광해군은 그로부터 9년 뒤인 1623년에 서인과 남인의 손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다.